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협상, 자동차보다 더 당했다
  • 金芳熙 기자 ()
  • 승인 1995.11.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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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ECD 조선 협정 96년 발효… 덤핑 과징금 부과 등으로 가격 경쟁력 치명타
두가지 매머드급 협정의 실무를 준비해온 통상산업부 자동차조선과는 최근 희비가 엇갈렸다. 한·미 자동차 협상과 관련해 여론의 질타를 받았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다자간 조선 협상에 대해서는 화살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무자들은 89년부터 50여회 이상 회의를 거듭해온 조선 협상이 조선업계의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이라고 불리리만큼 업계에 미치는 파장이 커, 애초부터 언론의 공격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았다.

더욱이 자동차 협상은 자동차 시장을 점진적으로 개방한다고 약속한 것에 불과한 반면 조선 협상은 내년부터 정부 보조금을 전면 폐지하고 덤핑 수주에 대한 제재를 대폭 강화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그러나 10월9일 프랑스 파리 OECD 본부에서 열린 회의에서 우리 대표가 협정에 공식 서명한 후 아직까지 언론이 이를 문제 삼으려는 조짐은 없다. 우리가 협정에 서명한 것이 불가피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일까.

조선 협상이 자동차 협상과 달리 비난의 표적이 되지 않는 것에 대한 통산부의 자체 분석이 흥미롭다. 우선 조선산업은 자동차산업과 달리 일반 소비자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따라서 소비자들은 협상 결과를 체감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최근 들어 주로 유럽 각국과 실랑이를 벌인 조선 협상은 한·미 간의 자동차 협상에 비해 관심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도 있다. 한·미 두 나라의 통상 마찰이야말로 전통적인 ‘흥행작’이라는 얘기다.

미국 반응 ‘시큰둥’ 발효 시기 늦춰질 수도

OECD 다자간 조선 협상이 5년 이상을 끌어와 식상한 메뉴라는 점도 감안해야 할 것 같다. 이 협상에서 중점으로 다룬 것은 ‘상업적 선박 건조 및 수리산업의 정상적 경쟁 조건에 관한 협정’ 제정과 ‘선박 수출 신용 양해’ 개정 문제였다. 조선산업에서 전세계적인 자유 무역의 기초를 마련하자는 협정이다.
89년 10월부터 시작된 이 협상은, 같은 해 6월에 미국 조선업계가 일부 조선 강국에 대해 제소한 데서 비롯됐다. 한때 전세계 선박 건조량의 83%를 차지하기도 했던 미국은 80년대 후반 정부 보조금 폐지와 군함 건조 감소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82~88년 미국내 조선소 75개가 폐쇄되고 5만명 이상이 일자리를 잃었다. 미국 조선업계는 정부 보조금을 부활시키라고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자, 한국·일본·서독·노르웨이 네 나라를 미국 무역대표부(USTR)에 제소했다. 이들 나라의 정부가 보조금을 지급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제소를 당한 네 나라는 미국과 협의해 쌍무 협상이 아니라 다자간 협상을 시작하기로 했다.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을 통해 정부의 보조금이나 반덤핑 문제가 논의되고 있었는데도 별도의 협정이 필요했던 것은, 조선산업의 특성 때문이다. 수입자들의 주문에 따라 생산하는 선박은 수입국의 관세 영역을 통과하지 않을 뿐더러, 실제 수입자가 누구인지 규명하기가 곤란할 때마저 많다. 이를 반영하듯 선박은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의 반덤핑 협정에 의한 제소가 그동안 단 1건도 없었다.

지난해 7월17일에는 협정의 주요 내용이 타결됐다. 올해 10월9일 열린 회의는 관련국들이 협정에 공식 서명하는 절차로, 우리나라에서는 프랑스 주재 대사가 대표로 참석했다. 현재 국내에서 이 협정 가입안은 국회에 제출돼 있는 상태다.

5년 여에 걸친 협상 과정에서 우리나라는 내내 수세에 몰렸다. 일본 엔화가 평가 절상됨에 따라 세계 조선시장에서 점유율이 급격히 높아져 93년 한때 수주 점유율이 세계 1위가 되기도 했기 때문이다(도표 참조). 더욱이 일부 조선업체가 특혜 금융을 받거나 산업합리화 업체로 지정돼 정부의 직·간접 보조 혜택을 받고 있었던 데다가 조선업체들이 끊임 없이 설비 증설에 열을 올렸다. 80년대 조선업종의 장기 침체로 조선 설비를 대폭 감축해야 했던 OECD 각국은 우리나라의 설비 증설에 특히 신경을 써왔다.
당초 이 협상을 주도한 미국은 오히려 이 협상에 소극적이 되고 말았다. 유럽이 마지막까지 협상 타결에 제동을 걸었던 우루과이라운드와는 정반대 양상이 벌어진 것이다. 가격 경쟁력을 거의 상실한 미국 조선업계는 이 협상에서 크게 얻은 것이 없다면서 국내 입법에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고, 의회의 일부 인사들도 비슷한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현재까지 협정 가입안을 의회에 제출하지 않고 있다. 미국이 가입안 비준을 늦추거나 거부할 경우 조선 협정은 내년 1월로 돼 있는 발효 시기가 늦춰지거나 유명무실해질 수도 있다.

중국·러시아 등 저가 공세로 맹추격

이번 협상과 관련하여 국내 조선업계가 가장 우려하는 조항은 덤핑 수주에 대한 피해 가격 제도. 저가 수주로 해를 입은 나라는 피해 가격을 초과하지 않는 범위에서 과징금을 물릴 수 있다는 조항이다. 문제는 피해국이 해를 입힌 기업에 직접 이런 조처를 취할 수 있다는 점이다(협정 부속서 Ⅲ 참조). 통상 다자간 협정이 정부와 정부 간의 대응 조처들을 명시한다는 점에 비추어 이 규정은 극히 이례적이다. 더욱이 유럽연합(EU) 각국은 과징금 제재 조처에 불응하거나 이를 체납하는 업체의 선박에 대해 4년간 유럽의 모든 항구에서 화물을 선적하거나 하역할 수 없게 하는 제재 조처에 합의했다.

조선업계가 이 규정을 두려워하는 것은, 국내 업계가 여전히 가격 경쟁력을 무기로 수주 점유율을 높여 왔기 때문이다. 우리의 가격 경쟁력은 풍부한 노동력과 선박용 철강을 비롯한 조선 기자재를 값싸게 공급 받는 데서 나온다. 최근에는 엔고에 힘입어 가장 경쟁력이 있다는 일본에 비해서도 무려 20% 안팎의 가격 우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산업연구원(KIET)의 공식 입장이다. 기술 수준은 일본의 70∼80%에 머무르는 것으로 추정됐다. 이 때문에 업계는 협정이 발효될 경우 우리나라의 조선 수주와 관련한 제재가 끊이지 않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최근 저가 수주 공세를 벌이고 있는 중국·러시아·폴란드·브라질이 OECD 회원국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 협상에서 제외됐다는 점도 부담스러운 일이다. 세계 2위 수주 국가라는 이유로 82년부터 OECD 조선분과위원회에 참석해온 우리의 몫을 이들 국가가 차지할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부는 OECD 다자간 조선 협정이 발효되기 전까지 가능한 한 많은 국가를 협정 대상국으로 끌어들인다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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