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실 기업 퇴출… 하청업체 날벼락
  • 朴在權 기자 ()
  • 승인 1998.07.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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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개 기업에 ‘물린’ 중소기업 1만5천개…연쇄 부도 위기
10층짜리 최신식 건물 1층에는 창업자의 반신상이 우뚝했다. 그러나 엘리베이터는 움직이지 않았고, 에어컨도 작동되지 않았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은 표정이 잔뜩 굳어 있었고, 후덥지근한 사무실에는 절반도 못되는 직원들이 망연 자실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지난 19일 기자가 방문한, 서울 남영동 해태제과 본사의 분위기다.

여기서 지하철로 두 정거장 거리에 있는 한일그룹 본사. 해태그룹보다는 나은 편이었지만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한 직원은 “한 달 동안 만나야 할 사람들을 오늘 다 만났다”라며 웃었다. 한일합섬을 포함해 4개 사가 한꺼번에 퇴출 대상에 선정되자 협력 업체 관계자들이 대거 몰려들었던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회사를 살려 보자고 말했지만, 사실 나도 무엇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그는 허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지난 18일 금융감독위원회(금감위)가 55개 퇴출 기업 명단을 발표한 뒤, ‘살생부’에 오른 기업의 분위기는 초상집 같았다. 은행 별로 대출금이 50억원 이상 되는 업체들 가운데, 도저히 회생할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판명난 곳이 1차로 도마에 올랐다. 그 가운데 총자본 규모가 1조원을 넘는 대기업은 해태제과와 한일합섬뿐이었다. 5대 그룹 계열사도 20개나 포함되었지만, 이들 가운데 상장사는 현대리바트가 유일했다. 나머지 회사들은 업계 관계자들조차 모를 정도로 조그만 회사들이었다. 살생부 명단에 오른 5대 그룹 계열사가 ‘생색용’이라는 비판이 터져나오는 것은 그 때문이다.

퇴출 기업 선정 원칙이 불분명했다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당초 금감위는 개별 기업의 수익성·현금 흐름·미래 가치를 두루 따져서 선정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선정 결과를 보면 칼자루를 쥔 은행들이 기업의 실질 가치보다는 여신 규모와 담보 가액을 먼저 고려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선정 원칙 불분명…외국 언론·투자가 냉담

대표적인 사례가 해태제과와 대한중석이다. 기업 내용을 보면 해태제과보다도 해태중공업이 더 열악했다. 그런데도 퇴출 기업 명단에는 해태중공업이 빠지고 해태제과가 들어갔다.

더구나 종금사를 포함한 제2 금융권은 해태제과에 5천억원에 이르는 대출금을 출자 전환해 줄 방침이었다. 담보 없이 돈을 빌려준 종금사가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는 방법은 가능한 한 기업을 정상화시킨 뒤 대출금을 회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복안은 은행권의 일방적인 결정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대한중석을 퇴출 기업 명부에 집어넣은 것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대한중석은 순익을 6억원 냈지만, 거평과 거평패션은 둘 다 2년 연속 적자에 자본금마저 잠식한 상태이다. 그런데도 퇴출하는 기업은 대한중석으로 결정되었다. 퇴출 기업 선정의 엄밀한 원칙이 무너졌다고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것이다.

금감위 발표에 대해 외국 언론과 외국인 투자가들은 등을 돌렸다. 우선 한보·기아 등 한국을 수렁에 빠뜨린 대기업 처리 방안이 빠져 있고, 구조 조정의 표적으로 떠오른 삼성자동차에 대한 처리를 미루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월 스트리트 저널>은 ‘이번 발표는 대부분 시장 관계자들에게서 충분치 못하다는 불만을 샀다’라고 비판했고, 일본의 주요 언론은 아예 금감위 발표를 보도조차 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번 발표는 구조 조정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다는 상징적인 의미에 만족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헌재 금감위 위원장은 이번 조처가 시작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앞으로 공정거래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5대 그룹을 포함해 기업 구조 조정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것이라는 것이다. 금감위가 제시한 일정표를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7월15일까지 은행들은 6∼64대 그룹 가운데 16개 기업을 선정하고, 기타 대기업 및 중견 기업 80개를 선정해 구조 조정을 단행할 예정이다. 이 과정에서 재무 구조가 취약한 일부 그룹은 해체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5대 그룹 계열사에 대해서도 강도 높게 구조 조정을 할 예정이다. 공정거래위원회가 7월 말까지 5대 그룹 전 계열사에 대해 부당 내부 거래 사실을 조사한 뒤 그룹 계열사의 지원이 없으면 도저히 살아날 수 없다고 판단되는 부실 기업을 선별할 방침이다. 은행은 대기업과 재무 약정을 다시 체결하고, 빅딜을 거부하는 업체에 대해서는 여신 중단 등 강력한 조처를 취할 예정이다. 따라서 8월에는 5대 그룹 계열사 가운데 자생력 없는 업체들이 강제 퇴출될 것이다.

일단 퇴출 업체로 결정되면 신규 대출이 중단되고, 만기가 도래한 어음의 연장이 중단된다. 어음 발행도 불가능하다. 은행권은 만기가 도래하지 않은 대출을 조기에 회수하지 않겠다고 밝히고 있지만, 담보를 갖고 있지 않은 제2 금융권이 여신 회수에 나설 것이기 때문에, 퇴출 기업 부도는 시간 문제일 뿐이다.
정부 최대 과제는 실업 최소화

퇴출 기업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지는 주거래 은행과 기업이 만나서 결정할 일이다. 기업체들이 가장 선호하는 방식은 그룹내 다른 계열사에 흡수 합병되는 것이다. 현대그룹이 3개 계열사만 흡수 합병하고, 현대중기산업을 종업원 주주회사로 독립시키겠다고 발표하자 현대중기 노조가 합병해 달라고 요구하고 나선 것을 보아도 그 점은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모그룹이 건재할 경우에나 택할 수 있는 방법이다. 한일그룹이나 해태그룹처럼 모기업마저 퇴출 대상에 포함된 경우에는 제3자 인수나 자산 매각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일단 퇴출 기업으로 분류되면 기업 가치가 ‘껌값’으로 떨어진다는 점이다. 해태그룹 관계자들이 반발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해태측은 지난해 11월 부도가 난 뒤 해태제과만은 어떻게든 살려 보려고 유통·전자를 해외에 매각하기 위한 협상을 추진했고, 지금 최종 성사 단계에 와 있다. 그런데 갑자기 퇴출 기업으로 분류되어 제값을 받기가 어려워졌다.

하지만 이같은 문제점들은 하청 업체들이 받을 타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번에 퇴출 기업으로 판정 난 55개 기업에 납품하는 중소 협력 업체는 모두 1만5천여 개이다. 한 업체당 3백 개 가까이 되는 셈이다. 이들은 거래 대금으로 받은 어음을 할인할 수 없고, 외상 매출금마저 회수할 수 없다. 연쇄 도산할 공산이 커 대량 실업 사태가 불을 보듯 뻔한 것이다. 현재 55개 업체의 종업원은 3만명 정도. 여기에 하청 업체 종사자들까지 합치면 수십만명이 일자리를 잃고 길거리로 나앉을 수 있다.

이를 막기 위해 정부가 내놓은 방안은 한마디로 돈을 풀겠다는 것이다. 하청 업체들의 자금난을 덜어 주기 위해 대출금과 어음 만기를 연장하고, 퇴출 기업이 발행한 어음을 갖고 있을 경우에는 어음을 대출금으로 전환해 주도록 은행권에 지시했다. 또 12조5천억원 규모의 중소기업 특별 대출 지원을 최대한 앞당겨 집행하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이 처방에는 한계가 있다. 기업체는 부채 비율을 200% 이하로 낮추어야 하고, 은행은 국제결제은행(BIS) 자기 자본 비율 8%를 맞추는 것이 발등의 불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돈을 푼다고 중소 업체의 자금난이 해소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억울하게 쓰러지는 기업체가 적지 않을 것이고, 동시에 길거리로 나앉는 사람도 다수 발생할 것이다. 그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구조 조정을 단행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가 정부 몫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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