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딜 파문’ 전모…LG 그룹 막판까지 저항
  • 金芳熙 기자 ()
  • 승인 1998.06.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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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딜 파문’ 전모/3대 재벌 총수와 대통령 최측근 접촉 확인
지난 5월10일 김중권 청와대 비서실장의 발언으로 시작된 ‘빅딜’(업종 맞교환) 파문이 시간이 흐를수록 혼란스러운 양상을 보이고 있다. 발언의 진의는 온데간데 없고 온갖 해석과 억측만 난무한다. 그 가운데서도 김실장의 발언이 판단 착오 아니면 정치적 목적에서 나온 것으로 보는 시각이 힘을 얻고 있다.

과연 그럴까. 그렇다면 임박했다는 재벌 그룹 간의 빅딜은 ‘없던 일’이 되고 마는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다. <시사저널>은 빅딜 파문 관련 당사자들과 그 주변의 증언을 종합한 결과, 김실장의 발언을 뒷받침할 3대 재벌 총수와 김대중 대통령 최측근 사이에 빅딜과 관련한 접촉이 실제로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물론 빅딜 성사 직전 단계에서 나온 이번 발언 파문 때문에 지금까지의 논의가 뒤바뀔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이 파문의 진상을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우선 김실장이 빅딜에 관해 언급한 시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는 5월10일 오전 시내 조선호텔에서 열린 한국능률협회 주최 조찬 강연에 참석해서 문제의 발언을 했다. “대기업 구조 조정은 국가 경제 운용뿐 아니라 단위 기업을 위해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빅딜을 포함한 대기업 구조 조정이 며칠 후 발표될 것이다.” 호남 편중 인사에 대한 해명을 비롯해, 공기업 경영 혁신과 근로자 권익 보호 등 여러 가지 주제에 대해 얘기하는 자리였다.

언론의 관심은 아무래도 대기업 구조 조정에 쏠릴 수밖에 없었다. 김실장이 ‘그동안 한 재벌 기업이 구조 조정에 상당한 우려를 표하며 거부하는 태도를 취했으나, 어제 전화로 알아본 결과 구조 조정에 승복했다’고 말한 것은, 강연이 끝난 뒤 기자들의 끈덕진 질문에 대답할 때였다. 언론들은 이 발언을 자동차사업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려던 삼성이 9일 드디어 물러섰으며, 김실장이 9일 있었던 박태준 자민련 총재와의 회동에서 이 사실을 귀띔받았다고 이해했다. 재계의 분위기를 반영한 언론의 이러한 해석이 계속해서 오해를 낳게 되었다.

이같은 오해를 풀기 위해 먼저 알아두어야 할 것은 그동안 빅딜을 극비리에 추진해 온 쪽은 정치권이나 경제 관료가 아니라 김대통령의 최측근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금융감독위원회가 주도해 온 부실 기업 퇴출 문제(아래 상자 기사 참조)와는 별도로, 기업 구조 조정의 상징적 성과물로 빅딜을 성사시키고 싶어했다.

‘반도체’ 잃게 될 LG, 막판 이르러 승복

빅딜을 인위적으로 추진하지 않겠다는 김대통령의 발언 때문에 빅딜 구상은 한때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으로 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5대 그룹의 자발적인 구조 조정 작업이 지지부진하자, 정부가 직접 나설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만 해도 주로 거론된 것은 현대와 삼성 그룹 간의 빅딜이었다. 삼성이 자동차사업을 포기하는 대신 현대는 반도체를 포기하는 식이었다. 이런 상징적인 빅딜이 성사되면 다른 그룹은 자연스럽게 이를 따르리라는 계산이었다. 이를 성사시키기 위한 대통령 최측근들과 재벌 총수 간의 극비 회동은 지난 5월에 주로 이루어졌으며, 5월 말 절정에 달했다.

그런데 현대와 삼성 간의 빅딜에는 결정적 문제가 있었다. 삼성은 자동차를 포기할 의사가 있었지만 현대는 반도체사업에서 철수할 의사가 없었다. LG그룹까지 포함시키는 이른바 ‘삼각 빅딜’ 구상이 구체화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현대가 반도체사업 대신 석유화학을 포기하고, LG 그룹이 반도체사업을 포기하고 석유화학을 떠안는 방식이었다. 결국 현대는 자동차, 삼성은 반도체, LG는 석유화학 업종에 주력하게 한다는 구상이었다.

첨단 정보통신사업을 주력 업종으로 하려던 LG로서는 그동안 애정을 쏟아 온 반도체사업을 졸지에 포기해야 할 상황이 벌어졌다. 억울한 노릇이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빅딜 구상을 거부한 것은 언론의 추측과 달리 삼성이 아니라 LG그룹이었다. 대통령 방미 기간에 빅딜 구상을 구체화한다는 대통령 최측근들의 계획은, LG그룹 구본무 회장이 사실상 잠적함으로써 차질을 빚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LG그룹에서 회장을 대신할 위치에 있는 인사와 접촉이 이루어진 것은 김실장의 발언이 있기 직전이었다. LG쪽 관계자는 우회적으로 빅딜 구상에 승복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 낭보에 고무된 김실장은 이를 공개하기에 이르렀다.

박태준 총재에 대한 ‘배려’가 오히려 오해 불러

빅딜 구상의 대상으로 알려진 현대·삼성·LG 그룹은 김실장의 발언이 알려지자 일제히 이를 부인했다. 특히 삼성이 자동차사업을 포기할지 모른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고, 심지어는 계열 언론사인 <중앙일보>까지 이를 보도하자 삼성그룹에서는 경영진이 직접 진화에 나섰다. 삼성그룹은 12일 오전 7시 자동차사업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특별 사내 방송을 내보내기도 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역시 11일 오전 회장단 회의를 통해 ‘빅딜 논의는 전혀 없었다’고 밝혔다. 3대 재벌 그룹 총수들은 이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해당 그룹, 심지어는 전경련까지 빅딜 구상을 전면 부인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점은 3대 그룹 총수와 그 핵심 측근들 외에는 빅딜 관련 사항을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점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또한 재벌 총수들로서는 당초부터 빅딜 구상을 못마땅하게 여겨 온 터라, 여론의 추이를 보면서 이를 원점으로 되돌리고 싶은 생각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현대와 LG는 삼각 빅딜을 통해 그룹 전체에 부담을 주는 자동차사업을 자연스럽게 정리하게 된 삼성이 막후에서 작용한 것으로 의심하기도 했다.

빅딜 파문과 관련해 남은 마지막 의문은 김중권 비서실장과 박태준 총재가 왜 서로 신경전을 벌였는가 하는 점이다. 이는 두 사람 사이의 의사 소통 문제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보인다. 김실장은 조찬 강연이 끝난 후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지자, ‘박태준 총재에게 물어 보라’고 했다. 이 말은 빅딜 성사의 공을 그동안 기업 구조 조정 작업을 떠맡아 온 박총재에게 넘겨 주려는 배려에서 나온 것이었다. 또한 경제와는 무관한 자신이 빅딜 얘기를 한다는 것에 부담을 느끼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박총재는 그 말을 빅딜에 관한 책임을 전가하는 것으로 오해했다. 아직 설익은 구상을 지나치게 일찍 공개하는 것에 대한 불만도 있었다. 비밀리에 추진하던 빅딜 구상이 정부의 손을 벗어나 정치권으로 넘겨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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