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쇄 부도 주범은 종금사인가
  • 金芳熙·朴在權 기자 ()
  • 승인 1997.08.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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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실 기업’에 대한 대출금 회수 주도해 ‘오명’
한종합금융사 영업 담당 이사인 ㅇ씨는 단기 금융시장의 산 증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25년 전 우리나라에 종금사가 처음 생겨나면서 입사해, 여러 번의 금융 위기를 용케 버텼다. 그런 그조차도 올해 들어 본격화한 기업의 연쇄 부도에는 진저리를 친다. “매일 출근해서 하는 일이 거래 기업이 밤새 괜찮은지 확인하는 것이다. 해당 기업의 자금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기도 하고, 경쟁 기관의 동향을 체크하기도 한다.”

우리 금융 시장 역사상 가장 큰 충격파로 기록된 82년 장영자 사건 때와 비교해 보면 어떨까. “당시에도 많은 기업이 쓰러졌지만, 주로 건설업종에 몰려 있어서 예측하기가 쉬웠다. 그러나 지금은 업종을 불문하고 어제까지도 괜찮았던 기업이 자금 악화설이 퍼지기만 하면 당장 끝장나는 상황 아닌가?” 그는 하루하루 피를 말리는 심정으로 산다고 한다.

기업이 쓰러지면 해당 기업에 돈을 빌려준 금융기관 모두가 홍역을 치러야 하지만, 종금사의 경우는 상황이 더 심각하다. 2∼3년 전부터 종금사의 어음 할인 규모가 크게 늘어 대출 규모에서 은행 다음을 기록하고 있는데도(올해 6월 말까지 94조원), 은행과는 달리 담보 없이 신용 대출을 해준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금사는 늘 자금난을 겪는 기업에 대한 자금 회수를 주도할 수밖에 없다. 이들이 최근 기업 연쇄 부도의 주범으로 몰리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어떤 기업의 자금 사정이 나쁘다는 소문이 들리기만 하면 종금사들이 즉각 해당 기업의 어음을 교부하는 바람에 자금난을 급격히 악화시켜 부도를 부채질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단기 자금을 신용 대출해야 하는 종금사 실무자들로서는 억울하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다음은 ㅅ종금 ㄱ부장의 말. “올해 4월부터는 자금악화설을 신경쓰지 않을 수 없었다. 루머가 돌았는데도 손 놓고 있다가 그 기업이 부도라도 나는 날이면, 실무자들은 문책을 피할 수 없다.”

종금사가 기업 연쇄 부도 사태에서 논란거리로 등장한 배경을 이해하려면, 종금사의 업무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백억원이 필요한 기업이 있다고 치자. 이 기업은 종금사로부터 백억원을 빌리면서 대략 1백10억원짜리 기업 어음(CP)을 발행한다. 그러면 종금사는 이 어음을 은행(신탁 계정)과 연금·기금, 투자신탁 회사나 개인 투자자들에게 판매하고, 남은 것은 자신들이 보유한다(6월 말까지 94조원어치 가운데 65조원어치를 투자가들에게 판매). 이처럼 기업과 투자가 사이에 단기 자금을 중개하는 것이 종금사의 주요 업무다. 보통은 돈을 빌려간 기업이 발행한 90일짜리 어음의 만기를 연장해 주지만, 문제가 있다고 판단될 경우는 연장해 주지 않거나 연장 기일을 단축해 버린다.

“종금사 1개 망하면 재벌 2~3개 부도날 것”

따라서 자금난을 겪는 기업에 대한 자금 회수가 종금사의 책임이냐, 아니면 이를 매입한 기관 투자가(이 가운데서도 은행의 신탁 계정이 최대 투자가이다)이냐 하는 문제가 생긴다. 종금사들은 자금 조기 회수 책임을 은행에 돌린다. 실제 거래에서 은행 같은 기관 투자가가 어음을 매입한 경우에는 해당 기업이 잘못되어도 종금사가 책임을 지지 않는다. 다만 최근에는 종금사가 어음을 판매하면서 기관 투자가에게 지급 보증을 해준 경우가 있어 법적 논란이 예상된다.

30개에 이르는 종금사는 증권·보험 회사와 같은 제2 금융기관과 달리 출발부터가 어음 매매를 통한 신용 대출을 근간으로 했다. 물론 이자는 높은 편이었다. 72년 종금사 6개가 처음 생길 때 모두 외국과 합작 형태였는데, 이는 외국 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한 방편이었다. 당시 종금사에는 국제적인 무기 거래상인 카쇼기의 자금을 비롯해 정체 불명의 외국 자금이 대거 유입되었다. 장영자 사건 이후에는 국내의 지하 자금을 끌어들이기 위해 단자(투자금융)사들이 생겨났는데, 이들이 나중에 종금사로 전환되었다.

이 때문에 종금사의 업무가 조기 정상화하느냐 여부는, 신용 거래가 정착하느냐 아니면 신용 공황이 도래할 것이냐를 가름하는 기준이 되리라는 지적도 있다. 종금협회 경제연구소 오용석 연구위원은 종금사가 신용 대출의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다고 주장한다. 현재 상당수 종금사가 자본이 잠식된 상태여서 경영 위기를 맞고 있다. 종금업계에서는 기업의 연쇄 부도로 시작된 최근의 금융 위기 때문에 종금사가 하나라도 무너질 경우, 재벌 그룹 2∼3개가 연쇄적으로 무너지는 악순환이 거듭될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 때문에 현재 정부도 종금업계에 대한 지원책을 강구하고 있다.

어떤 기업의 신용 상태를 평가하는 심사 기능에도 종금사는 담보 대출을 기본으로 하는 제1 금융권(은행)과는 크게 다르다. 은행들이 해당 기업의 재무 비율을 중심으로 신용을 평가하는 데 반해, 종금사는 기업의 현금 흐름과 경영진의 능력을 중시한다. 모든 것이 점수로 환산되는 은행과 달리 실무자의 주관적인 의견도 폭 넓게 반영한다. 종금사들은 다른 어떤 금융기관보다도 기업이 내놓은 회계 자료를 믿지 않는 편이어서, 각사가 나름으로 개발한 신용 평가 기법을 활용한다.

이들에게는 해당 기업의 정치적인 배경도 매우 중요한 신용 평가 요소가 된다. 실제로 종금(투금) 업계는 80년대 초반 신군부가 집권한 뒤 부산을 연고로 한 국제그룹의 위기를 미리 내다보고 자금을 회수한 적이 있는데, 이는 나중에 현실로 드러났다. 이들이 증시 주변을 떠도는 풍문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는 것은 이 때문이기도 하다.

얼마 전에도 비슷한 예가 있었다. ㄴ종금사는 4년 전 진로그룹의 자금난이 본격화하기 이전부터 자금 회수를 시작해, 실제로 진로그룹이 부도유예협약 적용 대상이 되었을 때는 한푼도 물리지 않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빨리 진로그룹의 위기를 예측할 수 있었을까. “4년 전 진로그룹의 지분 현황을 조사하다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유력한 정치인이 갑자기 대주주로 등재돼 있었다. 그 사실을 확인한 순간 진로가 정상 궤도를 벗어났다는 확실한 감을 잡았다.” 당시 진로그룹을 심사하다 지금은 부서를 옮긴 이 종금사 실무자의 말이다.

종금사 실무자 “우린 현대·삼성·대우 직원”

그러다 보니 종금사로서는 더 안전하고 확실한 대출처를 선호하게 마련이다. 종금업계 실무자들 사이에서는 자신들이 빅3(현대·삼성·LG 그룹)의 직원이라는 자조 섞인 얘기도 나온다. 다른 그룹들과 달리 이 그룹들에게는 돈을 갖다 쓰라고 간청하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신용 경색 현상이 심해지면서, 빅3를 제외한 다른 그룹에 대한 종금사의 신규 대출은 거의 중단된 상태다. 운용할 데가 없어 남아도는 돈을 원금을 떼일 염려가 없다는 이유로 거꾸로 은행에 맡기기도 한다.

특정 기업의 자금난에 대한 언론 보도는 자금을 회수하라는 확실한 신호가 된다. 이 때문에 기업 연쇄 부도의 주범으로 지목되는 종금사는 그것이 언론 보도와 증시 유언비어라고 돌리기도 한다. ㅎ증권사 ㄱ부장은 “기업 파탄의 주범은 증권사 정보원과 경제부 기자들이다”라고 단언하기도 한다(오른쪽 상자 기사 참조). 그러나 만일 기업의 자금 악화설을 전파하는 증권사의 조사 담당자들과 경제부 기자들에게 책임을 묻는다면, 아마도 그들은 다시 경영 위기를 자초한 기업들에게 책임을 돌릴 것이다.

흔히 금융은 물의 흐름에 비유된다. 흐름이 막혔다고 해서, 흐르는 물의 어느 한 지점만을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한 곳의 물만 보아도 흐름이 괜찮은지 나쁜지 쉽게 알 수 있다. 종금사를 잘 들여다보면 신용 대출을 지향하는 우리 금융산업의 미래가 그렇게 밝지 않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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