세계화 꿈꾸는 기업 부설 연구소들
  • 이철현 기자 (leon@sisapress.com)
  • 승인 1996.08.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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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기업 하청 연구 지양, 국가적·세계적 연구소로 성장 모색… 재정 자립도 약해 독립 요원
 
주요 대기업 경제연구소들이 재벌의 두뇌 집단이라는 이미지를 벗고 한국의 두뇌 집단이 되기 위해 변신을 꾀하고 있다. 이들은 종전에 하던 거시 경제 정책이나 산업 정책 연구는 현상 유지를 하거나 줄이되, 자신 있는 연구 분야를 특화하면서 자신의 색깔을 드러내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원(원장 최우석)은 이러한 변화의 한가운데에 있다. 삼성그룹의 ‘아이디어 뱅크’가 아니라, 미국 헤리티지 재단과 같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연구기관이 되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지난 3월 연구원은 대대적인 조직 개편을 단행했다. 동향 분석이나 단기 과제 연구에 치중하던 인력의 3분의 1을 계열사로 보내고, 올해 말까지 거시 경제 정책 전문가를 중심으로 연구 인력을 1백60명으로 늘릴 계획이다. 연구원은 ‘21세기 한국의 국가 경영 전략’ ‘한국자본주의와 대기업의 발전 방향’ ‘통일 시나리오 연구’ 등을 주요 연구 과제로 삼아, 인력과 예산을 21세기 장기 전략에 집중 투자하고 있다. 지난해에만도 21세기 연구에 20억원을 투자하고 연간 70회 이상의 세미나를 개최했다.

“대기업 연구소 여건이 국책 연구소보다 낫다”

현대경제사회연구원(원장 김중웅)은 민간 연구소로서는 처음으로 94년 11월에 통일 시나리오와 남북 경협을 연구하는 ‘통일경제센터’를 만들었다. 통일경제센터의 연구 실적은 연구원이 발간하는 <통일경제>에 실어 매달 발표한다. 김중웅 원장은 “북한을 방문한 재미 교포가 북한 고위층이 <통일경제>를 읽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라고 말했다. 삼성경제연구원도 최근 통일 시나리오를 연구하기 위해 통일연구센터를 신설하였다.

사실 ‘21세기 장기 전략’이나 ‘통일 시나리오’는 한국개발연구원(KDI)나 한국산업연구원(KIET) 같은 국책 연구소의 연구 주제라 할 수 있다. 이제 대기업 연구소들이 국책 연구소의 임무를 일부 떠맡겠다고 나선 것이다. 대기업 연구소는 인력 구성이나 예산 면에서 자기들이 국책 연구소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온 사람들이 한국개발연구원 등으로 몰렸으나, 얼마 전부터 민간 경제연구소들이 높은 보수와 윤택한 연구 환경을 제시하며 인재들을 유치하자 해외 석·박사 들이 민간 경제연구소로 많이 들어오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원 윤순복 경영전략실장은 예산이나 연구원 수준 면에서 민간 경제연구소가 국책 연구소를 앞선다고 주장했다.

대우경제연구소(소장 이한구)는 금융·자본 시장 연구에 주력한다. 대우경제연구소는 비교 우위에 있는 증권시장 분석을 특화하기 위해 상장 기업을 분석하는 데 연구 인원 가운데 가장 많은 28명을 배정했다. 이 연구소는 원래 84년 대우증권 부속 연구소로 출범했다. 국내 최대 증권사의 부속 연구소답게 초창기부터 금융시장과 자본시장에 대한 연구가 활발했다.

LG경제연구원(원장 이윤호)은 ‘지식 산업’의 선구자가 되려 한다. 그래서 컨설팅 사업이 활발하다. 다른 경제연구소들이 컨설팅 부서를 점차 줄이면서 거시 경제 연구에 치중하는 데 비해 LG경제연구원은 오히려 컨설팅 부문을 강화하고 있다. 인원 구성을 보아도 컨설팅 분야가 전체 연구 인원의 절반을 차지한다. LG경제연구원은 수입의 60%를 외부 고객에 대한 컨설팅에서 벌어들이고, LG그룹과도 포괄 용역 계약을 체결하여 계열사 경영 자문을 전부 유료로 하는 등 재정자립도를 높이는 데 주력하고 있다. ‘범아시아 철도 프로젝트’ ‘농어촌 농경지 활용 방안’ 같은 공공 정책 용역뿐만 아니라 교보증권·한국통신·신한은행 같은 민간 분야의 컨설팅에도 적극 응하고 있다.
 

지금까지 대기업 연구소들은 모기업에 유리한 경기 전망과 정책을 양산하는 데만 급급하여 실물 경제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한다고 비판 받아 왔다. LG경제연구원 김주형 이사는 90년대 초만 하더라도 연구원이 올린 경기전망 보고서에 담긴 수치를 경영자들이 결재 과정에서 연필로 고치는 경우마저 있었다고 말했다. 김이사는 “연구소의 생명은 신뢰성과 공정성이다. 이는 모기업으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지 않는 연구 환경이 마련되어야 가능하다”라고 말했다.

모기업 양해·지원 없이는 일장춘몽 될 수도

LG경제연구원이 지식산업의 선두 업체로 자부하면서 철저히 수익이 보장된 연구 활동을 하는 데 반해 삼성경제연구원은 컨설팅 사업을 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거의 무료로 하기 때문에, 예산 전부를 그룹으로부터 지원 받을 수밖에 없다. 대신 그룹 관련 연구 용역을 줄여 연구 내용 면에서 독립을 꾀하고 있다.

재정 자립도가 20%밖에 안되는 현대경제사회연구원의 경우 모기업 관련 용역을 삼가고 공공 부문에 대한 연구를 강화하고 있다. 특히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의 대통령 출마 때 정치 태풍에 휘말려 선거정책연구소로 전락했던 경험이 있어 독립에 대한 열망은 다른 연구소들보다 강하다. 94년 김중웅 원장이 취임한 이후 자본금을 백억 원으로 올리고 그룹이 연구원 경영에 개입하지 않을 것을 약속 받았다.

민간 경제연구소가 ‘대기업의 책사’ 노릇을 버리고 ‘국내 경제의 조타수’로 자리매김하려는 노력은 바람직하다는 평을 듣는다. 그런데 과연 끊임없이 자본 축적에 몰두하고 있는 국내 대기업들이 산하 연구소의 독립을 허락할지 의문이다(아래 상자 기사 참조). 결국 민간 경제연구소의 독립은 모기업의 양해와 지원 없이는 불가능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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