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 50주기 맞아 되살아나는 케인스
  • 이교관 기자 ()
  • 승인 1996.07.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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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50주년 맞아 케인스주의 복권… 국가 개입 정책 강화 추세
올해로 존 메이나드 케인스가 사망한 지 50주년이 된다. 총수요 관리와 완전 고용을 위한 임의적인 재정 정책을 핵심으로 하는 순수한 케인스주의는 그가 46년 사망한 이후 30여 년 가까이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그러다가 70년대 초반 인플레이션의 화염이 전세계를 휩쓸자 기세등등하던 케인스주의의 영향력도 사라졌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시장 경제를 가장 잘 운영할 것인가에 대한 케인스의 걱정은 50년 전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매우 중요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케인스 전기 작가로 유명한 영국인 로버트 스키델스키는 케인스의 생애와 영향에 대한 짧은 연구인 <케인스>에서 순수한 케인스주의는 통화주의가 그 자리를 대체하기 전까지 10년이 넘도록 모든 경제 정책의 강령이었다고 주장한다. 케인스주의는 61년 존 F. 케네디가 미국 대통령이 되면서부터 세계적인 영향력을 확보하기 시작했고, 73년 10월 1차 석유 파동으로 시작된 인플레이션의 화염 속으로 사라지면서 그 장엄한 일생을 마감했다.

그러면 케인스주의는 무엇 때문에 그다지도 짧은 생애를 살아야만 했는가. 이와 관련해 스키델스키는 설득력 있는 답을 내놓았다. 케인스주의가 자본주의와 자본가들을 위한 안전한 세계를 만들려는 욕망을 실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와 같은 욕망은 케인스주의가 공공 부문의 불균형적인 성장과 동일시됨에 따라 파괴되었다. 결과적으로 순수한 케인스주의는 인플레이션, 통제정책, 비대해진 재정 그리고 단기주의라는, 자신을 파멸로 몰아간 네 마리 말을 낳고 만 것이었다.

돈 가치 파괴야말로 케인스주의 시대가 남긴 중요한 유산이다. 케인스 사망과 순수한 케인스주의 사망은 시기로 보아 약 30여 년 차이가 나는데, 그동안 영국의 소비자 물가 수준은 약 4백50%나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그와 같은 인플레이션은 영국 역사상 거의 없었다고 한다. 결국 케인스주의로 인한 인플레이션 심리는 아직까지도 완전하게 제거되지 않았는데, 경기 침체와 실업이라는 측면에서는 엄청난 비용을 부담해야만 했다.

케인스주의 시절 각국 정부는 인플레이션이 기승을 부릴 때 완전 고용을 지속하기 위해 물가·임금·이윤을 통제했다. 그와 같은 간섭은 동기 부여와 경쟁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믿음에 의해 부분적으로 정당화되었다. 케인스주의는 완전 고용과 성장은 오로지 실질 수요를 확대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동기 부여에 대한 이와 같은 주의 부족은 증가하는 세금과 공공 지출의 나쁜 효과들에 대한 케인스주의자들의 무관심에서 잘 드러났다.

 
케인스는 온건 정책, 사도들은 극단 경향


이와 같은 잘못들은 심각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스키델스키는 조심스럽게 케인스의 신중한 자세를 그의 사도들이 보인 극단적인 자세들과 구별하고자 한다. 무엇보다 케인스가 비록 지적으로 지나치게 자신만만하기는 했으나, 그는 그의 사도들과 달리 자유로운 사회에서 정책이 성취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매우 온건한 반응을 보였다는 점이다. 그 다음으로 그의 사회적 목적들은 그 자신이 표현하는 바와 같이 온건하고 보수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케인스의 사회철학에는 지난 70년대의 재정 위기들을 야기한 국가 복지 정책의 무차별 확대를 지지하는 그 어떤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케인스가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결코 아니다. 만약 순수한 케인스주의로 인해 각국 경제가 많은 상처를 입었고, 케인스 자신이 이에 따른 비난의 일부를 껴안는다면, 그의 사상은 이제는 단순히 역사적인 호기심으로 전락하고 만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가 않다. 가장 분명한 것은 현대 거시 경제 이론은 그의 세미나 작업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오늘날 어떠한 경제학자든 케인스주의자이거나 反케인스주의자로 분류할 수 있다. 게다가 한때 케인스주의를 성공적으로 계승했던 통화주의가 붕괴함으로써 그의 정책 접근 방법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하고 있다.

케인스 이전에는 각국 정부가 금본위제와 균형 예산과 같은 통화 및 재정 정책을 위한 특정 규칙들을 준수해야 한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케인스는 그러나 환경을 변화시킨다는 견지에서 임의적인 재정 정책이라는 아이디어에 유혹되었다. 이같은 편애는 케인스의 비전 중에서 가장 지적이고 흥미로운 측면―미래에 관한 폭넓은 불확실성과 그로 인해 현대 경제에서는 수백만 생산자와 소비자의 계획들을 조정하기 매우 어렵다는 점에 대한 그의 강조―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자원들의 완전 고용은 사람들이 불가피하게 불확실한 미래에 관해 그들의 끊임 없이 변동하는 기대들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달렸다. 예를 들어 불확실성이 높은 시기에는 사람들이 부를 가능한 한 유동 상태로 보유하려고 애쓴다. 구매력의 일반적인 보유 형태인 돈이 사람들에게 허용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들이 이와 같이 돈으로 탈출하기 때문에 위험한 장기 유가증권의 투자 이윤이 오르게 되고, 그 결과 투자는 감소하게 되거나 아마도 붕괴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물론 케인스는 자신조차 이와 같은 암시들을 완벽하게 분석할 수 있는 도구들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늘날의 어떤 경제학자도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그는 무엇이 주요 문제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했다. 바른 대응은 임의적인 통화와 재정 정책을 채택하는 것이라고 그는 결론지었다. 그러나 시장 경제에 내재한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 각국 정부가 채택할 수 있는 분명한 방안은 자신들의 행위가 예측 가능하고 투명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20년대와 30년대에 케인스와 논쟁했던 영국 재무부 관리들은 26년에 스털링(영국의 화폐 단위)이 금본위제로 돌아가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었다는 점에서 바로 그 점을 이해하고 있었다. 물론 케인스는 스털링의 금본위제 복귀 결정을 비난했다.

“한국은행 독립, 시기상조다”

이같은 딜레마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 규칙에 따라 운영되는 통화 체계가 아직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통화 증가율을 위해 어느 한 규칙에 의존하려는 시도는 전혀 실효성이 없음이 이미 입증되었다. 시장에 의해 탄생한 돈은 정확하게 목표를 정할 수 있는 사물이 결코 아닌 것이다.

최선의 답안은 인플레이션 혹은 명목 국민 소득을 위한 목표를 이루려는 책임을 중앙 은행이라는 정부 기구에 위임하고, 확실성 있는 재정 정책을 신중하게 펴는 것이다. 인플레이션의 위험을 이해했던 케인스 자신은 아마도 각국 정부가 매일매일 엄청난 정치적 압력에 시달리는 오늘날의 상황에서는 이와 같은 해결 방안을 지지했을 것이다. 케인스 자신이 밝혀낸 폭넓은 불확실성이라는 문제에 실질적인 대응을 하고 있다면 어떤 경우든 그것은 케인스주의적이다.

결국 지나치게 임의적인 재정 정책을 사용해 높은 인플레이션을 야기했던 순수한 케인스주의는 죽었다. 그러나 시장 경제에 내재한 불확실성을 국가, 즉 정부가 직접 개입해 극복해야 한다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케인스주의는 살아 있다는 것이 경제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는 미국 클린턴 행정부의 경제 관련 고위직을 로버트 라이시와 같은 MIT 대학 교수 출신 후기 케인스주의자들이 장악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시장은 자율 조정 기능이 있으므로 정부가 개입해서는 안된다는 시카고 대학 밀턴 프리드먼 교수를 비롯한 통화주의자들의 주장이 옳지 않다는 사실이 마침내 드러난 것이다.

한국에서 케인스주의의 복권은 특히 한국은행의 독립과 관련해 매우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케인스주의적 관점에서는 한국은행의 독립을 민주화 투쟁처럼 바라보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 몇몇 경제학자들의 지적이다. 무엇보다 정부로부터 한국은행이 독립하는 것은 곧바로 정부가 총수요 관리나 고용 촉진을 위한 사회간접자본에 투자하기가 어렵게 된다는 점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독립된 한국은행은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지금보다 더 철저히 통화량 증가를 막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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