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제3의 길'' 가능한가
  • 成耆英 기자 ()
  • 승인 1998.10.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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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정부의 민주주의·시장 경제 병행 발전, 노동시장 대타협 여부가 열쇠
영국 야당·언론, 정책 실패 지적하며 ‘제3의 길’ 공격

‘블레어리즘’의 설계자인 앤서니 기든스 교수는 지난해 5월 실시된 영국 총선을 앞두고 당시 야당이던 노동당의 승리를 예견했다. 블레어가 노동당의 개혁과 체질 개선을 주도하며 ‘좌도 우도 아닌 급진 중도’와, 국가와 개인의 역할을 조화시키는 ‘정치 통합’이념에 입각한 제3의 정치 모델을 내놓을 것이라는 대담한 예고였다.

탈냉전 뒤 영국에서 우파와 좌파를 뛰어넘는 중도좌파 및 신좌파의 조류를 예상하면서 이념적 물꼬를 튼 실마리는, 기든스 교수가 94년 케임브리지 대학에 재직할 때 발간한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 급진 정치학의 미래>에서 비롯된다. 기든스 교수의 제자 또는 사도로 일컬어지는 블레어 총리는 지난 5월 기든스 교수를 주축으로 학자 40여 명을 초청해, 다우닝가 10번지에서 ‘제3의 길’에 관한 원탁 토론회를 열었다. 그런데도 정작 영국 국민과 언론의 제3의 길에 대한 반응은 의외로 저조하다.

‘제3의 길은 과연 있기나 한가?’ ‘제3의 길은 실체가 모호한, 손에 잡히지 않는 허상이다.’ ‘블레어리즘이 대처리즘의 변형된 아류였던 것처럼, 블레어의 제3의 길 역시 이데올로기 이전의 가치에 토대를 둔 하위 개념, 또는 아직 익지 않은 이념의 풋열매일 뿐이다.’ 블레어의 제3의 길 팜플렛 발간에 이어 열린 여야 전당대회를 전후해서 지난 수주일 동안 제3의 길에 쏟아진 언론과 야당의 비판 및 공격이다.

정론지 <더 타임스>의 저명 칼럼니스트 사이먼 젠킨스도 “블레어의 제3의 길은 일부 부동표 유권자 그룹을 겨냥한 심령술과도 같은 비실제적인 것이다”라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노동당내 정통 좌파도 비판

또 다른 비판론자들은 제3의 길이 새 노동당이 우경화로 표류하거나 침몰하는 것을 막기 위한 지적 안전판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안전판이 빠질 경우 메이저 보수당 정권이 실패했던 ‘근본 가치로의 복귀(Back to Basics)’ 캠페인과 같은 운명에 처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이번 노동당 전당대회 전국집행위원회(NEC) 위원 선출 과정에서 강경 좌파 성향의 풀뿌리연맹이 6석 가운데 무려 4석을 차지한 것은, ‘블레어 혁명’에 대한 당내 정통 좌파 세력의 불만과 견제 심리가 드러난 것이다.

집권 뒤 17개월, 처음으로 노동당과 블레어 총리에 대한 국민의 지지가 60% 이하로 떨어지면서 제3의 길을 바탕으로 추진해 온 정책들 가운데 특히 복지·의료보험·교육 정책의 부진과 실패를 지적하는 언론의 비판도 높아간다. 이에 힘입어 야당인 보수당의 헤이그 당수는 10월 초 전당대회 연설을 통해 노동당의 실정과 블레어의 제3의 길을 집중 공격했다.

“새 노동당이 밟고 있는 제3의 길은 닥치는 대로 발을 내딛는 방향 없는 길이다. 블레어는, 그가 모든 것을 믿지 않는다는 비난에 대해 오히려 자신이 모든 것을 믿는다고 변명함으로써 그 궁지를 모면하려고 한다.”

헤이그는 제3의 길이 태어날 때부터 안고 있는 모호성과 혼합성, 그리고 비실체성을 크게 부각하면서 이번 전당대회를 계기로 보수당의 전통적 보수주의 가치를 내세워 제3의 길에 대항하고자 한다. ‘작은 정부에 큰 시민’으로 설정한 이른바 영국의 길(British Way)이 그것이다.

이에 따라 여야 두 당의 정책·이념 대결은 의회의 새 회기가 시작되는 이번 주부터 웨스터민스터에서 성장 대 안정, 자유시장 경제 확대 대 사회 정의를 둘러싸고 ‘제3의 길’과 ‘영국의 길’ 간의 공방전으로 본격화할 전망이다. 이 와중에서 전세계적인 불황 및 공황으로 영국 경제가 극도로 침체할 경우, 이미 인기가 하향세에 접어든 블레어 정부는 새로운 사회 민주주의 노선으로 닦아가고 있는 제3의 길을 정립하는 데 적지 않이 시련을 겪을 것으로 전망된다.

중도 노선으로서의 제3의 길은 그 다양한 호칭에서도 드러나듯 개념 자체가 아직 명확하게 정리된 것이 아니다. 비록 지난 9월 뉴욕 세미나 같은 모임을 통해, 그 이념을 담는 그릇으로서 수사법상 명칭은 차츰 통일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정치철학으로서 정립되거나 지구촌의 새로운 발전 모델, 또는 제3의 대안으로 안착하리라고 전망하기에는 아직 이른 것 같다.

런던·韓准燁 편집위원
김대중 정부 들어 처음으로 맞닥뜨린 초대형 노사 분규였던 현대자동차 사태. 파국 일보 직전에 수습된 이 사태의 전개 과정에서 드러난 여론의 반응은 몇 년 전과 비교한다면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동안 지하철·철도·조선 등 대규모 사업장에서 분규가 일어날 때마다 정치권은 여당이고 야당이고를 떠나서 중재 역할을 떠맡고 나서기 일쑤였다. 그리고 중재에 성공하면 여론의 찬사가, 실패하면 정치권의 무능함에 대한 질타가 으레 따라붙었다.

그러나 한국 경제가 국제통화기금(IMF) 관리 체제로 들어선 뒤 상황은 180도 바뀌었다. 여당 중진부터 노동부장관과 노사정위원회 위원들까지 우르르 울산으로 몰려가 막판 중재에 성공했지만, 찬사는커녕 정부가 공연히 개입해 외국 투자자들의 신뢰만 떨어뜨렸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과거에는 정부의 중재에 노조가 반발했지만 재계가 집단으로 반발하고 나서는 ‘기현상’도 발생했다.

이런 아이러니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권이 바뀌었다는 단순한 사실보다, 한국 경제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 한국 경제는 현재 정부 주도형 압축 성장으로 인해 왜곡된 시장의 불합리성을 하나씩 걷어내는 동시에, 구조 조정 과정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는 실업자에 대한 대책도 함께 세워야 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좌파­우파 간의 논의 이제 그만둬야”

얼마 전 한국을 찾은 영국의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 교수가 내세운 ‘제3의 길’ 이론이 한국의 지식인 사회에 큰 논쟁거리가 된 것은 제3의 길을 통해 한국 사회가 현재의 딜레마에서 빠져나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서였다. 그는 김대통령이 내세운 노사 대타협과, 정부와 시민운동을 묶는 ‘제2 건국 운동’에 관심을 표시하기도 했다. 물론 제3의 길은 아직 우리에게는 ‘가지 않은 길’일 뿐이다. 그러나 한국은 지금 사회학 교과서에서가 아니라 현실에서 매일같이 제3의 길에 대한 임상 실험을 거치고 있다.

제3의 길은 늘 ‘대안적 모델’을 꿈꾸는 사회과학자들에게 매력적인 주제임에 틀림이 없다. 기든스 교수의 제3의 길 이론은 토니 블레어 영국 노동당 정부가 내세우는 모든 정책의 이론적 기반이다. 그는 좌파와 우파식 이분법을 뛰어넘는 새로운 사회민주주의 모델을 제안한다. 시장 만능주의의 폐해를 지적하면서도 그것이 가진 합리성과 부 창출 기능에 주목한다. 그동안 비주류 학계의 핵심 과제인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시장의 효율성을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보자면 실용적인 사회민주주의라 할 만하다(최근 그가 펴낸 <제3의 길>은 ‘사회민주주의의 쇄신’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또 민족국가와 세계주의가 결합한 코스모폴리턴 국가를 제안한다. 유럽연합(EU) 출범은 바로 그가 말한 제3의 길의 모델이라 할 만하다(74쪽 인터뷰 참조).

김대중 정부가 집권에 성공한 뒤 내세운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 병행 발전’이라는 과제도 제3의 길이라는 시각에서 평가해 볼 만하다. 사회과학계에서 김대중 정부가 표방한 이런 정책이 한국판 제3의 길이 될 수 있다는 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별로 없다.

물론 한국판 제3의 길이 제대로 시행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94년 기든스 교수의 저서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급진 정치학의 미래>를 번역 출간한 아태재단 김현옥 박사는, 계급론적 인식 체계에서 벗어나야만 제3의 길이 열릴 수 있다고 강조한다.

“80년대 사회과학계를 지배하다시피 했던 계급 문제는 사회과학의 모든 문제를 포괄하는 영역이 아니라 ‘또 하나의’ 영역일 뿐이다. 그동안 지루하게 계속되어 온 좌파 - 우파 간의 논의는 생태주의·노인 문제·과학 기술 등 새롭게 등장하는 다양한 문제를 모두 놓치고 있다.”

군부 정권에 의한 권위주의 통치가 막을 내린 뒤 새로운 발전 모델이 제시된 것이 물론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과거 김영삼 정부의 개혁 정책 역시 사회과학 진영에 하나의 논쟁거리를 제공한 것이 분명했다. 기존 여권과 연합해 집권한 김영삼 대통령은 정권 창출의 뿌리라 할 만한 구 여권 세력을 법으로 단죄하면서 개혁 일변도 정책을 유지했기 때문에, 여야 정권 교체 경험이 전무한 한국에서 또 하나의 모델로 분석해 볼 만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런 논의는 대선 당시 YS 캠프에 참여했던 몇몇 학자들의 희망 사항으로 그치고 말았다. YS 방식이 제도 개혁보다는 인물 교체에 치중했던 만큼 ‘호랑이 굴에 들어가 호랑이를 잡는 것이 아닌가’ 했던 그의 과거 청산 방식이 자신의 승부사적 기질을 대내외에 과시한 ‘정치적’ 행위 이상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문민 정부가 내걸었던 개혁 구호 역시 신한국·신경제와 같은 다소 추상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구호보다도 정작 중요한 문제는 임기말이 가까워올수록 하나씩하나씩 무너져 내리고 있었던 경제 위기의 조짐을 전혀 읽어내지 못했다는 데 있었다. 노동 시장 유연화·금융 개혁·공공 부문 민영화와 같은 최근의 주요 개혁 과제들은 IMF 사태가 터진 뒤 외부에 의해 강요된 것만은 아니다.

‘DJ 개혁’ 성공 여부 빠르면 내년 상반기 판가름

김호기 교수(연세대·사회학)는 “최근 한국 사회를 실업 사태의 소용돌이로 몰아넣고 있는 정리 해고 문제만 해도 국제통화기금 관리 체제로 들어서면서 갑자기 튀어나온 문제가 아니다. 금융·건설·서비스 등 사회 전분야에 걸쳐 과잉 공급 상태이던 노동 시장에 대한 적절한 구조 조정이 필요했었는데, YS 정부가 이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라고 지적했다.

여기에 비한다면 김대중 정권에게 출범 당시부터 주어졌던 개혁 과제는 너무나 분명했다. 대통령 선거 운동이 본격화할 무렵 IMF 관리 체제로 들어섰으므로 한국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무엇을 어떻게 바꿔야 살아 남을 수 있는지를 너무나 잘 알았던 것이다. 이 상황에서 정권을 인수한 신정부는 국제통화기금이 들이민 ‘시장 경제’라는 모범 답안에 한 가지 과제를 추가해 적어 넣었다. 민주주의라는 구호였다.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 모든 관심의 초점은 경제 개혁이었고, 김대중 대통령 역시 ‘경제’를 당선의 키 포인트로 삼았기 때문에,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 다음날 아침 기자회견에서부터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 민주주의라는 구호는 많은 사람에게 의외로 받아들여졌다.

게다가 이런 주제는 이론적으로 보더라도 웬만큼 정교하게 논리를 다듬지 않으면 양립하기 어려운 것이다. 현실에서는 더더구나 화학적으로 합치기 어려운 주제임이 분명하다.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하는 시장 경제와, 개인의 무절제한 자유가 야기하는 혼란과 갈등을 적절하게 통제하고 조화시켜야 하는 민주주의는 애초부터 접점을 찾기가 어려운 과제였던 것이다.

실제 노동 시장 내부를 들여다보면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가 충돌하는 지점은 곳곳에 널려 있다. 문민 정부 시절부터 지위가 격상된 중앙노동위원회에서 부당 노동 행위 판정을 받은 기업주들이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는 ‘반민주주의적’ 상황에서도 시장 경제 정착을 위한 구조 조정과 정리 해고는 꾸준히 진행되어 왔다.

노사가 거칠게 대립하기만 하던 한국 사회에서 최초의 코포라티즘(노사협력주의) 모델이라고 평가받는 노사정위원회도 삐걱거리기는 마찬가지이다. 정리 해고 법제화에 힘겹게 합의하면서 그나마 1기 노사정위원회가 제3의 길을 위한 최소한의 기반을 다졌다면, 총론에서 각론으로 주제를 옮긴 2기 노사정위원회는 눈에 띄는 성과를 아무 것도 내놓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다.

시민 사회의 발전 모델을 꾸준히 연구해 온 김호기 교수도 “국제 경쟁력을 높이면서 사회적 약자도 보호할 수 있는 뾰족한 방안은 아직 없는 것 같다”라는 고백을 숨기지 않았다.

한국이 제3의 길로 순항하기 위해서는 노동 시장의 대타협이 필수이다. 얼마 전 소장 학자들이 주도해 개최한 비판사회학 대회에서 ‘한국 경제의 위기와 대안적 발전 모델’이라는 주제 발표를 한 김형기 교수(경북대·경제학)는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덕목으로 △공평성 △효율성 △유연성을 들었다. 재벌 기업과 전투적 노동조합들이 더 갈등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면서 노사간 타협을 강조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영 방식뿐만 아니라 노동운동 방식도 대전환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김교수의 주장이다.

이런 대타협 방식을 통한 제3의 길이 성공할지 여부는 빠르면 내년 상반기, 늦어도 김대통령 집권 중반기까지는 판가름 날 전망이다. 현정부 핵심 브레인인 최장집 교수(고려대·정치학)도 “내년 초쯤에는 개혁에 대한 중간 평가가 진행될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제3의 길은 한국뿐만 아니라 신좌파 열풍이 불고 있는 유럽에서도 커다란 관심을 끌고 있다. 세계 각지에서 제3의 길을 향한 실험이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불고 있는 제3의 길 열풍은 이론이 아닌 현실에서 포스트 IMF 시대의 미래를 가늠하는 시금석이라는 점에서 더 큰 관심을 끌고 있다. 21세기로 넘어가는 불안한 건널목 가운데에 서 있는 한국호(號)가 순항하느냐 좌초하느냐는 여기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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