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도 기업 인수하는 노동자들
  • 金恩男 기자·羅權一 광주 주재기자 ()
  • 승인 1998.07.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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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가 인수하는 기업 늘어··· 자금 확보 · 경영 혁신 성공하면 '화려한 재기' 가능
한빛패션(서울 도봉구 방학동) 간부 윤홍렬씨는 아직도 노조위원장이라는 직함에 더 익숙하다. 거평패션 노조위원장을 2대째 지내 온 그가 회사 경영자로 변신하게 될 줄은, 그 자신이나 조합원들이나 상상하지 못했었다.

윤씨가 조합원 30여 명을 이끌고 거평패션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 법인을 설립한 것은 지난 3월. 누드 모델 이승희가 광고에 출연해 화제가 되었던 상표 ‘라보라’를 생산하던 거평패션은 지난해 경영 압박에 시달리던 끝에 생산 라인 일부를 폐쇄했다. 이때부터 윤씨의 고민이 시작되었다. 20년 가까이 자신과 고락을 같이한 동료들이 정리 해고당하는 것도 견디기 힘들 뿐더러, 이미 회사의 경영 능력에 대해 뿌리 깊은 불신을 갖고 있던 터였다.

윤씨와 동료들이 몸 담고 있던 태평양패션으로부터 97년 5월 경영권을 넘겨받은 거평패션은 인수 직후부터 급격한 매출 감소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언젠가 이 회사는 무너지고 만다’고 판단한 윤씨는 노조 간부들과 상의해 폐쇄된 생산 라인 중 3개 라인의 기계 설비를 사들여 지난 3월 한빛패션을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노동자들이 자기 회사를 인수하는 사례가 최근 들어 부쩍 늘고 있다. 부도 기업이 증가하면서 나타난 새로운 사회 현상이다. 최근에는 이들의 기업 인수를 돕는 컨설팅 회사까지 생겨났다. 그 선발 격인 ‘노동자 기업 인수 지원 센터’의 경우 6월 말 현재 센터를 통해 이미 인수 작업을 끝낸 회사가 4개, 인수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는 회사가 5개라고 밝혔다(54쪽 인터뷰 기사 참조).

따지고 보면 노동자가 기업을 인수하는 것이 완전히 낯선 개념만은 아니다. 노동자가 직접 설립한 노동자협동조합(개량 한복 하청 생산에 종사하던 7개 봉제업체가 공동으로 설립한 ‘우리옷 살리기 운동본부’가 좋은 예이다), 또는 노동자가 주식의 상당 부분을 소유하고 회사 경영에 참가하는 우리사주조합이 한국 사회에서도 80년대 후반부터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최근 들어 노동자 기업 인수가 새삼 주목되는 것은, 이것이 고실업·고부도율 시대에 강력한 실업 억제 내지는 실업 회피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최근에 이루어지는 노동자의 기업 인수는 크게 두 가지 양태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한빛패션처럼 부도가 나기 전에 회사를 인수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미 부도가 난 회사를 인수하는 경우이다. 기아그룹 계열사인 (주)기아정기에 부품을 공급하던 대신공업(경남 사천) 노동자들은 ‘기아 사태’ 이후 자금 압박에 시달리다가 지난 4월 최종 부도 처리된 회사를 인수했다.
광주의 중앙택시·누리문고, 대표적 성공 사례

이들이 공통으로 겪는 어려움은 먼저 인수 자금을 확보하는 문제이다. 몇 개월 동안 임금을 받지 못해 임금 채권(미지급 임금)을 자본금으로 전환할 수 있는 부도 기업은 오히려 사정이 나은 편이다. 아직 부도가 나지 않은 기업을 인수하려는 노동자는 퇴직금을 몽땅 털고도 모자라 개인 대출까지 받아야 하는 형편이다.

이보다 심각한 것은 초기 운영 자금을 확보하는 문제이다. 대신공업을 인수한 이 회사 노동조합은 부도가 난 뒤 회수한 물품 대금과 새로 납품한 물품 대금으로 체불 임금을 지급했다. 그러나 운영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회사에 남은 직원 40여 명은 받은 임금을 다시 출자해야 했다.

이 정도로 운영 자금을 확보할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거래 업체의 부도 같은 돌발 상황은 이들을 다시 시련으로 몰아넣는다. 3개월 정도 운영 자금만 확보한 채 법인을 설립했던 한빛패션은 지난 5월 거평패션이 최종 부도 처리되면서 이 회사로부터 6월께 받았어야 할 대금 8천만원을 아직도 받지 못하고 있다. 한빛패션은 독립한 후에도 주문자상표부착방식(OEM)으로 거평패션에 속옷을 납품하고 있었다. “3개월만 버티면 숨통이 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가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다. 회사를 설립하던 4개월 전보다 지금이 훨씬 더 고통스럽다.” 윤홍렬씨의 말이다.

미숙한 경영 능력 또한 걸림돌이 된다. 곽노현 교수(한국방송대·법학)는, 분화한 노동을 수행해 오던 노동자들이 종합적인 사고와 경험을 필요로 하는 경영을 수행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당장에는 현상 유지로 버틸 수 있겠지만 머지 않아 경영의 전문성과 효율성을 높이는 일이 큰 과제가 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노동자 기업 인수 지원 센터’ 김성오 대표는 전문 경영인 채용을 유력한 대안으로 제시하지만, 현실적으로 중소 규모 회사가 능력 있는 전문 경영인을 채용하기란 쉽지가 않다.

그런 의미에서 경영에 성공한 노동자 인수 기업은 벤치 마킹 대상이 될 만하다. 전남 광주의 중앙택시는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꼽힌다. 91년 경영이 악화한 중앙택시를 1인당 6백50만원씩 출자해 인수한 노조원 70여 명은 8년 만에 자기 회사를 광주 지역 최고의 택시 회사로 성장시켰다. 이들은 부족한 운영 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매달 1인당 5만원씩 회사 기금으로 적립하고, 사고율 감소·차량 부품 절약·친절 운동을 자발적으로 벌여 왔다.

노조위원장 출신으로 회사 대표를 맡게 된 강성렬씨는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혁신적인 경영 마인드를 도입했다(<시사저널> 제456호 사람과사람 기사 참조). 곧 콜 택시 제도를 도입하고 지역 방송에 라디오 광고를 내보내는가 하면, 장애인·노약자·수험생·은행 현금 수송자를 상대로 차별화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등 ‘택시의 브랜드화’를 꾀한 것이다. 현재 직원이 1백20명으로 불어난 중앙택시는 광주 지역에서 ‘한국의 MK택시’라는 애칭으로 통하고 있다.
같은 지역의 누리문고 또한 성공 사례로 꼽힌다. 누리문고의 예전 명칭은 일신문고. 94년 광주 금남로에 본점을 개장한 이래 4년 만에 지점을 3개로 늘리는 등 빠르게 성장해 온 일신문고는 지난 2월 모기업(일신건설)이 도산하면서 함께 부도 처리되고 말았다. 직원들이 망연자실했던 것도 잠시. 이대로 무너질 수 없다는 공감대를 형성한 직원들은 서점 이사를 맡고 있던 박시종씨를 대표로 추대해 박씨의 개인 회사 형식으로 서점을 인수하고, 서점 이름도 누리문고로 바꾸었다.

그 뒤 5개월. 누리문고 직원들은 하루도 쉬어 본 날이 없다. 이들은 무엇보다 부도가 나면서 추락한 거래처와의 신용을 회복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그 결과 거래처 부도액 15억원을 7월 말까지 전액 현금으로 지급하는 데 성공했다. 8월부터는 20억원 증자를 목표로 광주 시민을 상대로 ‘시민주 공모’에 들어갈 예정이다.

경영의 발판을 굳힌 이들 업체들은 노동자가 회사를 경영할 때 예전에 없던 강점들이 나타난다고 입을 모은다. 중앙택시 김태슬 영업부장은 “사장이나 종업원이나 주식을 똑같이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주인이라는 의식과 애사심이 강해진다. 우리가 만들어 가는 공동체에 대한 애정, 인간에 대한 신뢰가 중앙택시를 지탱하는 버팀목이다”라고 말했다.

경영의 투명성 또한 애사심을 돋우는 요인이다. 중앙택시는 예전의 노조 집행부가 경영 책임을 맡는 대신, 총회에서 선출한 위원들로 운영위원회를 만들어 이들이 노조 집행부를 감독·견제하게끔 만들었다. 노동자들이 경영하는 기업에서 밀실 경영과 비자금 경영은 아예 없거나 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으며, 이는 대기업들의 경영 관행에도 자극을 줄 수 있으리라는 것이 곽노현 교수의 지적이다.

고용 안정성을 높여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것도 노동자 인수 기업의 강점이다. 96년 노동조합이 중심이 되어 부도 난 회사를 인수한 백상타올(충북 청주)은 올해 초 인원 감축을 심각하게 논의했다. 지난 2년간 일본 오사카에 수출 판로를 개척하고 미국 워싱턴에 지사를 설립하는 등 뚜렷한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IMF 한파가 닥친 이래 매출이 급격히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상타올 박천서 대표(전 노조위원장)가 내린 결론은 ‘한 사람도 버리고 갈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박대표는 감축하려던 인원(25명)을 격주 근무로 전환했고, 노동자들은 △먼저 출근하기 △30분 더 일하기 △1·2·3 운동(1등 품질, 2배 생산, 30% 원가 절감)으로 화답하고 있다.

노동자의 경영 참가가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구미 국가들의 경우 이를 둘러싼 찬반 양론이 뜨겁다. 노동자가 경영하는 기업을 부정적으로 보는 쪽에서는, 경영과 재정 문제 때문에 이들 기업이 경쟁적인 자본주의 환경에서는 살아남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반대로 노동자 기업 경영을 지지하는 쪽에서는 △조직에 대한 헌신성 덕분에 생산성이 증가하고 △고용 안정성이 높아져 인적 자본과 숙련도가 증가하며 △(해고를 하지 않는 대신 내부 조직 유연화로 경쟁력을 높여야 하기 때문에) 기업 환경 변화에 더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고 △노사간 민주적인 의사 소통으로 정보 비용이 감소하며 노사간 충돌을 해결하는 데 드는 비용도 줄어든다는 연구 결과들을 내놓고 있다.
정부 차원의 법적· 제도적 지원 장치 마련해야

분명한 것은, 노동자의 경영 참가를 이미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받아들이는 구미와 그렇지 않은 한국은 그 출발점부터가 다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지난해 부도가 난 병원을 노동자들이 인수하기 위해 법인 설립 절차를 밟고 있는 인천 세광병원 송석환 노조위원장은, ‘직원들이 경영하는 회사’라는 개념이 생소해 투자가들이 색안경을 끼고 노조를 보는 바람에 운영 자금 확보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더 큰 한계는 노동자들의 기업 인수 움직임이 경기 침체라는 상황에 밀려 ‘어쩔 수 없이’ 나타난 현상이라는 사실이다. 부도 난 회사를 인수한 노동자들이 한결같이 정부 지원을 요구하는 데 대해 윤진호 교수(인하대·경제학)는 국민 경제 차원에서 본다면 ‘왜 하필 부도 회사를 지원해야 하느냐’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노동부나 중소기업진흥청도 현재 이같은 이유를 들어 노동자가 인수한 기업을 특별 지원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민주노총 또한 노동자 인수 기업에 대한 정부 지원 문제를 노사정위원회에 공식 안건으로 제기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놓고 내부 논란을 거듭하고 있다. 체계가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섣부르게 기업 인수를 장려하다가는 자칫 노동자들이 마지막 남은 생계 비용마저 날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곽노현 교수는 이를 막기 위해 정부가 법적·제도적으로 노동자들의 기업 인수를 지원하는 장치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이를테면 부도 회사를 정리하는 ‘회사 정리법’에 경과 규정을 두어 노동자들이 기업을 인수할 것인지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회사를 인수할 경우 양도세·법인세·근로소득세 따위를 줄여 주는 조세 감면 혜택을 부과해 이를 촉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실업 기금을 활용해 인수 자금과 운영 자금을 지원하는 것도 한 방안이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은 실업률이 10%를 달리기 시작한 70년대부터 이들 기업에 대한 세제 혜택, 금융·기술 지원을 제도화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노동자 기업 인수는 적은 비용으로 실업 문제를 완화할 수 있는 유용한 해결책이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도 이를 위한 정책 수립이 시급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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