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 위기냐 아니냐
  • 이철현 기자 (leon@sisapress.com)
  • 승인 2004.06.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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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시 지표·체감 지표 ‘엇박자’ 미스터리…복합 불황 가능성 없어
경제 위기는 경제학 용어가 아니다. 구체적으로 무슨 경제 현상들이 복합적으로 발생해야 ‘위기’라는 명확한 정의가 없다는 것이다. 경제에 부(負)가 되는 요인들이 돌발적으로 발생해 통제하기 힘들 정도로 경제 불안정이 깊어지는 것이 흔히 말하는 경제 위기에 가장 근접한 정의가 아닐까.

정진욱 교수(연세대·경제학)는 “경제 상황에 대한 인식은 주관적 판단이 깊이 관여되므로 갑론을박할 사안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따라서 경제위기론은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기 위한 현실적 접근이라기보다 본질적으로 정치적 논쟁이 빚은 사생아이기가 쉽다. 소모전에 가까운 경제위기론 논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경제 정책 방향을 자기 이익에 맞게 유도하거나 강제하려는 이해집단의 숨겨진 의도를 살펴야 한다.

경제위기론의 진원지는 재계. 참여정부가 잇달아 재벌 개혁 조처를 내놓자 재계와 보수 언론들은 “내수와 투자가 극도로 부진해 경제가 위기로 치닫는 와중에 정부는 개혁 타령만 한다”라고 입을 모았다. 재계의 이익단체인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관계자들이나 기업 산하 경제연구소 연구원들도 쉴새없이 경제위기론에 풀무질을 해댄다.
그동안 수출이 40% 가까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낮은 포복으로 기던 소비가 살아날 기미를 보이자 경제위기론은 시끄러운 것에 비해 공감을 얻지 못했다. 하지만 미국 금리 인상, 중국 긴축 정책, 유가 급등이라는 삼재(三災)로 인해 수출마저 타격을 입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자 경제위기론은 힘을 얻게 되었다. 재계는 그나마 잘되는 수출마저 차질을 빚으면 한국 경제는 회복하기 힘든 상태에 빠질 것이라고 주장하며, 대기업들을 옭아매는 정부 규제를 풀고 개혁 조처를 중단해 투자와 사업 의지를 고무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경제위기론이 다시 불거지자 노무현 대통령이 진화에 나섰다. 노대통령은 6월7일 국회 개원 연설에서 “한국 경제가 어렵기는 하지만 위기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노대통령은 또 6월11일 청와대에서 열린 언론사 경제부장단 만찬에서 “전투지휘관은 아무리 불리해도 그렇다(불리하다)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국가 원수로서 경제위기론을 불식하겠다는 의도에서 나온 노대통령의 발언은 오히려 ‘경제위기론 논쟁’의 불씨를 지폈다. 재계와 보수 언론은 국정 최고책임자의 현실 인식 수준이 떨어진다고 맹공했다. 재정경제부는 거시경제 지표를 내세워 경제 위기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노대통령을 측면 지원했다. 이 와중에 참여연대 경제개혁연구소까지 나서 ‘일본식 장기 복합 불황’이 올 수 있음을 경고했다.

김대유 재경부 경제정책국장은 “한국 경제는 지난해 하반기 이후 성장과 고용 등 주요 경제지표가 꾸준히 개선되고 있어 현 상황을 위기로 보는 것은 무리다”라고 말했다. 우선 경기를 진단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인 경제성장률이 지난해 3/4분기 이후 개선되어 올해 1/4분기 5.3%를 기록했다. 취업자 수도 올해 2월 이후 달마다 50만명이 넘는다. 소비와 투자는 회복이 더디지만 나빠지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것은 국제수지 흑자 규모. 국제수지는 올해 1~3월 74억 달러 흑자를 기록해 전망치를 크게 웃돌았고 외환보유고도 5월말 1천6백65억 달러까지 쌓여 세계 4위다. 소비자 물가 상승률도 3.3%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거시경제 지표만 살펴보면, 한국 경제가 위기라는 주장은 황당하게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중소기업·서민·중산층은 1987년 외환위기 때보다 더 어렵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내수가 극도로 위축되어 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설비 투자는 경제성장률과 비례해 늘기는커녕 오히려 줄어들면서 성장잠재력이 훼손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경제 주체들이 피부로 느끼는 ‘체감 경기’ 지표는 5월부터 다시 하락하고 있다. 한국은행이 지난 5월17~27일 2천9백여 업체를 상대로 조사한 ‘5월 기업 경기조사’를 보면, 6월 경기실사지수(BSI) 전망치가 82로 5월 96에 비해 14포인트나 떨어졌다. 이 지수는 100을 넘으면 앞으로 경기가 좋아지리라고 내다보는 기업이 많다는 것을, 100 아래면 그 반대를 가리킨다.

통계청이 5월16~22일 전국 도시 지역 가구 2천 곳을 조사한 ‘5월 소비자 전망 조사’를 보면, 6개월 뒤 경기와 생활 형편, 소비 지출에 대한 전망을 나타내는 소비자기대지수는 94.8로 5월 99.9에 비해 5.1 포인트 떨어졌다. 체감경기 지표가 떨어지면서 소비와 투자 심리가 위축되고 내수 침체가 가중되는 악순환이 일어나고 있는 셈이다.

거시 지표만 보면 건실한 국민 경제가 최악의 체감 경기를 보이는 것은 수수께끼에 가깝다. 노대통령도 언론사 경제부장들과의 만찬에서 “과거와 달리 수출이 내수로 연결되지 않는 원인을 규명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한 산업이 잘되면 주변 산업도 그 덕을 본다. 이른바 스필오버(spill-over) 효과. 과거 수출 주역인 대기업들이 잘되면, 산업 전후방 효과로 인해 중소기업이 활력을 찾고 고용은 확대되는 선순환이 일어났다.

김상조 참여연대 경제개혁연구소장은 “거시 지표와 체감 지표의 괴리 현상은 산업부문별 연관 관계가 약해져서 발생한다”라고 말했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 경제의 산업연관 효과는 1970년대 수준으로 후퇴했다. 수출과 내수, 대기업과 중소기업, 조립 기업과 소재부품 기업 사이에 상호 관련성이 깨어지면서 수출, 대기업, 조립 기업만 잘되고 나머지는 극도로 피폐해져 스필오버나 트리클다운(trickle down) 효과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이 입증되고 있다.

정부, 중소기업 지원 정책부터 펼쳐야

김상조 소장은 “이 사태가 지속된다면 일본처럼 장기 복합 불황을 맞을 수 있다”라고 경고했다. 복합 불황은 주가·부동산·소비·투자·생산이 동반 추락해 경제가 활력을 완전히 잃어버리는 것을 일컫는다. 일본은 지난 10년 동안 복합 불황에서 헤매다가 얼마 전 간신히 벗어났다. 하지만 경제 전문가들은 한국 경제가 복합 불황의 위기를 맞으리라는 전망은 현실성이 없는 것으로 판단한다. 갱년기에 접어든 일본 경제와 달리 한국 경제는 아직 역동성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은 투자 기회가 소진된 일본과 달리 아직 투자할 곳이 많다.

경제 전문가들은 내수 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정부가 경제 정책의 발상을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산업 전후방 효과가 붕괴하고 있다면 고용과 투자의 주역인 중소기업을 활성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제경쟁력을 갖춘 대기업에 대해서는 시장의 실패를 야기하는 불완전 경쟁 행위만 규제하고 정부는 중소기업을 지원해야 한다는 것에는 정부·재계·보수 언론·시민단체 모두가 동의하고 있다.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진 정책부터 우선 실행하는 것이 참여정부가 선택할 수 있는 유효한 전략이 아닐까.

경제 위기론 ‘갑론을박’

정부
“경제성장률·고용·국제수지 등 거시 지표가 개선되고 있어 경제 위기라고 보는 것은 무리다.”

재계
“소비 심리 악화, 투자 위축 등 체감 경기 지표가 떨어지고 있어 내수 활성화 조처가 필요하다.”

참여연대
“대기업 위주에서 중소기업과 시민 경제 위주로 정부가 경제 정책의 발상을 전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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