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그룹"봉고 신화여 다시 한번"
  • 朴在權 기자 ()
  • 승인 1997.07.31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생사 갈림길 선 기아그룹 패인 분석/세 주력 기업 경영 부실에 각종 소문이 위기 내몰아
끝내 침몰할 것인가, 아니면 기적적으로 기사 회생할 것인가. 기아그룹의 운명에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28개 계열사에 직원 5만5천명. 96년 자동차 수출 30억달러. 재계 순위 8위의 기아그룹이 창사 53년 만에 최대 위기에 봉착해 있다. 지난 7월15일 기아그룹의 주거래 은행인 제일은행은 기아그룹 18개 계열사에 부도유예협약을 적용한다고 발표했다.

기아그룹이 ‘사실상의 부도 사태’에 직면하자 가장 크게 타격을 받은 것은 기아자동차(아세아자동차 포함)에 부품을 납품하는 1만7천여 영세 협력 업체들이다. 실제로 협력 업체들의 부도가 잇달아 전체 자동차업계로 여파가 확대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들 중에는 기아뿐 아니라 현대·대우·쌍용에 동시 납품하는 업체가 5백82개나 된다. 뿐만 아니라 3/4분기에 바닥을 치고 회복할 것으로 보이던 국내 경기가 다시 불투명하게 되었으며, 종합주가지수도 8백선 돌파를 눈앞에 두고 7백30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더 심각한 것은 금융 시장의 불안이다. 이번 기아 사태는 연초 한보·삼미 그룹의 부도나 진로·대농의 부도 유예 사태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상황이 심각하다. 그 때문에 안정을 되찾던 자금 시장이 동요하고, 상품 수출 및 외자 도입에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최악의 경우 한국 경제는 기아 사태를 계기로 파국적 상황을 맞을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소유 분산이 잘 이루어져 있고 전문 경영인 체제가 잘 갖추어져 있는 ‘모범 기업’ 기아가 어쩌다가 이런 위기를 맞게 되었을까. 기아 직원들은 한결같이 삼성그룹을 비난하고 있다. 장기 불황으로 자동차 내수가 줄어든 상황에서, 5월 하순 삼성자동차의 보고서가 언론에 공개돼 가뜩이나 어려운 자금 사정을 더 심각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당시 삼성 보고서는 국내 자동차 업계의 과잉 투자 문제를 지적하고 구조 조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기아자동차와 쌍용자동차는 2000년대에 도태하고 말 것이라고 결론 지어 물의를 빚었다. 기아그룹이 각종 루머와 인수설에 휘말린 것이 이때부터이다. 기아그룹 자금부의 한 관계자는 “지난 5월부터 금융기관이 회수해 간 여신 규모가 1조원이나 된다. 이런 상태에서는 어떤 기업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렇다고 이번 사태의 책임을 전부 외부 요인에 떠넘길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사태가 이렇게 된 근본 원인은 취약한 그룹 경영에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이 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기아특수강·아시아자동차·기산의 경영 부실이다. 지난해 당기 순이익을 보면, 기아특수강은 8백95억원 적자, 아시아자동차는 2백94억 적자, 기산은 67억 적자를 기록했다. 이들 3개 사의 적자액은 그룹 전체 적자(1천2백91억원)의 97.3%나 된다. 비록 기아자동차가 70억원의 흑자를 기록했지만, 덩지 큰 3대 계열사의 경영 부실에 발목을 잡힌 것이다. 지난 7월16일 임창렬 통상산업부 장관이 “기아자동차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라고 밝힌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3대 계열사 가운데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기아특수강이다. 기아특수강의 전신은 37년에 설립된 대한중기. 기아는 86년 이 회사를 인수한 뒤 특수강 사업에 엄청난 돈을 쏟아부었다. 91년부터 올해 4월까지 계속된 군산공장 3단계 공사에 투입된 돈은 모두 9천8백10억원. 이 돈을 모두 부채로 충당했기 때문에 1년에 1천억원이 넘는 이자를 물어야 했다.
특수강 수요 예측 완전히 빗나가

기아가 무리하게 투자를 강행한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80년대 말부터 자동차 산업이 호황을 누리자 특수강 수요가 급증하리라고 내다본 것이다. 그러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92년을 정점으로 특수강 수요가 줄어들면서 공급 과잉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96년 말 현재 국내 업계의 생산 능력은 1백80만t인데, 수요는 1백5만t에 불과해 75만t이 남아 돌았다. 그 때문에 가격이 떨어지고, 공장 가동률도 50%대로 뚝 떨어졌다. 제품의 판매 대금으로 은행 이자도 갚지 못할 정도로 상황이 악화되었다.

다음으로 문제되는 것이 아시아자동차이다. 65년 창립된 이 회사를 기아가 인수한 것이 76년. 대형 트럭·버스·지프 등 상용차를 연간 20만대 생산하는 아시아자동차는 불황의 골이 깊어지면서 적자로 돌아섰다. 임금과 부품 등 제조 원가는 해마다 뛰는데, 자동차 판매 가격은 업체간 과당 경쟁으로 거의 제자리 걸음을 계속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내수 부진까지 겹쳐 상황을 악화시켰다.

무리한 투자도 부실을 재촉했다. 아시아자동차는 90년대 들어 2천5백억원을 들여 경상용차인 타우너와 특장차 생산 라인을 대폭 증설했다. 그런데 이것이 족쇄 구실을 했다. 타우너 수요를 너무 높게 예측했던 것이다. 95년 83억원에 불과하던 아시아자동차의 적자는 지난해 2백94억원으로 3.5배로 늘어났고, 증권거래소에서는 2부로 물러앉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기아에 부담을 안겨준 기업이 (주)기산이다. 이 회사는 자동차 생산에 주력해온 기아그룹에는 어울리지 않는 건설업체이다. 지난해 업계 도급 순위는 32위. 전체 사업 구성을 보면, 건설이 60% 정도를 차지하고, 경상도 지역에서는 기아자동차를 판매하는 역할도 맡고 있다. 기아그룹의 종업원 복지 기금에서 인수한 독특한 내력을 갖고 있는 이 업체는, 95년까지도 흑자를 기록하다가 지난해 처음 67억원의 적자를 냈다. 95년까지 기아그룹의 활발한 시설 확장 공사가 대부분 마무리되자 주택 건설 사업에 진출했는데, 공교롭게도 부동산 경기가 침체하는 바람에 심각한 경영난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4개 주력 업체를 제외한 나머지 계열사들은 규모가 작고, 또 대부분 흑자를 내고 있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다. 결국 기아그룹을 부도 유예 대상으로 몰아넣은 것은 기아특수강·아시아자동차·기산의 경영 부실이고, 그룹의 모기업인 기아자동차가 이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그룹 전체가 위기로 내몰린 것이다. 여기에 삼성 보고서 파문 이후 종금사를 중심으로 한 제2 금융권이 조기에 자금 회수에 나선 것도 자금난을 악화시킨 요인이었다.

부도 유예 조처가 내려진 후 기아의 자금 수요는 평소의 10분의 1 정도로 줄었다. 이제 더 이상 종금사의 여신 회수 압력에는 신경 쓰지 않고 물품 대금 등 진성어음만 결제하면 된다. 그러나 금융권으로부터 추가 자금을 빌릴 수 없기 때문에, 자체 자금만으로는 진성어음을 결제하기가 어려운 상태이다. 이 때문에 협력 업체의 진성어음마저 결제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기아그룹의 한 관계자는 “협력 업체를 부도 위기로 몰아넣는 것이 가장 가슴 아프다”라고 안타까워했다.

과연 기아그룹이 재기할 수 있을까. 기아 직원들은 한결같이 ‘제2의 봉고 신화’를 얘기한다. 80년 신군부가 취한 산업 합리화 조치로 인해 기아가 최대의 위기에 처했던 시절 승합차 봉고를 탄생시켜 그 위기를 극복했던 17년 전의 신화를 재현하자는 것이다.

신차 줄줄이 출시 대기…예정대로 될지는 의문

올해 하반기에 새로 선보이는 7개 차종이 바로 제2의 봉고 신화를 이룰 주역들이다. 가장 먼저 선보이는 것이 세피아 후속 모델 노치백이고, 3/4분기에는 크레도스 왜건, 스포티지 밴, 타이탄 후속 모델, 미니밴 KV-Ⅱ가 줄을 서 있다. 4/4분기에는 세피아 후속 해치백, 크레도스 후속 모델이 잇달아 출시될 예정이다. 그러나 기아특수강과 아시아자동차의 조업이 일부 중단되고, 기아자동차마저 생산이 중단될지 모르는 상황에 봉착한 지금 예정대로 신차를 내놓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지난 7월18일 기아그룹 김선홍 회장은 전 계열사 임직원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제목은 ‘기아의 역전 드라마를 위하여’. 거기에는 ‘우리에게는 절망적인 위기를 물리친 전통이 있고, 국민들은 오뚝이처럼 일어서는 기아의 기적을 보고 싶어한다’며 5만5천여 직원들의 분발과 단결을 촉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과연 그의 열망대로 기아(起亞)라는 이름처럼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인가. 10대 그룹마저 부도 위기에 몰리는 사상 초유의 사태를 바라보는 국민들은 불안하기만 하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