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고 호황에 도사린 함정
  • 南裕喆 기자 ()
  • 승인 1995.06.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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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들, 상품의 질 개선 않고 설비 증설만…엔고 약화되면 ‘위험’
세계 유수의 경제지 기자들이 최근 서울을 찾는 발길이 잦다. 삼성·현대·대우 등 국내 주력 재벌 그룹이 선진국 현지 투자를 본격화하면서 미국을 비롯한 유럽 언론들이 한국 경제에 대한 새로운 ‘관찰’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최근 서울을 방문한 미국의 격주간 경제 전문지 <포브스> 기자는 “삼성을 뒤따라 현대가 반도체 생산에 뛰어들고, 다시 삼성이 현대를 뒤따라 승용차 생산에 나서는 현상이 흥미롭다”고 말했다. <포브스> 기자가 서울에 체류하는 동안 마침 현대전자는 국내 기업의 해외 투자 사상 최대 규모인 13억달러를 투자해 미국에 세계 최대 규모의 메모리 반도체 공장을 짓겠다고 발표했다. 한국 자동차산업을 취재하려고 서울에 들른 한 독일 경제 신문의 도쿄 특파원도 “삼성이 왜 현대와 대우가 일찍 진출한 승용차 부문에 뒤늦게 뛰어드는지 궁금했다”고 한국 취재에 나선 이유를 밝혔다.

진입에 시차는 다소 있으나 국내 정상급 재벌들은 가전·자동차·반도체·조선 4대 제조업에 상호 집중적이고 경쟁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삼성은 현대의 주력 사업인 자동차와 조선에 뒤늦게 뛰어들었고, 현대는 삼성의 이런 추격 공세에 맞불이라도 놓듯 반도체 부문에 최근 집중적인 공격 투자를 하고 있다. 동남아시아 재벌들은 차별적인 업종에서 편안하게 상호 독점을 향유한다. 이 때문에 소수 재벌들이 몇몇 제조업에서만 치열하게 경쟁하는 현상은 한국 경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서양인들에게는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한국 재벌들은 같은 업종에서 서로 경쟁하려 하는가. 이런 의문에 서양 기자들이 쉽게 내놓는 대답은 한국에 대한 통상 압력을 가중시키는 이른바 ‘제2 일본론’의 불씨가 된다. 즉 ‘한국은 일본을 모방하고 있다’ 혹은 ‘한국은 제2의 일본이 되려 하고 있다’는 해석이다. ‘일본은 (부당한 정부 개입인) 국가 산업정책이 선도하여 가전이나 자동차 같은 전략 산업에 기업들이 집중적인 투자를 하게 유도했다. 그 결과 그들은 세계 시장을 석권했고 한국도 이같은 일본 신화를 모방하고 있다’는 것이 요즘 미국과 유럽에서 고개를 들고 있는 ‘한국 제2 일본론’의 요지이다.

유럽연합(EU)은 최근 한국 조선업체들의 설비 증설을 신랄히 비난하면서 일본이 20년 전 취했던 전략을 한국이 그대로 모방하는 것을 좌시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최근 서울을 방문했던 유럽연합 모겐스 피터 칼 대외경제국장은 “한국 조선업체들이 설비를 증설하면 세계 조선업계는 설비 과잉으로 파국을 맞게 된다. 물리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증설 계획을 제외하고는 당장 취소해야 한다”고 기자회견에서 주장했다.

‘엔고=한국 경제에 도움’은 잘못된 인식

한국 조선업체는 기술이나 생산성에서 모두 일본에 훨씬 뒤진다. 근로자 1인당 생산성은 현재 최고 50%까지 떨어진다는 분석이다. 선박의 핵심 설비는 대부분 일본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 재벌들이 일본이 ‘위험한 도박’이라고 부르는 대규모 설비 증설에 나서는 배경은 오로지 엔고라는 ‘환율의 마력’ 하나만을 굳게 믿기 때문이다. 일본의 엔화 가치가 올라가는 엔고 현상이 나타나면 수출 시장에서 일본의 수출품은 환율 변동에 의해 가격이 올라간다. 이 때 수출 시장에서 경쟁하는 한국이 직접적인 반사 이익을 가장 많이 보게 된다. 이 ‘엔고 호황’이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는 대표적인 업종이 조선업을 비롯한 가전·자동차·반도체인 것이다.
최근 서울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 일본 노무라연구소 다마오 도요미쓰(玉尾豊光) 아시아본부장은 올해 들어 나타나고 있는 초엔고 현상이 계속될 경우 일본 조선업계가 한국과 경쟁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진단했다. 그는 “95년 4월 현재의 환율인 1달러=85엔=770원을 전제로 했을 때 일본과 한국의 원가 격차는 불과 수개월 사이에 18%로까지 확대된다. 이런 원가 차이는 비가격 경쟁력으로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밝혔다. 다마오 본부장은 ‘제4차 엔고’라고 불리는 지금의 엔고 현상이 최근 다소 완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으나 대세는 여전히 엔화 강세 쪽이라고 진단했다(왼쪽 도표 참조).

어쨌든 초엔고 현상은 지난 수년간 선진국 시장에서 계속 고전해 온 국내 대기업들에게 더없이 반가운 원군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무역협회는 엔화가 10% 절상될 경우 20억달러에 달하는 무역수지 개선 효과가 있다고 분석했다. 재벌 그룹들의 모임인 전국경제인연합회도 최근 “전자·조선·자동차·철강 등 중화학공업에서 일본 제품보다 유리한 조건을 확보하게 됨으로써 수출이 상당히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고 진단했다. 정부·업계·학계 모두 ‘엔고는 우리의 수출을 늘리기 때문에 한국 경제에 좋은 것이다’라는 생각이 신념으로 굳어져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정부와 업계 모두 굳게 믿고 있는 엔고의 긍정적인 효과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이제는 엔고의 부정적인 측면이 더 크게 나타나고 있다. 수출 호조와 경기 호황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무역 적자는 계속 늘어나는 추세다. 특히 올해 들어 한국의 대일 무역 적자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다. 올해 1/4분기 무역 적자 총액은 43.1억달러인데 이 중 대일 무역 적자가 무려 35.7억달러를 기록했다. 기계·전자 부품·철강·화학제품 등 핵심 소재를 전적으로 일본에 의존하는 실정에서 엔고로 수입 단가가 올라가기 때문에 대일 역조가 심해지고 있는 것이다. 특히 경기 호황으로 대기업 설비 투자가 늘어나면서 일본으로부터의 수입은 더욱 늘어나고 있다.

수출 채산성은 오히려 떨어져

엔고로 수출은 빠르게 늘고 있지만 무역수지 동향을 지역 별로 구분해 보면 한국의 무역 흑자는 대부분 동남아·중남미·중국과 같은 후진국 시장에만 집중되어 있다(위 도표 참조). 선진국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상품의 질적 개선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높은 수출 증가율에도 불구하고 수익은 상대적으로 답보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 수출 채산성은 작년에 오히려 0.2% 포인트 떨어졌다. 초엔고는 원화 절상이라는 반사 효과를 가져온다. 이 원화 절상 때문에 수출로 창출된 이익의 총수출에 대한 비율로 정의할 수 있는 수출 채산성은 오히려 떨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수출 채산성 악화는 엔고 효과가 약화할 경우 한국의 수출이 급격히 둔화할 수 있음을 예견하는 것이다.

최근 더욱 심해지고 있는 경기 양극화도 초엔고의 직접적인 영향에 의해 나타나고 있다. 대기업들은 호황을 구가하는데 중소기업들은 쓰러지고, 중화학공업은 수출이 급증하는데 경공업은 더욱 침체되고 있다. 이는 그동안 수 차례 엔고를 겪으면서 일본이 생산 기지를 동남아로 이전하여 저임금으로 생산한 경공업 제품에 한국 수출품이 밀리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초엔고는 이런 ‘양날의 칼’이 더욱 한국에 날카롭게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이번 초엔고는 일본이 그동안 경쟁력을 유지해 오던 고부가가치 산업의 경쟁력에도 타격을 주고 있기 때문에 고부가가치 산업에서도 동남아로 생산기지를 이전하는 일이 급속하게 나타나고 있다. 한국이 현재 엔고로 덕을 보고 있는 중화학 부문에서도 일본의 해외 생산제품에게 추격당할 날이 가까워진 것이다.

초엔고의 부정적 효과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돌리기 위해 현재 정부와 업계가 생각하는 방안은, 동남아로 흘러가는 일본의 고부가가치 산업 투자를 한국으로 유치하는 것이다. 그러나 초엔고 현상도 88년부터 계속 줄어들고 있는 일본의 한국 투자 흐름을 바꾸어 놓지는 못하고 있다. 최근 일본의 한 신문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생산기지를 한국으로 이전하려는 일본 기업은 이전을 고려하고 있는 조사 기업 가운데 5%에 불과했다. 일본 기업이 한국을 기피하는 까닭은 임금과 입지 비용, 까다로운 금융 규제 따위 때문이다.

현재 한국의 경기는 호황의 정점에 접근해 있다. 지난 5월23일 한국은행이 발표한 1/4분기 경제성장률(GDP 기준)은 9.9%로 91년 2/4분기의 10.6%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지금 추세대로라면 최소한 연말까지는 경기 확장세가 이어지리라는 것이 국내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그러나 호황기에 경기 양극화 현상은 더욱 심해지고, 대일 무역 적자는 나날이 늘어나고 있으며, 선진국 시장에서 한국 상품의 시장 점유율은 최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초엔고의 그늘에서 재벌들은 매출을 늘리기 위한 설비 확장에만 치중하고 있다. 현재 한국 경제의 도약을 위해 무엇보다 절실한 생산성과 상품의 질적 향상은 뒷전으로 밀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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