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 오르막이냐 내리막이냐
  • 장영희 기자 (ijazz@e-sisa.co.kr)
  • 승인 2000.08.31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일부 경제학자, "정상 지나 하산길" ··· 정부 · 통계청, "능선에서 숨고르기 중"
한국 경제는 어디쯤 서 있을까. 산 정상에 도달한 후 내려가고 있을까, 아니면 능선 어딘가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것일까. 경제의 큰 흐름을 파악하는 이른바 ‘경기 논쟁’이 지난달에 이어 8월 들어서도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최근 경기 논쟁을 재연시킨 것은 7월 말 통계청이 발표한 6월중 산업활동 동향. 6월중 산업 생산과 출하 증가율, 도소매 판매 신장률 따위 현재 경기 상황을 보여주는 지표들이 5월에 비해 일제히 떨어진 것이다. 기세가 꺾였던 경기 비관론자들은 다시 힘을 얻어 경기가 이미 1/4분기에 정점에 도달했거나 조만간 정점을 지나 수축기에 접어들 것이라는 견해를 내놓기 시작했다.

경기 비관론자들이 정점을 지났거나 임박했다고 보는 근거는 두 가지. 이들은 6월중 산업생산 증가율이 17.9%로 5월(20.1%)보다 낮아진 것도 그렇지만, 최대 호황 업종인 반도체를 빼면 증가율이 한자릿수(9.6%)로 뚝 떨어진다는 사실을 주목한다. 이른바 ‘반도체 착시’ 현상이 경제 상황을 실제보다 좋게 보이게 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경기가 양극화하는 징후는 뚜렷하다. 반도체와 정보통신 관련 일부 업종은 호황을 구가하고 있지만, 건설·기계 장비·화학 업종은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LG투자증권 임송학 연구원은 “경기 주도 업종의 경우 출하가 줄어들고 재고가 늘어나는 이른바 ‘재고 누적 국면’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경기가 1/4분기 중에 정점에 도달했거나 늦어도 3/4분기 중에 정점을 지나 수축기에 접어들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올 1/4분기가 이번 순환기의 정점일 가능성은 경제성장률로도 설명할 수 있다. 경기 정점은 통상 경제성장률이 가장 높았을 때 찾아왔기 때문이다. 올 1/4분기 성장률은 12.8%로 경제 위기 이후 1998년 푹 꺼졌던 경제가 ‘V자’를 그리며 힘차게 치고 올라왔다(1998년 성장률 마이너스 5.8%). 그런데 앞으로 성장률이 떨어지리라는 데에는 별 이견이 없다. 이미 올 2/4분기 성장률이 9.5%(추정치)로 떨어졌으며 올 하반기에는 6%대로 더 떨어질 것으로 경제 전망 기관들은 예측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앞으로 경기 상황을 예측케 해주는 선행지수(전년 동월비)가 지난해 9월 이후 10개월째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통상 선행지수가 정점을 보인 후 현실(동행지수 순환변동치)에서 정점이 나타나기까지는 8∼14개월이 걸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올 5∼11월에 정점에 도달했(한)다는 얘기다. 동행지수 순환변동치(동행지수에서 계절성이나 불규칙 요인 등을 제거한 수치)가 올 2월 이후 하락세를 계속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경기 변동이 경제의 특정 부문에서 시작해 점차 전체로 확산·파급되는 과정을 파악하는 지표인 경기확산지수(DI)의 움직임도 경기비관론자들에게는 좋은 근거가 된다. 경기확산지수는 경기의 진폭이나 속도는 파악할 수 없지만 변화의 방향과 국면, 전환점을 판단하고 경기 변동을 단기 예측하기에는 유용한 지표이다. 1999년 10월 100을 보였던 경기확산지수는 올 4월 이후 기준선인 50 이하로 떨어졌다(5,6월 20). 경기가 하강 국면으로 접어들었다고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런 경기 비관론자들의 주장을 통계청이나 재경부, 일부 경제학자들은 일축하고 있다. 통계청 박화수 경제통계국장은 성장세가 둔화한 것은 사실이지만, 정점을 지났다고 볼 확실한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무엇보다 생산·소비·투자 등 실물 지표들이 견고한 상승세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통계청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는 것은 틀림없다. 6월중 제조업 평균 가동률(81.9%)은 지난해 초 이래로 가장 높은 수준을 보이고 있다. 산업 생산이나 도소매 판매 역시 5월보다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예전의 경기 상승기 수준을 보이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 홍순영 연구위원은 “제조업 가동률 등을 보면 우리 경제의 성장 능력이 한계에 도달했다고 볼 수 없으며, 무엇보다 인플레 압력이 현재화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정점을 지났다고 볼 수 없다”라고 지적했다. 동행지수순환변동치가 5월보다 0.4포인트 상승해 1월 이후 다섯 달 만에 처음 상승세로 돌아섰으며, 선행지수 하락 폭이 5월보다 줄어들었다는 점도 경기가 수축기에 접어들었다는 주장을 위협하고 있다.

10개월째 줄곧 떨어지고 있는 선행지수를 해석하는 것에도 주의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선행지수 전년 동월비는 1999년 8월 최고점(21.1%)에 도달한 이후 그 증가세가 둔해져 지난 6월 3.8%를 기록했다. 이 수치가 예년 경기가 확장기일 때보다 낮은 수준인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금융연구원 정한영 연구위원은 “선행지수가 갖고 있는 한계로 인해 현재의 경기 상황을 잘못 판단할 가능성이 높다”라고 주장했다. 한계란 수출신용장 내도액, 총유동성(M3)같이 앞으로 일어날 경제 현상을 미리 알려주는 열 가지 지표를 종합한 선행지수가 서비스업이나 금융 부문의 변화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해 예고 지표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경제 회복후 재고가 빠르게 늘어남으로써 재고순환지표(출하 증가율에서 재고 증가율을 뺀 것)가 선행지수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도 문제가 된다. 즉 이런 현상이 정점이 도래하는 시기를 앞당겨 보게 한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현재의 경기 국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성장세가 둔해지고 있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재정경제부 한성택 경제정책국장은 “최근 일부 경기 지표가 지난 1/4분기중 정점에 도달했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지만, 이는 경기 순환 과정의 소(小)정점으로 판단된다”라고 밝혔다. 현재의 국면이 대(大)순환기 상의 ‘조정기’라는 것으로, 박화수 국장의 표현을 빌리면 ‘산 정상을 바라보면서 능선에서 숨을 고르고 있는 중’이라는 얘기다. 정부는 조정 국면을 거친 후 내년 초부터 경기 지표들이 다시 상승세로 돌아서 내년 3/4분기께 정점에 도달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디지털 경제’ 등장후 경기 사이클 변동할 듯

1970년대 이후 한국 경제는 경기 사이클을 여섯 번 경험했다. 현재 국면은 1998년 8월을 저점으로 한 일곱 번째 사이클. 여섯 번의 사이클에서 저점에서 다시 저점을 기록하기까지 걸린 기간은 평균 53개월. 저점에서 정점까지의 확장기(호황)가 34개월, 정점에서 저점까지의 수축기(불황)는 19개월이었다. 이런 과거의 경험칙으로 볼 때 올 1/4분기가 정점이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확장기가 불과 20개월도 안되기 때문이다. 이번 순환기에서 동행지수 순환변동치의 최고 기록이 99.2(올 1월)로 추세점인 100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도 조기 정점 주장의 신뢰성을 떨어뜨린다. 1980년 이후 정점일 때의 동행지수는 104 안팎이었다. 경제 위기를 겪은 직후에 찾아온 것인 만큼 이번 순환기는 우리 경제에 급격한 충격을 주었던 1,2차 석유 파동 때의 상황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석유 파동 때는 동행지수가 7개월 연속 하락하다가 다시 상승세로 반전했다.

어쨌든 현재로서는 아직 경기 정점이 도래하지 않았다는 견해가 우세하다.그러나 정점 논쟁보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이번 경기 사이클이 과거의 경기 순환기 때와는 근본적으로 달라질 수도 있다는 점이다(홍순영 위원). 세계 경제가 디지털화로 급격히 옮아가고 있어 경기 사이클 자체가 구조적 변동을 겪을 것이기 때문이다.

무려 1백13개월째 호황을 구가하고 있는 미국 경제가 좋은 예. 확장과 수축을 반복하는 전통 경제학적 경기 순환이 미국 경제에서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1854∼1990년 미국의 경기 확장기는 우리와 비슷한 평균 35개월에 그쳤다. 3배를 웃도는 긴 호황을 누리는 미국 경제 상황은 신(新)경제가 출현했다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다수 견해다. 정보통신기술(IT) 발달에 따른 경제 구조 변화라는 의미로 광범위하게 사용하는 신경제는, 한마디로 최소 비용으로 최고 효율을 내는 경제를 뜻한다.

미국이 완만한 조정 속에 끊임없이 성장 가능한 경제 체제로 바뀐 비결은 1980년대에 10여 년간 뼈를 깎는 구조 조정 노력과 정보 기술을 통해 생산성을 향상시킨 데 있다. 이런 미국의 경험이 시사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아닌 호황을 오래 구가하기 위해서라도 기업·금융 구조 조정을 제대로 신속하게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