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시평] 불확실성 시대의 '실사구시' 경제
  • 李景台 (산업연구원 부원장) ()
  • 승인 1995.08.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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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구 국무총리가 통일원장관 겸 부총리로 재직할 당시 대북정책에 일관성이 없다는 비판이 제기된 적이 있다. 이에 대해 그는 대북 관계의 이중적인 성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야기되는 현상이라고 설명했었다. 냉전 시대에는 북한이 의심할 나위 없이 우리의 적이었으나, 화해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고 해서 금방 동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적이면서 동지이기도 하기 때문에 대북정책 역시 이중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상황 논리였다. 그러나 외교정책에 문외한인 필자가 보기에도 정부의 대북정책은 지나치게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어 북한 사회의 개방을 유도하는 효과가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국론 분열마저 초래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북한이 이중적인 교란 작전을 쓸수록 우리는 대북 외교의 장기 전략을 명확히 하고, 적극적이고 공세적인 전술을 채택해야만 북한으로부터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중적 상황은 국제 경제 질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세계무역기구(WTO) 체제로 대표되는 다자주의와, 유럽연합(EU)·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으로 대표되는 지역주의, 미국의 슈퍼 301조로 대표되는 쌍무주의가 삼중으로 얽혀 불확실성을 더해 주고 있다.

국제 경제 질서 움직이는 힘의 실체부터 정확히 알자

국제 경제 질서가 이처럼 복잡하고 불확실하기 때문에 우리의 사고와 행동 역시 방향 감각을 잃고 표류하기 쉽다. 다자간 협상을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선진국과 후진국 간의 이해를 조정하는 주도적 역할을 떠맡아야 한다고 나서다가도, 막상 쌀시장 개방과 같이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항에 부딪히면 보호주의자로 표변하기도 한다. 역으로 국가 이익을 내세우면서 미국의 부당한 통상 압력을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하다가도, 역부족이 되면 어느 사이에 무역 자유화야말로 번영을 위한 유일한 길이라고 설득한다.

이중적 상황의 불확실성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우선 국제 경제 질서를 움직이는 힘의 실체를 규명하는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 자유 무역은 1차적으로는 이윤을 추구하는 시장 경제의 속성에서 비롯된다. 기업은 이윤이 있는 곳이면 국경·인종·언어·종교의 장벽을 부수고 세계 어느 곳이든 침투하려고 한다. 기업의 이윤 추구 본능은 생물의 생존 본능 못지 않게 치열하고 집요하다. 흔히 우리는 자유 무역이 정부가 만들어 낸 질서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시장 원리의 작동에 의해서 자생적으로 형성된다고 보아야 옳다.
거꾸로 보호주의야말로 정부가 개입한 산물이다. 경쟁에서 불리해진 기업은 정부에 압력을 가하여 수입과 외국인 투자를 규제해 달라고 요청하며, 정부는 국내 산업 육성, 고용 유지, 지역 경제 부흥 따위 명분을 내세워 기업의 요구를 수용하기 때문이다.

세계무역기구 체제는 농업, 정보·통신, 금융, 자동차, 지적 소유권 분야에서 강력한 경쟁력을 갖춘 미국의 거대 기업들이 지구적 차원에서의 이윤 추구에 걸림돌이 되는 외국 정부의 보호주의적 정책을 타파하기 위해 미국 정부와 합작으로 출범시킨 것이다. 그들은 정부가 개입하지 않는 자유로운 경쟁이야말로 경제적 후생을 극대화시킨다는 신고전학파 경제학의 이론적 엄호 사격을 받으며 세계 곳곳을 공략하고 있다.

이같은 국제 경제 질서에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우선은 강대국의 논리를 전폭 수용하여 모든 보호주의적 잔재를 털어버리고 완전한 개방 체제로 급선회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방법은, 강대국의 거대 기업이 주도하는 국제 경제 질서의 이기적 성격을 간과한 채 그들이 만들어 준 제도를 맹목적으로 이식하면 저절로 선진화된다고 믿는 논리적 모순을 안고 있다.

둘째, 이와는 정반대로 개방의 역효과를 지나치게 의식하여 되도록이면 개방 속도를 늦추고, 겉으로는 개방하더라도 속으로는 여러 가지 안전 장치를 강구하여 국내 산업을 보호하는 방법이 있다. 그러나 이는 무역의 호혜적 성격을 간과하고 우리의 대외적 신뢰를 떨어뜨리며, 국제적 고립을 초래한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셋째, 국제 무역 질서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되 우리의 이익을 최대한으로 관철하려고 노력하며, 그 과정에서 생기는 통상 관계의 긴장과 경색은 기꺼이 수용하고, 세가 불리하여 밀리게 되면 국내 산업을 육성하는 보완 조처를 병행하는 실용주의적 노선을 견지하는 방안을 들 수 있다. 이중성의 시대를 헤쳐 나가는 데 실리를 중시하는 이 원칙이야말로 사고의 혼란을 극복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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