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한 외국인이 진단한 한국 경제 ‘구름 뒤 쾌청’
  • 李哲鉉 기자 ()
  • 승인 1996.01.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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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한 외국인의 진단/조정기 넘긴 뒤 안정 예상… “부패 척결로 국제 경쟁력 갖춰야”
한국에 와 있는 외국 기업인들은 한국 경제에 대해 지나치리만치 낙관하는 성향이 있다. 그들의 이런 시각은, 노심초사하면서 한국 경제를 바라보는 한국인들을 가끔씩 놀라게 한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대부분 `‘파란 눈’의 시각이 맞아 들어간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93년 금융실명제 실시가 전격 발표되자 한국인들은 경기가 질식사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다. 주가는 폭락하였고 종합주가지수는 곤두박질쳤다. 그러나 외국인 주식 투자가들은 오히려 주식을 다량 매입했다. 결국 이들의 경기 예측이 맞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렇다면 호황에 불안한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 데다, 비자금 파문으로 경제의 ‘약한 고리’가 드러난 지난해는 이들에게 어떻게 비쳤을까. 또 경기에 대한 전망이 크게 엇갈리는 올해는 어떨까.

주한 외국 기업인들은 단기적으로 경제가 크게 나빠질 것으로 보지 않는다. 주한 유럽연합상공회의소 이사 장 자크 그로와씨(31)는 “올해 경기는 작년에 비해 침체할 것은 분명하지만, 과열 이후 안정 성장세로 접어들기 위한 조정 국면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에서 북아시아 경영자문회사(NACS) 직원으로 7년, 한국에서 3년간 근무한 한국통이다. 그는 한국인이 비자금 파문이 경제에 미칠 영향에 대해 지나치게 민감한 것 같다고 지적했다.

한국에서 23년이나 근무한 토머스 아레나스씨(65·알리어소시에이츠 대표)는 “재벌 총수들이 망신을 당했다고 냉장고가 필요한 주부가 냉장고를 안사겠는가, 아니면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재판정에 섰다고 삼성 반도체를 수입하지 않겠다는 나라가 나오겠는가”고 반문한다.

국제적 주류 회사인 IDK사의 부회장 제레미 화이트씨(33) 역시 이 점에 동의한다. “정경 유착에 의한 비리 사건은 이탈리아와 멕시코에서도 있었다. 그렇다고 두 나라가 이 때문에 경제 위기를 맞았다거나 경기가 위축되었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들은 한국의 그늘을 지나치지 않는다. 세계적인 산업 안보 자문 회사인 핑커튼사 한국지사장이자 주한 미국상공회의소 산업안보위원회 위원장인 헙 펠럼씨(47)는 엉뚱하게도 한국에서 제작한 핑커튼사의 홍보 책자를 내민다. 홍콩에서 제작한 홍보 책자와 비교해 보라는 것이다. 6년 된 홍콩산 책자는 표지가 단단하고 색깔도 선명했다. 반면 한국산은 책 테두리가 노랗게 변색됐으며 표지도 수명이 다 돼 보였다. 그는 6개월밖에 안된 이 책자를 들어 보이며 ‘삼풍 홍보 책자’라고 말했다.
그는 주한 미국 공군 정보부(OSI) 요원과 기업인으로 한국에서 12년간 근무하였다. ‘한국통’을 자처하던 그에게도 성수대교 붕괴, 대구 가스 폭발, 삼풍백화점 붕괴는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대형 사고가 연발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각종 비리가 누적되어 나타난 필연적인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은 사회 전체가 부패와 비리에 면역이 되어 도덕 불감증에 걸려 있다. 이것을 ‘한국병’이라고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70년대 개발 독재 시대에 한국에 처음 발을 디딘 아레나스씨도 한국 사회에 뿌리 깊게 박힌 부정부패를 걱정했다. “한국에서 사업을 하려면 공무원들의 직인이 많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직인을 받는 과정에서 부정부패가 생기는 것을 보았다. 물론 꽤 개선되었지만 오래된 사회 관행을 짧은 시간에 청산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이들은 한국 사회가 벌이는 일련의 개혁 정책에 지지를 보낸다. 장 자크 그로와씨는 이러한 개혁 작업이 궁극적으로 한국 기업의 발전을 위해 크게 기여하리라고 확신한다. “정경 유착은 근절되어야 한다. 개혁 작업이 단기적으로 기업 활동을 위축시킬 수는 있다. 그러나 경제에 정치 논리가 개입하지 않게 되면 공정한 게임의 법칙이 한국 경제에 뿌리 내리게 된다. 기업들은 공정한 경쟁 풍토에서 경쟁하면서 강력한 국제 경쟁력을 갖추게 될 것이다. 이것은 한국 상품의 품질 향상과 수출 증대로 이어질 것이다.”

개혁의 범위에 대해 이견을 가지고 있는 이도 있었다. 개혁이 정치권과 행정부에 국한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펠럼씨는 “기업을 포함한 경제 분야 전체에 폭 넓은 개혁 작업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또 이들은 개혁 작업으로 말미암아 일어날 수 있는 일시적인 경기 위축과 사회 분위기 경색을 건강한 경제와 사회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사회 비용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은 이제 개발도상국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제레미 화이트씨는 “한국은 지금 선진국에 걸맞는 경제 체제를 갖추는 과정에서 겪는 가벼운 시련을 맞고 있다. 이것을 극복하면 한국 사회와 경제는 더욱 건강해질 것이다”라고 확신했다.

펠럼씨의 책상 위에는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컬러 광고와 그것을 조잡하게 모방한 한국 기업의 화장품 광고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는 이것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한국 기업들이 남의 나라의 아이디어를 베끼는 시대는 지났다. 그것은 중국·동남아시아 국가들이나 할 일이다. 한국은 이제 연구·개발에 더 많이 투자해야 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안할 인재들을 키워야 한다. 그런 면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개혁 작업이 변신을 위한 좋은 토양을 마련해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일부 대기업이 벌이는 새로운 브랜드 창출, 기업 이미지 통일 작업 등을 경제 개혁의 성과라고 지적했다.

지난해 3월 한국에 온 제레미 화이트씨는 생기가 넘치는 한국 경제에 대해 감탄한다. “평균 경제성장률이 3% 이내인 미국·유럽과 비교하면 한국은 아직도 두 자리 숫자에 가까운 성장률을 자랑하는 경이로운 나라이다. 한국 경제 체제의 역동성을 감안하면 앞으로 이러한 성장 추세는 수년간 계속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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