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들 문어발 왜 거둬들이나
  • 金芳熙 기자 ()
  • 승인 1997.07.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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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들, 계열사 합병하며 축소 지향 경영…“전략적 변화” “임시 방편” 평가 엇갈려
지금 기업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 가운데 생소하지 않은 것이 어디 있을까마는, 대기업 집단에서 벌어지는 계열사 합병 열풍만큼 낯선 것도 없다. 우리 기업들이 기를 써서 계열사 수를 늘리려던 과거에는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일이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예들만 꼽아보자. 두산그룹은 몇해 전부터 유사 업종 계열사를 통폐합하는 작업을 해왔다. 한때 40여 개에 이르던 계열사 수(현재는 29개)를 19개로 줄일 계획이다.

부도방지협약의 대상이 된 진로그룹은 자구책으로 18개 계열사 가운데 12개를 통폐합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때문에 당초 정보통신 분야에 뛰어들겠다던 이 그룹의 사업 다각화 계획은 백지가 된 상태다.

아직 공식화한 것은 아니지만, 경영난을 겪고 있는 뉴코아 역시 상황이 비슷하다. 이 그룹은 18개에 이르는 계열사를 4∼5개로 대폭 축소하기로 내부적으로 결정했다. 최종적으로는 유통·건설·광고·금융 등 핵심 사업 분야당 계열사를 1개씩만 둘 셈이다.

인력에 여유 생기고 관리비도 절감

올해 들어 5월 말까지 상장 기업 가운데 같은 그룹내 계열사와 합병하겠다고 증권감독원에 신고한 경우는 OB맥주(두산농산 흡수)와 세원(미원유화와 합병)을 비롯해 7건에 이른다. 이는 지난 한 해 상장된 계열사간 합병 건수 8건에 육박하는 수치다.

어떻게 된 일일까. 우선 드는 의문은 단순히 계열사 수를 줄이는 것이 경영에 어떻게 보탬이 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최초로 계열사 통폐합 작업에 착수했던 두산그룹의 경우는 90년대 들어 맥주 시장의 경쟁 격화와 페놀 사태로 수익성이 급격히 떨어지는 상황을 맞았다.

‘물장사’에 대한 집착이 유난히 강했던 보수적인 이 회사는 묘안을 찾기 위해 국내에 들어와 있는 외국의 컨설팅(경영 상담) 업체에 사업구조 조정 문제를 의뢰했다. 이 컨설팅 업체는 40여 개에 이르던 계열사 수를 16개로 대폭 줄이라고 권했다. 당시 이 작업에 참여했던 한 컨설턴트는 “음식료업 외에는 별다른 경험이 없는 이 그룹이 그렇게 많은 계열사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 납득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일단 계열사를 줄이기만 해도 관리비의 상당 부분을 줄일 수 있다는 계산이 선 것이다.

비슷한 업종을 묶는 방식으로 계열사 수를 줄이면, 일단 인력에 여유가 생기고 관리비도 줄일 수 있다. 두산그룹은 99년까지 계열사 축소 작업이 이루어질 경우 약 8천억원을 절감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본다. 규모가 커지는 만큼 금융기관을 안심시킬 수 있다는 측면도 있다. 이 때문에 최근에는 주거래 은행이 자금난을 겪는 기업들에게 자구책 차원에서 아예 보유 부동산 매각과 계열사 통폐합을 공식으로 요구하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다.

물론 그동안에도 같은 그룹 계열사 간의 합병은 있었다. 목적은 제각각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최대 주주(오너)가 주식 시장에서 시세 차익을 얻기 위해 하는 자의적인 합병이었다. 합병 대상 계열사 가운데 어느 한쪽의 경영 상황이 좋지 않은 경우라면, 합병으로 말미암아 그 회사의 주가가 크게 뛰게 마련이었다.

90년대 들어서는 건설사를 포함한 계열사들을 그룹내 종합상사에 합병하는 것이 크게 유행했다. 이는 해외 시장에서 경쟁을 벌이기 위해서는 세계 각국에 수많은 지사를 가지고 있는 종합상사의 정보력에 의존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기업의 덩지가 커지면 해외에서의 자금 조달이나 사업 운영이 유리해지는 면도 고려되었다.
LG그룹 “90여 사업 분야에서 손 떼겠다”

그러나 최근의 합병은 부실 기업들이 불황에서 살아 남기 위한 목적이라는 점이 다르다. 비록 계열사간 통폐합까지는 이르지 않더라도 대기업들이 한계 사업에서 철수하는 일도 크게 늘고 있다. LG그룹은 지난 3월 창립 50주년을 기념한 기자회견 자리에서 구본무 회장이 직접 90여 개 사업 분야에서 손을 떼겠다고 천명해 참석자들을 놀라게 했다. 이 그룹은 현재 이탈리아에서의 냉장고 생산을 포함해 앞으로 3년 간에 걸쳐 성장 가능성이 낮은 분야의 사업 40여 개를 일단 통합할 예정이다. LG의 경우처럼 통폐합할 사업 분야 수를 정해 놓은 것은 아니지만, 삼성그룹도 앞으로 한계 사업 분야에서 과감하게 철수할 예정이다. 이 그룹은 1차로 백억원 규모인 제일모직내 카펫 사업 분야를 포기하기로 잠정 결정했다.

“우리 기업들은 기러기가 날아가는 안행형(雁行型) 사업 전개와 수직 계열화에 치중한 나머지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서 과도하게 사업을 벌여놓았다.” 최근 우리 기업들이 ‘불황기에 살아 남기 위한 조건’을 연구한 삼성경제연구소 이용화 수석 연구원의 지적이다. 그는 우리 기업들이 점차 망라(網羅)주의에서 선택적 집중 전략으로 옮아가고 있다고 진단한다(<경영 변화와 경영 패러다임의 변화>). 자신의 능력을 고려하지 않고 다른 그룹들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식의 문어발식 사업 확장 대신, 확실하게 자신이 있는 사업 분야에만 집중하는 전략을 채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계열사의 통폐합이나 한계 사업 철수까지에는 이르지 않더라도, 능력 이상으로 일을 벌이기를 자제하려는 경향만은 뚜렷하다. 지난해 반도체 파동을 비켜간 데다 세계 경영이 정착하면서 한창 주가가 오른 대우그룹도 예외는 아니다. 최근 재계에서 회자되고 있는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의 발언이 이를 잘 보여준다. 그는 6월 초 회장단 회의에서 두 가지 지침을 내렸다. 사업 부지 목적 이외의 부동산 매입을 자제할 것과 불요불급한 자금 외에는 제2 금융권에서의 자금 차입을 최대한 자제하라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최대한 보수적으로 경영 관리에 임하라는 얘기였다.

“경기 호전되면 다시 몸불리기 나설 것”

그러나 이런 추세가 단명으로 끝날 것이라는 예견도 있다. 경기가 다시 호황세로 돌아서면, 우리 기업들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다시 진출 업종과 계열사를 늘리는 데 골몰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산업연구원 서용구 연구위원은 “한 번의 불황이 우리 기업들의 행태를 완전히 바꿔놓을 수 있다고 본다면 순진한 발상이다”라고 주장한다.

현재 선택적 집중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기업들은 크게 보아 두 부류. 한 부류는 심각한 경영 위기를 맞아 금융기관을 비롯한 외부에 자구 노력을 보여주어야 하는 기업들이다. 경영 위기를 맞지 않은 상황인데도 자발적으로 일부 업종을 버리고 있는 몇몇 대기업의 경우도 외부의 눈을 의식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우리 기업들은 미국의 경우처럼 이 전략을 절박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선택적 집중’은 90년대 초 경쟁력 위기를 맞았던 미국 기업들의 대표적인 사업구조 조정 전략이다. 이 전략의 관건은 해당 기업의 핵심 사업을 무엇으로 정하느냐 하는 것이다. 일단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사업 분야를 정하면, 이와 관련 없는 사업은 과감하게 포기해야 한다. 예를 들어 미국의 제너럴 밀즈사는 자신들의 핵심 역량을 식료품 분야로 재규정하고 이를 제외한 모든 사업(전체 매출액의 35%)을 매각했다.

또 아무리 유망한 사업이라 하더라도 해당 기업의 핵심 사업과 무관하면 결코 새로 진출하지 말아야 한다. 미국의 제너럴일렉트릭(GE)사는 논란 끝에 자신들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 유망 산업인 정보산업에 진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 또한 우리 기업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점이다. 따라서 최근의 통폐합 열풍은 한계 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임시 대증 요법으로 그칠 공산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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