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유럽의 고강도 개방 압력
  • 이철현 기자 (leon@sisapress.com)
  • 승인 1996.07.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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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유럽 고강도 개방 압력… 한국, OECD 가입 맞물려 진퇴양난
 
전세계에서 사업을 하는 미국 업체를 지원하기 위해, ‘통상무역법 301조’라는 청룡언월도를 휘두르며 세계 어디든지 날아가는 관운장 같은 사람이 있다. 클린턴 대통령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이 관리는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를 지내던 시절부터 미국 업체에게 불공정 무역 관행을 자행한다고 생각되는 국가에 쳐들어가 회유와 설득, 그것도 안되면 협박까지 주저하지 않는다. 바로 미키 캔터 상무장관이다.

캔터 상무장관은 취임하자마자 첫 방문지로 한국을 택하여 6월25일 방한했다. 그는 김영삼 대통령을 비롯하여 박재윤 통상산업부장관, 추경석 건설교통부장관, 이석채 정보통신부장관을 차례로 만나, 자동차·통신기기·건설 시장을 개방하라며 특유의 통상 압력을 가했다.

그는 또 지프차에 대한 세율 인상이 지난해 9월 타결된 한·미 자동차 협상을 위반한 것이라고 꼬투리를 잡으며 지프차에 대한 세율 인하를 정부측에 요구했다. 지프차 세금 인상이 크라이슬러가 제작한 미니밴 캐러밴을 한국에 수출하는 데 차질을 줄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또 한·미 합작 회사인 신세기통신을 방문하여 정태기 사장에게 7월에 있을 2천5백억원 규모의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방식 휴대폰 장비 입찰에 미국 회사의 참여를 요구했다.

캔터 장관의 전천후 세일즈 로비

캔터 장관의 세일즈 외교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미국 항공서비스 전문 회사인 오그덴의 한국 건설 시장 진출을 지원했다. 오그덴은 영종도 신공항 건설 사업에 자본 투자를 모색하고 있다. 신공항 근처에 들어서는 열병합 발전소 건설에 LG그룹과 컨소시엄으로, 신공항 화물터미널 건설에는 단독으로 입찰에 나섰다. 정부는 94년 말 ‘민간자본 투자유치 촉진법’을 제정하고 사회간접자본 건설에 민간 자본을 유치하고 있다.

정부가 발주한 공사에 외국 자본이 직접 투자에 나선 경우는 없었다. 그래서 국내 업체로부터 견제를 받는 오그덴은 낙찰에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캔터 장관이 6월25일에 추경석 건설교통부장관을 만나 직접 오그덴을 거론하면서 미국 업체를 신공항 건설에 참여시켜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이 정도면 미키 캔터가 업계 로비스트인지 미국의 상무장관인지 구별이 안간다.

 
캔터 장관이 미국 대사관저에서 자동차 세일즈를 하고 있는 동안 서울 힐튼 호텔에서는 ‘한·EU(유럽연합) 자동차 산업 포럼’이 열렸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산업국 스테파노 미코시 총국장, 유럽자동차공업협회 카밀 블룸 사무총장 등이 기자회견을 갖고 “한국의 자동차 시장은 세계에서 가장 폐쇄되어 있다. 외국산 자동차 점유율이 최소한 10~15%는 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와 동시에 유럽 자동차 업체들은 한국 자동차 부품 업체가 영세하고 원천 기술이 부족한 것을 알고 국내 자동차 부품 업체와 기술 제휴 또는 합작 사업을 모색하였다. 국내 자동차 시장에 대한 우회 침투를 꾀하는 것이다.

최근 이러한 통상 압력의 약효가 나타나는 듯하다. 최근 자동차 수입이 급증하고 있고(도표 참조), 소비재를 중심으로 한 외국 상품이 물밀듯이 들어오고 있다. 게다가 수입 물량의 70%를 차지하는 자본재와 원자재 수입이 오히려 늘고 있다. 원천 기술이 빈약한 국내 산업 구조상 수출을 늘리려면 그만큼 자본재와 원자재를 수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무역 수지가 악화해 국제 수지 관리가 경제 당국의 최대 현안이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무역 수지 개선을 위해 정부가 사용할 수 있는 장치들이 별로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바로 한국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여부를 최종 결정하는 시한이 올해 9월로 다가섰기 때문이다. 이 기구에 가입하기를 희망하는 국가는 무역위원회를 비롯한 산하 위원회의 가입 심사를 통과해야 한다. 그래서 정부는 경제협력개발기구의 요구대로 무역과 금융 관련 규제를 폐지하거나 축소하여 선진국 수준으로 국내 시장을 개방하고 있다.

과거에는 무역 수지 관리 차원에서 정부가 취할 수 있는 단기 대책이 여러 가지 있었다. 예컨대 외제 차나 골프채를 구입하는 사람을 세무 조사한다든지 국산품 애용 캠페인을 벌이는 방법이다. 수출이 부진할 때는 경제 당국이 무역업체 사장단을 불러 종합무역상사의 수출 목표치를 상향 조정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이제는 정부 당국이 금융 정책이나 산업 정책을 써서 인위적으로 경제를 조정하는 것을 경제협력개발기구가 제한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들은 정부가 개입한다고 해도 효과 있는 단기 대책은 있을 수 없다고 본다.

결국 시장 개방과 규제 철폐는 어쩔 수 없는 대세인 셈이다. 국내 산업 구조를 효율적인 생산 체제로 개편하든가, 기술 개발과 능률 경영을 통해 기업의 경쟁력을 키우는 장기 대책밖에는 대안이 없는 것이다.

정부의 시장 개방 노력에도 불구하고 경제협력개발기구는 아직 불만족스런 점이 많은 듯하다. 정부는 98년 말에 은행과 증권업을 전면 개방하고 2000년까지 외국인 주식투자 한도를 철폐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경제협력개발기구 자유화 규약위원회는 국내 채권시장에 대한 개방 일정 제시와 상업 차관 허용을 추가로 요구하였다. 환경위원회는 국내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90년 수준으로 줄이라고 요구하였다. 이것은 선진국 수준으로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여야 한다는 말인데, 화석 연료에 크게 의존하는 국내 제조업 구조를 감안하면 수용하기가 쉽지 않다.

“유럽 자동차, 5년내 한국 도로 점거”

구본영 경제 수석이 ‘연내에 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에 집착하지 않겠다’라고 말했으나 이것을 믿는 사람은 별로 없는 듯하다. 오히려 많은 사람이 김영삼 정부가 임기 안에 가입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다. 이러다 보니 실무 부서에서는 대폭 양보하더라도 경제협력개발기구 산하 위원회의 심사를 우선 통과하고 보자는 움직임도 엿보인다. 사실 정부로서는 그들의 요구를 줄일 뾰족한 대책이 없다.

6월25일 한·EU 자동차산업 포럼과 관련된 기자회견에서 ‘유럽 자동차가 비싼 데다 애프터서비스가 형편없고 차종이 대형차 위주이기 때문에 한국 소비자의 시선을 끌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것을 한국 시장의 폐쇄성 탓으로 돌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한 기자의 질문에 블룸 유럽자동차협회 사무총장은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당신과 내기를 해도 좋다. 5년 내에 유럽산 자동차가 한국 도로를 점거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수입차 증가 추세와 무역 수지 악화를 보고, 블룸 사무총장의 주장이 틀리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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