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 수출비상이나 '호들갑'은 금물
  • 김방희 기자 ()
  • 승인 1996.07.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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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품 가격 폭락·수입 급증으로 국제 수지 ‘흔들’… 고부가가치 산업화 비용일 뿐, 경제 구조 고도화로 풀어야
낙관적인 전망 일색이던 올해 연초를 돌이켜 보면, 요즘 발표되는 경제 통계치들이 약간 놀라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너무 주눅들 필요는 없다. ‘총체적 경제 위기’라는 수사에 얽매이지 않고 통계치들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충격적인 것은 국제 수지 하나 정도다. 물가 역시 불안하기는 하나, 경기가 좋았다가 나빠지면서 반복되어 왔던 그동안의 저성장-고물가 유형을 고려하면, 우려할 수준은 아니다.

국제 수지의 경우는 얘기가 좀 다르다. 연말까지 60억달러 안팎의 경상 수지(수출입으로 인한 무역 수지에 무역외 수지·이전 수지를 합친 금액) 적자를 예상했으나, 상반기가 끝나기 전인 5월에 80억달러를 넘겨 버린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역시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애당초 수출을 너무 낙관적으로 보았다는 사실이 점차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반도체를 비롯해 석유화학·철강 제품과 같은 수출 주력 상품의 가격이 갑자기 폭락하는 사태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전체 수입의 70%가 수출 위한 원자재·자본재 탓


이 가운데서도 반도체 가격은 지난해 12월 이후 3분의 2 이상 떨어졌는데(16메가 D램 기준), 미국 개인용 컴퓨터(PC) 시장의 수요 부진이 주원인이었다. 반도체값 폭락에는, 3월까지만 해도 지난해 호황에 따른 반사 이득을 누리던 업계가 4월 이후 재고를 없애기 위해 덤핑 공세를 편 것도 한몫했다. 1/4분기 중 21%에 달했다가 4월 이후 6% 안팎으로 떨어진 수출 증가율도 반도체 수출 가격의 궤적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해 단일 제품으로 최대 수출 품목이었던 반도체가 전체 수출에서 차지한 비중은 18%. 지난해 사뭇 자랑스러웠을 이 수치는 벌써 우리 경제에 부담스러운 존재가 된 듯하다. 지난 6월27일 국제 수지 동향을 발표한 한국은행 김영대 조사담당 이사는 반도체 수출 가격이 연말까지의 무역 수지 적자 규모를 가름할 관건이라고 전망했다. “16메가 D램의 수출 가격이 연말까지 20달러 이상이면 적자는 백억달러 안팎, 18달러 이하면 1백20억달러에 이를 것이다.” 정도가 덜하기는 하지만, 석유화학이나 철강업도 상황은 비슷하다. 1년 전과 비교해 볼 때, 두 제품의 수출 가격 역시 적게는 13%에서 많게는 26%까지 떨어졌다.

예기치 않았던 일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통상산업부는 주력 수출 상품들의 값이 갑자기 떨어진 것 외에도, 중국이 수입에 대한 단속을 강화해 중국에 대한 수출이 크게 둔해진 것도 무역 수지 적자에 큰 요인이 된 것으로 본다. 그동안 중국으로 수출되는 우리의 주요 경공업 제품들은 홍콩의 중간상을 거쳐 무관세로 중국에 변칙 반입되어 왔는데, 중국이 이에 대해 단속을 강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으면서도 낙관적인 분위기 때문에 심각하게 고려하지 못한 요인도 있다. 엔화에 대한 원화의 상대적인 평가 절상(엔화에 대한 환율이 떨어진 것)이 그것이다. 일본 엔화에 대한 환율이 우리 수출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쳐 왔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 예컨대 4월까지의 무역 수지만 따져볼 경우, 무역 수지 적자 규모가 점차 커지는 것이 주로 수출입 단가 때문이라는 점이 이를 반증한다. 이 기간에 수출 물량 증가율이 수입 물량 증가율보다 높아 무역 수지 개선 요인으로 작용한 반면, 수출 단가 하락(-3%)과 수입 단가 상승(2%)이 적자로 이어졌던 것이다.
지난해 4월 이후 엔화는 달러화 대비 약 30% 가량 절하되었고, 이 때문에 같은 기간 원화는 엔화에 대해 20% 가량 절상되었다. 요약하면, 일본 상품 가격에 대한 우리 상품의 가격 경쟁력이 1년 만에 20% 이상 떨어졌다는 것이다. 같은 기간에 품질이 아무리 좋아졌다 하더라도 떨어진 가격 경쟁력을 벌충하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했다면, 지금과 같은 적자는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다. 한국경제연구원 이수희 연구위원은 “무역 수지 적자가 예상됐다는 점에서 지금 와서 갑자기 경제가 위기라는 주장에는 공감할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

정말 놀랄 사실은, 현재의 무역 수지 적자 가운데 상당 부분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구조적인 것이라는 데 있다. 우리 경제가 성장을 시작한 이래 본격적인 흑자를 기록한 예는 88~90년 3년 간에 불과하다(93년 한때 반짝 흑자를 기록했던 적은 있다). 이유는 두 가지다. 우선 부존 자원이 없어 외국에서 원자재 대부분을 들여와야 한다. 지난해 말을 기준으로 할 때 전체 수입액에서 원자재가 차지하는 몫은 40% 가량. 국제 원자재 값이 변하면 금방 그 영향이 나타나게 마련이다. 이번 무역 수지 적자 문제에 한몫한 곡물 수입이 좋은 예다. 국제 곡물가가 갑자기 뛰는 바람에 곡물 수입액이 올 들어 크게 증가했다.

또 한 가지는, 수출 상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본재를 사들여야 한다는 점이다. 전체 수입액 가운데 자본재가 차지하는 비중은 30% 가량으로, 자본재 수입액의 변화는 그리 큰 편이 아니다. 결국 수출 상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전체 수입액의 70% 이상을 들여와야만 하는 상황이어서, 완성 소비재 수입이 조금이라도 늘어나면, 적자는 바로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밖에 없다. 올해의 경우도, 시장 개방이 확대되면서 소비재 수입이 꾸준히 늘어 전체 수입 증가율(16%)보다 높은 25%를 기록했다.

 
해외 여행 경비나 개인 송금 때문에 생기는 무역외·이전 수지 적자도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두배 이상 확대되고 있다(여기에는 기업의 해외 생산과 영업 활동이 늘면서, 해외에서 지급하는 광고비를 비롯한 각종 용역에 대한 대가도 포함된다). 엔화 약세로 인한 일본인 관광객 입국 감소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다.

따라서 일부 경제학자와 관료 사이에서는 경상 수지 적자가 불가피하거나 바람직하다는 견해마저 있다. 간혹 경상 수지 적자 적정 규모를 둘러싼 논란이 벌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은국내총생산(GDP)에서 ±2% 내외의 적(흑)자를 달성하라고 권고한다. 적자 옹호론자들은 지난해 말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적자가 1.9%여서, 위험 수위는 아니라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이들은 경상 수지 적자가 과연 그렇게 나쁜 것이냐 하는 데도 의문을 제기한다. 한국산업은행 김청수 연구원은 논문에서 ‘경상 수지 적자를 보전하기 위해 도입한 외자가 국내총생산 증가율을 1% 이상 높이고, 실업률을 0.1% 이상 낮추는 긍정적 효과가 있다’고 분석했다(<경상 수지 적자의 구조 및 국민경제적 효과 분석 designtimesp=1940>).
OECD 가입하려 과소비 억제 캠페인 못해

그러나 요즘처럼 적자 규모가 급격히 확대되는 상황이 좋다고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산업연구원(KIET) 온기운 연구위원은 “국내총생산과 대비해 일정 비중 안에서 관리된다면 경상 수지 적자도 나쁠 것 없다는 논리는 경제 대국인 미국에서 개발된 것으로, 우리나라에 직접 적용하는 것은 무리다”라고 말했다.

현재의 무역 수지 적자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이냐에 대한 의견은, 적자 가운데 일시적인 변수와 구조적인 요인 가운데 어떤 쪽에 더 무게를 두고 평가하느냐에 달려 있다. 적자를 반도체를 비롯한 주력 수출 상품값이 하락한 탓만으로 돌리려는 사람들의 견해는 어느 정도 낙관적이다. 선진국의 수요가 되살아나면서 국제 가격이 회복되면 무역 수지 적자 폭이 좁혀지리라는 것이다.

더욱이 달러 대비 원화의 환율이 계속 높아지는(평가 절하) 추세여서, 엔低 효과를 어느 정도 상쇄해 주고 있기도 하다. 지난해 하반기 엔화 가치가 급격하게 떨어지면서, 정부에 원화의 평가 절하를 계속 요구해온 재계의 바람이 실제로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우리 정부가 채용한 시장평균환율제에서 원화가 달러화에 대해 평가 절하되는 것이 정부가 의도적으로 한 것이냐, 국제 수지 적자 때문이냐를 파악하려는 것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를 따지려는 것과 비슷하다).

최근 무역 수지 적자가 확대되는 데는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가입과 통상 압력 때문에 종전과 같은 소비재 수입 규제책, 예컨대 과소비 억제 캠페인 같은 것을 동원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도 관련이 있다. 김영삼 대통령은 최근 나웅배 재경원장관 겸 부총리와 박재윤 통산부장관에게 국제 수지 문제에 대해 안이하게 대처한다고 호통을 쳤지만, 실무자들은 딱히 묘안이 안 떠오른다고 불만이다. 주요 무역업체들이 토로하는 애로 사항을 들어주고, 무역외 수지를 줄이기 위해 해외에서 현금과 신용카드 사용액을 제한하는 정도가 대책의 전부다.

산업 구조상 2000년 지나야 흑자 가능

일시적으로 국제 수지 적자 폭이 줄어든다 해도, 구조적인 원인은 여전히 남는다. 경제 발전, 혹은 경제 구조 고도화라는 것은 단순히 말하면 한 나라 경제가 점차 상승하는 인건비에 맞는 산업과 기술을 갖추게 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인건비 상승은 급격하게 이루어지는 데 반해 산업이나 기술이 이에 적응하는 데는 한참 시간이 걸리게 마련이다. 원자재·자본재·기술을 주로 외국에서 들여와야 하는 우리의 무역 구조상, 이 과정에서 수입 의존도는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더욱 높아질 수도 있다는 것이 경제학자들의 시각이다.

그러다가 산업 구조 고도화 과정이 이루어지게 되면 무역 수지 적자가 흑자로 반전되는데, 80년 중반 이후 우리가 잠시 누렸던 흑자가 좋은 예다. 경공업 위주의 산업 구조가 중화학 공업 중심으로 완전히 고도화하는 데 성공한 대가였던 것이다. 현재의 상황을 첨단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가기 위한 과정이라고 볼 때, 국제 수지 적자 가운데 상당 부분은 어차피 우리가 치러야 할 비용이라는 지적이 설득력 있다. 문제는 정부건 민간 부문이건 경쟁력을 얼마나 빨리 높여 장기적으로 그 비용을 줄일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그렇게 되어야만 흑자 상황이 재연되는데, 그게 언제쯤이냐고? “우리 무역 구조상 적어도 2000년이 되기 전에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산업연구원 온연구위원의 말이다. 앞으로 깜짝깜짝 놀랄 일이 꽤 많을 것이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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