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스키 전쟁1년, 무너지는 국산 양주
  • 李敎觀 기자 ()
  • 승인 1995.04.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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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흥업소 쟁탈 놓고 최후의 판촉전
승리의 여신 수입 위스키에 미소

수입 업체들은 이번 위스키 전쟁을 시장 확보의 최대 호기로 판단하고 있다. 진로의 선제 공격이 오히려 수입 위스키들의 한국 시장 정복을 부추겼다는 것이다. 진로가 공격 시점을 정확히 파악해 알려준 결과이다. 명성이 있는 수입 위스키의 향과 맛을 본 한국 소비자들이 국산 위스키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으리라는 것이 수입 업체들의 판단이다.

그동안 수입 업체들이 한국 시장을 공략하는 데 가장 어려웠던 점은, 국산 양주 업체들이 룸살롱을 포함한 유흥업소 공급망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진로와 OB씨그램이 장악한 유흥업소에는 이 두 회사가 원액을 수입해서 만든 국산 양주 이외에는 애당초 공급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OB씨그램이 진로에 대항하기 위해 내놓은 국산 프리미엄급 위스키 ‘퀸앤’이 시장 확보에 실패하면서 유통망에 일대 지각 변동이 일어났다. OB씨그램이 진로에 대항하기 위해 수입 위스키인 시바스 리갈을 유흥업소에 공급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시바스 리갈이 유흥업소로 투입되자 조니워커 블랙을 수입하는 리치몬드 코리아도 유흥업소를 확보하기 위해 ‘특공대’를 활용했다. “우선 일반 소비자 사이에 인지도를 확대하면서 룸살롱과 같은 유흥업소 판매 증가를 노려 특별 영업팀을 구성했다”고 리치몬드 코리아의 고승창 이사는 밝힌다.

가격 파괴와 유흥업소 판촉전을 통해 시바스 리갈과 조니워커 블랙 같은 수입 위스키들의 판매가 급속히 늘어나고 있다. 이 두 위스키 판매량은 93년에 전년도 대비 각각 56%, 50% 증가했다. 그러나 값을 절반 가까이 내리고 유흥업소 판촉전을 전개한 지난해는 무려 7백%라는 기록적인 증가를 보였다. 올해 기록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업계에서는 놀라운 증가율을 보일 것으로 전망한다. 지난해 수입 위스키의 국내 프리미엄급 위스키 시장 판매액은 약 6백억원 정도로 전체 판매액의 약 40%에 달했다.

현재 상황은 수입 위스키의 완전 승리로 가고 있다. 상황이 이렇게 수입 위스키 쪽으로 기울자 일부 외국 위스키 제조사들은 더 이상 한국 회사들과 제휴를 맺어 판매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한국 소비자들이 수입 위스키를 선호하는데 굳이 제휴 관계를 지속하면서까지 이윤을 한국 업체와 나눌 필요가 있겠느는 것이다. OB씨그램의 합작사인 캐나다 씨그램이 OB측과 제휴 관계를 청산하고 직판 회사를 설립할지도 모른다고 업계 관측통들은 예측한다.

내년에는 유럽연합(EU)과의 합의에 따라 정부가 주세를 1백20%에서 백%로 인하할 예정이다. 이 때문에 수입 위스키 값이 더 떨어질 것이라고 수입 업체들은 말한다. 위스키 전쟁에서의 승리에 이어 수입 위스키는 한국 위스키 제조사를 점령하는 단계로 움직일 조짐이다. 국산 양주는 외국의 원액을 들여와 병에 담기만 하는 것이다. 결국 국내 양주 시장은 이번 위스키 전쟁을 계기로 수입 완성품 쪽으로 완전히 바뀔 것이라는 것이 지배적인 관측이다.
양주 수입 업자들이 고급 수입 위스키 가격을 무려 절반 이상 인하하는 가격 파괴 전략으로 국내 위스키시장을 흔들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국내 유통업체들에 의해 철옹성으로 지켜져 왔던 유흥업소망까지 수입 위스키가 파고들어 국내 양주시장에는 사활을 건 치열한 판촉전이 벌어지고 있다. 업계 관계자들은 이번 위스키 전쟁을 계기로 수입 위스키들이 머지 않아 한국의 고급 위스키시장을 완전 장악할 것으로 전망한다.

위스키 수입 업체인 리치몬드 코리아 고승창 판매담당 이사는, 수입 업체들은 이번 싸움에 사활을 걸고 있다고 말한다. 한국 시장을 장악하느냐 아니면 회사 문을 닫느냐 둘 중 하나라는 것이다. 현재의 ‘전쟁 양상’으로는 국내 위스키 업체들과 ‘평화적’으로 시장을 나누어 먹을 가능성은 생각하기 어렵다고 한다. 이 때문에 국내의 모든 위스키 제조 업체들이 초긴장 상태라고 한 업계 관계자는 말한다.

수입 위스키의 기습적인 선제 공격은 우선 국내 소비자들의 고급 위스키 선호도가 뚜렷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분석이다. 생활 수준이 높아지면서 국내 애주가들은 소주에서 맥주로, 맥주에서 다시 위스키로, 최근에는 위스키 중에서도 고급 위스키를 찾는 성향을 보이고 있다. 고급 위스키 중에서도 상표의 역사가 분명한 세계적인 고급 위스키를 찾는 추세가 점차 뚜렷해지고 있다. 외국에서 원액만 들여다 국내에서 병에 담은, 이른바 ‘국산 위스키’가 설 자리를 잃고 있는 것이다. 위스키를 즐겨 마신다는 회사원 윤동철씨는 “같은 값이면 누가 국산 양주를 마시겠습니까. 원래 위스키 원산지가 외국 아닙니까”라고 말한다.

수입 업자들은 위스키에 대한 소비자들의 이같은 ‘자각’을 적극 이용하고 있다. 고승창 이사는 “지금까지 한국산 위스키도 진짜 위스키인 것처럼 여겨져 왔다. 지금 국산 위스키와 수입 위스키가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진짜 위스키와 사이비 위스키와의 싸움이다”라고 주장한다.

진로의 고급 위스키 출시가 전쟁 도화선

그러나 외국산 고급 위스키의 판매량이 최근 부쩍 늘어난 것은 품질보다는 값이 싸지고 있기 때문이다. 값이 많이 내려 국내 소비자들이 외국산 위스키를 손쉽게 선택할 수 있게 된 점이 위스키 ‘유행’을 부추기는 것이다.

이번 전쟁의 도화선에 처음 불을 당긴 것은 국내 최대 주류 생산 업체인 진로이다. 진로가 지난해 5월 고급 위스키인 ‘임페리얼 클래식’을 출시하면서 이번 위스키 전쟁이 시작됐다. 이 제품은 12년 동안 숙성시킨 원액으로 만든 이른바 프리미엄 위스키로서 3~8년간 숙성시킨 스탠다드 위스키보다 다소 비싸다. 이 때문에 국내 경쟁 업체들과 위스키 수입 업체들은 임페리얼 클래식이 국내 시장에서는 판매에 실패할 것으로 예측했다.

그러나 수입 업자들의 예측과는 정반대로 임페리얼 클래식은 출시되자마자 고급 위스키 붐을 타고 국내 시장을 휩쓸었다. 진로 마케팅 담당 박용남 부장은 출고되는 양이 부족해 수요량을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고 말한다. 특히 룸살롱 같은 유흥업소에서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라고 주장한다.

당시 국내 최대 맥주 회사인 동양맥주의 자회사인 OB씨그램과, 영국 유나이티드 디스틸러스사의 국내 직판 회사인 리치몬드 코리아도 국내 소비자들의 기호가 변화하는 것을 예측하고 프리미엄급 위스키 제품을 준비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은 새로운 프리미엄급 상품을 언제 내놓을 것인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고승창 이사는결과적으로 진로에게 선공을 당했다고 말한다.

점점 공세를 높이는 진로의 독주를 수입 업자들은 더 이상 방관하지 않았다. 맞불을 놓지 않고는 국내 시장을 앉아서 다 내놓을 상황이 벌어졌던 것이다. 위기 의식을 느낀 OB씨그램과 리치몬드 코리아는 이들이 국내 수입권을 가지고 있는 비장의 카드로 진로와의 정면 승부에 들어갔다. 박정희 대통령이 좋아했다는 ‘시바스 리갈’과 국내 소비자들에게 위스키의 대명사로 통하는 ‘조니워커 블랙’을 국내 시장에 대량으로 출하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때 이들은 값을 절반 이상 내려 진로의 아성에 집중 포화를 퍼부었다. 임페리얼 클래식이 시장 점령에 나선 지 한달도 채 안된 시점에서 수입 업자들이 승부를 거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감행한 것이다. 상륙 작전에 동원한 비장의 무기는 회사의 목숨을 건 가격 파괴였다. 가격 파괴로 판매 마진은 줄어들어도 시장 점유율을 높여 가격 인하에서 오는 손실을 메우겠다는 계산이었다.

임페리얼 클래식에 맞서 가격이 ‘파괴’된 시바스 리갈과 조니워커 블랙이 대량으로 출시되자 국내 프리미엄급 위스키 시장은 약 1년 만에 천억원대의 초대형 시장으로 급성장했다. 지난해 프리미엄급 위스키의 판매량은 2백만병(700 ㎖ 기준)에 불과했다. 그러나 올해는 9백만병 이상 팔릴 것으로 업계는 예상하고 있다.

프리미엄급 위스키 시장이 예상보다 빨리 성 장하자 수입 업체들은 고지 탈환을 위한 두 번째 상륙 작전을 감행했다. 700㎖ 시바스 리갈과 조니워커 블랙 값을 지난해 6월 다시 내린 것이다. 이에 힘입어 판매가 계속 증가하자 수입 업체들은 진로의 아성을 직접 공략해 마지막 목을 죄기 시작했다. 올해 3월 세 번째 가격 파괴를 단행한 것이다. 작년 초까지만 해도 비싼 양주로 통했던 시바스 리갈 700㎖가 이제는 2만5천원 정도에 불과한 대중 술로 변신했다.

대혼전을 거듭하고 있는 위스키 시장을 국내 거대 맥주 회사인 조선맥주가 그냥 놔둘 리 없었다. 조선맥주는 영국의 유나이티드 디스틸러스사로부터 ‘딤플15’를 수입해 국내 시장에 공급하면서 제3 세력으로 슬그머니 전쟁에 끼여들었다. 세계 5대 명품 중 하나로 알려져 있는 딤플15는 750㎖ 한병 값이 3만8천원 선이다. 애초부터 가격을 파괴해 시장에 뛰어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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