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경원의 ‘과잉규제’
  • 李敎觀 기자 ()
  • 승인 1995.10.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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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친 규제로 경제 활동 걸림돌 …다른 부처 사업도 일일이 간섭
지난 7월 중순. 삼성전자가 김영삼 대통령의 방미 시기에 맞추어 미국 현지 반도체 투자 계획을 발표하려던 일정을 돌연 취소했을 때였다. 이 회사의 한 관계자는 참담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우리가 반도체사업에 뛰어들 때부터 제동을 걸기에 바빴다. 그러나 그들의 우려와 달리 반도체사업은 성공을 거두었다. 이제 반도체사업을 지속적으로 성공시키기 위해 미국 현지 투자를 추진하고 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그들이 또다시 다리를 걸고 있다.”

지난 9월 하순. 96년도 예산안이 발표되자 한 경제 부처 장관은 사석에서 장관 직에 대한 심각한 회의를 표명하면서 이러한 하소연을 했다. “그들의 횡포 때문에 일을 할 수가 없다. 그들은 내가 장관을 맡고 있는 부처에 필요한 전문 지식을 갖추고 있지 않다. 그런데도 내 부처가 추진하고 있는 사업들의 타당성까지 간섭하면서 제동을 건다면 어떻게 자율성을 갖고 일하겠는가. 정말 한 부처의 장관 직이 이처럼 허수아비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들’이란 누구를 지칭하는가. 앞의 예에서 보듯 그들은 막강한 권력을 누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삼성전자 같은 대기업의 해외 투자를 불가능하게 하고, 일국의 장관으로 하여금 사석에서 소주 한잔에 울분을 토하게끔 만들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의 권력이 세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바로 예산·금융·세제라는 막강한 정책 수단을 한손에 틀어쥐고 있는 재정경제원의 관료들이다.
‘정부 개입 지상주의’에 민간 기업 희생

김영삼 정권은 출범하면서 경제 정책의 기조를 자유시장경제를 구현하는 데 바탕을 두겠다고 공약했다. 따라서 기업들이 자율적으로 기업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각종 규제를 완화하고 철폐하겠다고 다짐했다. 정부는 이러한 공약을 실천한다면서 경제기획원을 재무부와 통합해 재정경제원을 만들었다. 물론 정부는 이 두 부처의 통합이 영국·프랑스·일본의 예에서 보듯 경제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는 데 훨씬 효율적이라는 사족도 잊지 않고 덧붙였다.

그렇지 않아도 이 두 부처의 힘이 막강한 판에 통합하면 그 권한이 너무 비대해져서 오히려 폐해가 클 것이라는 비판이 많았다. 그런데도 정부는 규제 완화와 효율성 확보라는 논리로 부처 통합을 밀어붙였다. 그런데 정부의 그와 같은 ‘우아한’ 논리가 맞았다면 어째서 기업과 정부 부처 모두 재경원을 기업들의 자율성과 정부 부처들의 소신 있는 정책 집행을 훼손하는 ‘암적 요소’로 인식하게 된 것인가.

이와 관련해 전직 재무부 고위 관료 출신인 한 인사는 “경제기획원과 재무부를 통합하면 기업들의 자율성 확보와 각 경제 부처의 소신 있는 정책 집행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본 것 자체가 김영삼 정권이 얼마나 공무원 조직을 순진하게 보았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말했다. 그는 “한마디로 김영삼 정권은 공무원 조직이 민간 부문을 규제하는 권한과 기능을 줄이기보다는 더 확보하려고 하는 특성을 갖고 있음을 간과했다”고 덧붙였다.

그의 지적이 옳은지 그른지는 재경원이 출범한 이후 규제가 어느 정도 완화되고 있는지를 보면 확인할 수 있다. 규제 완화를 연구해온 한 전문가는, “재경원이 출범한 이후 규제 완화라는 말이 아직도 살아 있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김영삼 정권 초기에는 규제 완화가 경제기획원 중심으로 어느 정도는 이루어졌다. 그러나 재경원이 출범하고 나서 규제완화팀에 재무부 출신들이 대거 합류하면서 규제 완화는 완전히 물 건너 갔다”고 말했다.

사실 재무부 출신 관료들은 규제 완화를 마치 전투에서 병사가 스스로 무장 해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있다. 그 까닭은, 바로 그들이 ‘정부 개입 지상주의’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들은 기업들을 중심으로 한 민간 부문이 아직 ‘어려서’ 정부가 통제하지 않으면 큰일이 날 줄 알고 있는 것이다. 정부 부처의 규제 완화 조처 중에서도 재경원이 출범하기 이전 재무부의 규제 완화가 가장 겉치레로 이루어졌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어쨌든 재경원의 규제 완화 작업은 루비콘 강을 건넜다는 것이 중론이다. 최근 재경원의 ‘정부 개입 지상주의’에 희생양이 되고 있는 기업이 바로 삼성전자와 현대전자이다. 이들은 미국에 대규모 반도체 공장을 설립하겠다고 해외 투자 승인 신청을 냈으나 재경원이 계속 불허하고 있다. 겉으로 드러난 재경원의 불허 이유는, 이들 기업이 미국 투자에 들이는 자본 중에서 국내에서 마련하는 이른바 자기 자본 조달 비율이 20%가 안된다는 데 있다.
실무 부처와 마찰 다반사

그런데 과연 재경원이 내세우고 있는 20%라는 자기 자본 조달 비율 논리는 근거가 있는 것인가. 이와 관련해 앞서의 전직 재무부 출신 인사는 “아마도 재경원 관리들이 무슨 계시라도 받았는지 모르나, 자기 자본 조달 비율이 20%가 되어야 한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국제화를 한답시고 기업들에게 해외에 투자하라고 내몰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근거도 없는 논리로 막는다는 것은 기업의 자율성을 보장하겠다는 정부의 주장이 허구였음을 드러낸 것이다”라고 말했다.

재경원이 반대하는 진짜 이유는, 반도체산업마저 국외로 나가면 국내 산업 공동화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우려는 국내 투자 환경을 개선하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는 것이 업계의 주장이다. 앞서의 삼성 관계자는 “기업이 투자 적기를 놓치면 손해가 천문학적인 금액에 달한다. 그런데도 재경원 관료들이 이를 모르니 서글픈 일이다”라고 말했다.

재경원의 권한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있다. 예산 편성이라는 막강한 무기로 정부 부처들의 정책 집행에 개입함으로써 실무 부처와 마찰을 빚고 있다. 재경원 관료들은 통산·환경·노동·보건복지와 관련한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고 있지 못하면서도 이들 부처의 사업에 일일이 간섭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한 대기업 경제연구소장은 “재경원이 막강한 권한을 남용하고 있다. 이러한 파행이 지속되면 국가 운영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할 것이 분명하다”고 지적했다.

재경원 예산실의 관료들은 각 부처가 올린 수십조원에 달하는 사업 예산을 일일이 검토하고 있다. 이는 한마디로 명령 경제 체제에서 관리 몇명이 매일 수십만 가지 상품의 가격을 일일이 매기는 것과 비견된다. 이와 관련해, 앞서의 경제연구소장은 “재경원이 그와 같은 무모한 일을 지속하는 한 각 부처가 제한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기 위해 소신 있는 정책 집행을 할 수가 없다. 때문에 재경원은 한 부처의 예산 총액만을 통제하고 개별적 사업 예산의 타당성까지 간섭하는 일은 그만두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와같이 재경원 관료들은 기업의 자율적인 활동을 방해하면서 한국 경제의 대외 경쟁력 상실을 조장한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또 전문 지식도 없으면서 각 부처의 사업 예산 편성에 일일이 간섭한다는 비판도 거세게 일고 있다.

무엇보다 재경원이 기업들의 자율적인 생산 활동에 과도한 규제를 지속한다면 그 결과는 한국 경제에 생산력 저하를 가져올 뿐이라는 것이 업계의 비명이다. 한 국가의 생산력 증가를 기업을 중심으로 한 민간 부문이 담당한다고 볼 때, 기업의 생산 활동이 방해 받는다면 결국은 생산력 저하 이외에 다른 결과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과를 피하기 위해 김영삼 정권은 재경원 조직에 대한 대대적인 수술을 하루빨리 단행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재경원 조직 개편 방향은 이렇다. 금융 부문에서는 통화 정책을 한국은행에 이관하고 금융기관 인·허가 를 제외한 모든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 예산 부문도 각 부처 예산 총액만 규제하는 이른바 총액예산주의로 나가야 한다. 그리고 재경원은 부처 간의 정책 조정도 국무총리 행정조정실로 넘겨야 한다. 그럴 경우 재경원의 인원은 현저히 감축되고 민간 기업이나 실무 부처와의 마찰을 피해나갈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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