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용들, 21세기에 승천할까 추락할까
  • 張榮熙 기자 ()
  • 승인 1995.09.07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산업연구원 주최 국제 학술대회/낙관·비관 엇갈려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의 경제적 성취는 기적으로 불리리만큼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일본과 ‘네 마리 용(한국·대만·홍콩·싱가포르)’그리고 후발 주자인 말레이시아·태국·인도네시아·중국을 잇는 동아시아의 성장 동인은 무엇인가. 21세기에도 이런 역동성이 지속될 것인가, 아니면 서서히 침몰하고 말 것인가. 산업연구원(KIET)이 최근 광복 50주년을 기념하여 ‘한국의 산업:발전 역사의 조명과 21세기 비전 모색’이라는 주제로 연 국제 학술 대회는 이같은 물음에 하나의 단서를 제공한다. 이 회의에는 미국의 폴 쿠르그만 교수(스탠퍼드 대학)와 앨리스 앰스덴 교수(매사추세츠 공과대학), 세계은행의 존 페이지 수석연구원, 일본의 마수 우에쿠사 교수(도쿄 대학), 김수용(서강대)·정창영(연세대)·남종현(고려대)·안충영(중앙대) 교수 등 국내외 학자와 박운서(상공자원부)·이석채(재정경제원) 차관이 참여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이를 토대로 동아시아가 21세기에 세계 경제의 중심군이 될 수 있는지 여부를 타진해 본다.〈편집자〉

폴 쿠르그만 교수가 94년 미국의 격월간지 <포린어페어스> 11·12월호에 쓴 ‘아시아 기적의 신화’는 아시아인들을 흥분시켰다. 이 한편의 논문으로 그는, 그가 표현한 대로 명성과 악명을 동시에 얻었다. 그의 주장은 ‘동아시아의 미래는 암울하다’는 것으로 ‘다음 세기의 주역은 동아시아’라는 일반적 관측에 찬물을 끼얹었다.

미국에서 같이 날아온 앨리스 앰스덴 교수는 아시아인 못지 않게 그의 시각에 비판적이어서 흥미롭다. 그는 89년 <아시아의 다음 거인:한국과 후기산업화>라는 저서로 한국에도 지명도가 높은 경제학자이다. 두 석학은 동아시아가 지난 30년간 경이로운 경제 성장을 했다는 점 외에는 깡그리 의견이 다르다고 할 정도였다.

‘악역’을 자처한 쿠르그만 교수는 “많은 사람이 믿어 의심치 않는 상식도 한번 의심해 보자”며 입을 열었다. 그는 세계은행에서 붙인 ‘고성장아시아경제군(HPAEs: high-performing Asian economies)’에서 따온 듯 동아시아 국가를 ‘히피스(hippies)’라고 부르며 동아시아의 고속 성장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고 폄하했다. “동아시아의 성취는 초기 소련 같은 나라와 비슷할 뿐이다. 마술로 보는 것도, 신비스러운 현상이나 기적으로 보는 것도 명백한 잘못이다.”

지금까지 아시아의 경제 성장을 평가하는 학계의 시각에는 세 가지 부류가 있었다. 홍콩과 같이 자유 무역을 통해 성장했다는 원론주의자, 정부 개입을 통해 높은 무역 장벽을 쌓아놓고 수출주도형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는 수정주의자, 유교주의 같은 아시아의 특유한 문화로 인해 고속 성장을 이룩했다는 문화주의자가 그들이다.

“아시아 성장 원동력은 정부 개입”

쿠르그만 교수는 이들의 연구가 대부분 근거 없는 주장이라고 일축했다. 그는 동아시아 국가들의 성장에는 ‘요소 투입 증가’라는 공통점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개발 초기에 낮았던 저축률과 투자율이 성장과 더불어 높은 수준으로 증가했고 급속한 교육 투자를 통해 인적 자본도 크게 늘어났다. 다른 나라보다 경제 활동에서 차지하는 수출 비중도 높았다.” 고속 성장은 저축률·투자율·인적 자본과 같은 요소 투입물이 집적된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반면 앰스덴 교수는 성장의 원동력으로 수출과 정부 개입을 꼽았다. 그는 총요소 투입 증가를 부정하지 않았지만, 이것 역시 정부가 효율적으로 동원한 결과라고 보았다. 그는 동아시아 국가들이 가진 경쟁 자산에 차이가 있어 정부가 개입한 정도는 달랐지만, 개입이 필요했던 이유로 두 가지를 들고 있다. 뒤늦은 산업화를 촉진하기 위해 선진국이 이미 상업화한 기술을 습득해야 했으며, 세계 시장에서 경쟁해야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한국과 대만이 중남미같이 산업 지원을 무상으로 했다면 고속 성장에 실패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앰스덴 교수는 “한국의 정부 개입 방식은 수출 성과를 기준으로 한 ‘호혜주의’였다. 특히 수출에서 정부가 조건부로 지원했기 때문에 수출이 한국 경제 성장의 원동력이 될 수 있었다. 정부와 기업의 긴밀한 연대는 한국·일본·대만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고 분석했다.

동아시아에서 저축률과 투자율이 높았고 공산품 수출이 크게 늘었다는 점은 많은 학자들의 연구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여기서 성장 동인을 찾는 데 동의하는 학자도 적지 않다. 문제는 기술 진보와 같은 생산성 증가 없이 성장했다는 쿠르그만의 주장이다. 생산성 증가 여부를 확인하는 일은 동아시아의 미래와 직결된다.

쿠르그만 교수가 인용한 94년 어윈 영의 성장회계 실증 연구에 따르면, 66∼90년중 총요소 생산성 연평균 증가율은 한국 1.6%, 대만 1.9%, 홍콩 2.3%, 싱가포르 -0.3%로 나타난다. 김수용 교수는 성장회계 방식 자체를 신뢰할 수 없지만, 이 결과를 보더라도 싱가포르를 뺀 세 나라의 생산성 증가율은 다른 개도국에 비해 훨씬 높고, 미국·영국보다도 높다고 반론을 제기했다. 김교수는 “동아시아에서는 투입물과 생산성 증가가 다같이 빠르게 이루어졌다. 생산성 증가 없이 요소 투입량의 증가만으로 어떻게 30년 이상을 다른 나라보다 2∼3배로 성장하는 것이 가능한가”라고 반문했다.

앰스덴 교수는 어윈 영의 통계를 엉터리라며 전면 부정했다. 이 통계에 따르면, 생산성이 가장 높은 나라는 이집트이며, 2위가 콩고, 3위가 보츠와나, 4위가 말타로 분석된다는 것이다. 그는 “현실성이 전혀 없는 이 결과를 누가 신뢰하겠느냐”며 쿠르그만을 공박했다.

이런 만만치 않은 반론에도 불구하고 쿠르그만 교수는 공격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아시아인들은 고속 성장이 막연히 계속될 것이라고 믿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성장은 생산성 향상에서만 이루어진다. 생산 요소 투입량을 무한정 늘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미 사회주의 국가, 심지어 일본에서 나타나고 있듯이 아시아 경제는 장기적으로 정체될 것이다.” 그는 동아시아 경제가 21세기에 세계 경제의 중심이 될 것이라는 예측들은 오류나 낙관론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21세기 세계 경제 대국은 미국이다. 2위는 유럽연합(EU)으로 미국 수준에 근접하거나 커질 수도 있다고 보았다. 3위는 일본이 아닌 중국(미국과 유럽연합의 70∼80%)이고, 일본은 4위(미국의 절반)에 그쳤다. 동아시아는 5위(미국의 30%)에 불과했다.

지지 못얻은 쿠르그만의 비관론

쿠르그만 교수는 “정부 개입을 중시하는 아시아의 경제 정책이 시장 체제를 중요시한 서방 정책보다 전혀 우월하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정부 역할 무용론자로, 동아시아에서 있었던 그동안의 정부 개입을 효율적이라고 볼 수 없으며, 한국의 경우 관료주의를 버리지 않는 한 승산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다른 개도국들이 동아시아의 성장 경험에서 교훈을 찾는 발상은 지극히 위험하다”는 것으로 이어졌다.

앰스덴 교수는 쿠르그만의 대척점에 서 있다. 정부 역할 옹호론자다. 그는 “한국 등 동아시아 국가들이 기술 의존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미래는 밝다”고 전제하며 기술 자립에 도달하는 데 상당한 책임이 정부에 있다고 주장했다. “한국은 이제 기초 산업 부문을 고품질화하는 산업 발전의 세번째 단계에 도달해 있다. 성장의 1차적 제약은 기술이다. ‘지적재산권’같은 선진국의 기술 보호벽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에 한국이 기술을 얻기는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한국은 기초 과학과 기술에 더 많이 투자함으로써 자기의존적인 성장 전략을 강화하는 ‘후기 산업화 정책’을 펴야 한다. 이것의 중심적 역할은 정부가 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자유방임주의적 경제 정책을 펴는 나라는 하나도 없다고 지적했다. 세계무역기구(WTO) 체제 아래서 모든 나라가 자유 무역을 하고 세계 단위의 무한 경쟁이 이루어진다는 이른바 ‘범세계주의’도 허구일 뿐이라는 것이다.

국내 학자들의 의견은, 정부 역할의 평가에 편차가 있지만 동아시아의 미래에 대해서는 대체로 같았다. 김수용 교수는 세계 시장에서의 경쟁이라는 기준을 토대로 한 산업 정책이 지속되는 한 동아시아의 성장 전망은 여전히 밝다고 보았다. 활발한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고 인적 자본의 축적 속도 또한 빠르다는 것이다. 안충영 교수도 “압축 성장의 비결은 ‘압축 학습’에 있었다”며 이미 한국 등 동아시아는 시장 유도형으로 빠르게 변신해 왔다고 지적했다. 변화에 잘 대처해 왔기 때문에 성장에 한계를 맞을 것이라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경제학자이기도 한 팡 엥 퐁 주한 싱가포르대사는 “아시아는 서방과 다르기 때문에 쿠르그만의 주장은 위험하기 그지없다”고 말했다. 팡대사는 “동아시아의 유례 없는 고성장을 설명하려면 무엇보다 이들 국가의 자원 배분·동원 능력에 대한 고찰이 선행돼야 한다. 성장 의지와 외부 환경에 대한 적응력을 유지하는 한 동아시아의 미래는 밝다”고 주장했다.

동아시아가 가라앉을 것이라는 쿠르그만의 주장은 이번 학술 대회에서는 지지자를 구하는 데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동아시아의 미래는 동아시아가 쥐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남미에서처럼 무리한 의욕과 거시 경제 운용의 실패 같은 내적인 원인이 파멸을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