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현 이후 SK그룹 '신사 협정' 가족 드라마
  • 金芳熙 기자 ()
  • 승인 1998.09.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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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촌 형제 5인, SK그룹 지분·경영권 ‘일단’ 합의
지난 8월26일 최종현 SK그룹 회장이 타계한 이후 SK의 진로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는 SK그룹이 국내 5대 재벌 그룹의 하나로 워낙 규모가 커서이지만, 고(故) 최회장의 독특한 위치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미국에서 수학하다 귀국해 맏형인 고 최종건 회장이 설립한 선경직물에서 근무하던 중 73년 형의 뒤를 이어 경영권을 승계했다. 형 역시 당시 폐암으로 갑자기 타계했다. 이런 점에서 최회장은 이른바 1.5세대 경영인이다. 따라서 SK그룹의 예는 비슷한 처지의 몇몇 재벌 그룹과 그 계열사 경영권의 향배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

경영권과 관련해서 그룹 안팎에서는 장자(長者) 승계 원칙을 지킬 것으로 관측한다. 최회장의 장남인 최태원 (주)SK 부사장(38)이 그룹 회장에 취임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최부사장은 그동안 SK그룹의 전신인 선경그룹 경영기획실에서 착실히 경영 수업을 해 왔다. 특히 최회장의 건강이 악화한 지난해 말에는 SK그룹의 새로운 모기업으로 떠오른 (주)SK(옛 유공)의 종합기획실장으로 전진 배치되어 눈길을 끌었다.

더욱이 최회장이 SK그룹과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활동을 그만둔 최근에는 그룹 구조 조정을 포함한 주요 현안을 결정해 왔다. 그가 최종적으로 협의했던 인물은 최회장의 오른팔로 평가되던 손길승 SK텔레콤 부회장 정도. 외부에 알려진 것보다 상태가 좋지 않았던 최회장은 올해 들어 손부회장에게 조언자 역할을 맡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인지 최부사장은 최근 들어 재계 총수들을 만나는 등 사실상 그룹을 대표해 왔다. 앞으로 그룹 운영 구도를 결정할 공식 행사는 8월30일 장례식이 끝나고 열린 슈펙스(SUPEX)추구협의회(사장단 회의). 따라서 최부사장은 9월 초 그룹 회장에 공식 취임할 가능성이 크다.

재산 정리, 완전히 매듭짓지는 못해

그렇다고 해서 SK그룹의 창업주인 최종건 회장가(家)와의 재산 정리 문제가 완전히 매듭지어지는 것은 아니다. 현재 최종현가의 2형제는 (주)SK와 SK텔레콤 등 주력 기업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반면 창업주 최종건 일가의 3형제는 SK케미칼·SK유통 등 섬유업을 중심으로 한 비주력 기업을 전담하고 있다(도표 참조). 만일 최종건가의 2세들이 그룹 경영 참여와 일정 지분을 요구할 경우, 그룹 분할 문제는 언제든지 제기될 수 있다.

아직까지는 이런 지분 다툼이 외부에 알려진 적은 없다. 게다가 최회장이 타계하기 직전 양가의 다섯 형제가 미국에서 회동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양가 사정에 밝은 재계의 한 소식통은 “8월 초 사촌지간인 다섯 형제가 미국에서 만났다”라고 전했다. 최태원 부사장이 7월28일부터 8월2일까지 미국을 방문했다는 사실도 이 주장을 뒷받침한다. 비록 여름 휴가철에 맞추어 하는 연례 행사라고는 하나, 최근의 그룹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일종의 신사협정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점 때문에 그룹 내부에서는 당분간 지분 다툼이 벌어질 여지가 거의 없다고 본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지분을 놓고 다툴 여지가 있다. 예를 들어 지난해 그룹 구조조정본부 재무팀이 최종현가의 일부 계열사 지분을 확대한 적이 있다(8월25일 현재 지분 상황은 도표 참조). 재계와 언론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양가의 지분 다툼을 의식한 것이라고 추측한 적도 있다.

그룹 분할 구도에서 가장 미묘한 부분은, 섬유업을 중심으로 한 SK그룹의 모체 기업들이 새로운 주력 기업군으로 떠오른 석유화학과 정보통신 업종을 인수하는 데 얼마나 기여했느냐 하는 점이다. 최종현 회장은 80년 당시 공기업이던 대한석유공사(유공) 민영화 과정에서 삼성을 제치고 이를 인수해 ‘새우가 고래를 먹었다’는 신화를 만들어 냈다. 또한 94년에는 제2 이동통신 사업권을 반납하는 촌극 끝에 역시 공기업이던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했다.

이런 결정적인 사세 확장 과정은 고 최종현 회장이 주도했지만, 기존 계열사들의 자금력이 큰 도움이 된 것 또한 사실이다. 따라서 최종건가 형제들로서는 (주)SK와 SK텔레콤 같은 초우량 거대 기업의 지분을 요구할 여지가 있는 셈이다.

아직 마흔이 채 안된 젊은 후계자가 그룹 경영권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도 관심사다. 최부사장은 92년에야 그룹 경영에 뛰어들어, 그룹 전체의 상황을 파악하거나 측근들을 배치하기에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이 때문에 최부사장은 현재 1세대 전문 경영인들과의 관계 재정립을 비롯해 그룹 장악력을 요구받고 있다. SK그룹 내의 대표적인 1세대 전문 경영인들로는 손길승 SK텔레콤 부회장과 김항덕 (주)SK 부회장을 들 수 있다. 두 사람은 고 최종현 회장의 최측근으로 흔히 SK그룹의 쌍두 마차로 불렸다. 뒤를 이어 현재 그룹 구조 조정 작업을 지휘하고 있는 (주)SK 종합기획실의 유승렬 전무 정도가 1세대 인물로 꼽힌다.

이들 가운데에서도 김부회장은 지난해 말부터 그룹 경영에 다소 거리를 두어온 것으로 보인다. 그 때문인지 새 정부 출범 때 조각 하마평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그룹 내부에서는 그가 당시 막대한 적자를 보고 있던 SK증권을 정리하라고 진언했기 때문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SK그룹은 유상 증자를 통해 최회장이 애착을 보이던 이 회사를 살리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따라서 최부사장은 김부회장을 중심으로 한 1세대 전문 경영인들과의 관계를 새로이 모색해야 한다.

지분 다툼에서 선대 측근들과의 관계 정립까지, 1.5세 경영인의 경영권 승계라는 새로운 유형이라고는 하나, SK그룹의 진로를 둘러싼 논란도 다른 재벌 그룹과 마찬가지로 ‘가족 드라마’의 틀을 벗어나지는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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