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경제] 아르헨티나 경제 기적의 명암
  • 부에노스아이레스·하주현 (경제 평론가) ()
  • 승인 1997.10.23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7년동안 국내 총생산이 48% 증가했지만 실업률이 17%를 웃돌고 2~14세 어린이 중 2백만 명이 영양결핍에 시달리고 있다.
8년 전까지만 해도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은행 창구 앞에서 오랫동안 줄을 서야 했다. 얼마 되지 않는 월급이지만 엄청난 인플레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달러로 환전해 놓아야 했기 때문이다. 80년대 후반 매년 5000%를 웃도는 인플레에 시달리던 이 나라 국민들은 그 시절의 고충을 ‘경제 내전’이라고 기억한다.

89년에 집권한 카를로스 메넴 정권은 환율을 안정시키려고 대미 환율을 1 대 1로 하는 고정 환율제를 채택해, 이를 중심으로 90년대 초반부터 신경제 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천문학적 수치이던 인플레가 급속도로 진정되었다. 90년에는 1344%, 1년 만인 91년에는 84%로 줄었으며, 96년에는 0.1%로 물가가 안정되었다. 조금 상황이 나빠졌다고는 하지만, 금년 역시 1.5%를 초과하지 않을 전망이다.

인플레, 90년 1344%→96년 0.6%

뿐만 아니라, 아르헨티나 경제의 대부라고 불리는 경제장관 도밍고 카바요가 주도해 90년대 초부터 대대적으로 국영 기업 민영화가 실시되었다. 전기·통신·석유·수자원·광산·고속도로·철도·은행 같은 분야에서 진행된 민영화는 아르헨티나 경제를 현대화했다.

또한 생산성이 향상하고 투기 붐이 일어나 농지 가격이 6년 만에 ha당 1천5백 달러에서 2천5백 달러로 뛰어올랐다. 이 기회를 이용해 미국의 재산가 조지 소로스는 농지 5만 ha와 가축 8만8천 마리를, 미국 CNN 방송 사장 테드 터너와 부인 제인 폰다는 부지 4만4천 ha를 사들이기도 했다. 석유산업 또한 같은 기간에 두 배가 성장했고, 증권 시장은 20개월 전부터 활황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 경제가 황금 시대라고 피부로 느끼는 국민은 극히 드물다. 최근 7년 동안 1인당 국민소득이 36%나 성장했지만 부의 분배는 과거보다 훨씬 불공평해졌기 때문이다. 17%가 넘는 높은 실업률에 시달리는 국가에서 국가 자산의 절반 이상이 국민의 5분의 1에 집중되어 있으며, 1백40만 명이 넘는 실업자는 극빈층으로 집계되고 있다. 2∼14세 어린이 중 2백만 명이 영양 결핍에 시달리고 있다. 또한 학생 수는 거의 두 배로 불어났는데도 교육비 지출은 여전히 국내 총생산의 3%밖에 안된다. 열 달 전부터 수많은 교직자들이 국회 의사당 앞에서 어린이들 모습을 그린 대형 텐트를 치고 교육 예산을 늘려달라고 요구하며 항의 농성을 벌이고 있다.

결국 한때 중남미 최고의 복지 국가로 일컬어지던 아르헨티나는 메넴 정권이 자유주의 정책을 실시함으로써 국내 총생산은 48% 증가를 보였지만, 의료·교육 분야를 중심으로 한 전반적인 사회보장제도는 크게 퇴보한 셈이다. 야당 지도자들도 집권 당시 경제에 최대 걸림돌이던 인플레를 신속하게 억제할 수 있는 신경제 정책이 필요했었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이제는 국민 복지를 고려할 단계가 되었으며, 실업자에 대한 직업 교육 강화와 중소기업 살리기가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다고 지적한다.

그렇지만 예산을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는 정부의 예산 운영 역량은 극히 제한되어 있는 상태다. 지금도 막대한 재정 적자를 만회하기 위해 국제 차관을 1백20억 달러 도입해야 하는 형편인데다, 상환해야 할 외채가 3백억 달러에 이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아르헨티나 정부는 미국의 이자율 변동에 따라 일희일비하게 되었다. 또한 공공 지출을 조금만 늘리려 해도 외국 출자 기관들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형편이다. 은행 창구 앞에 늘어섰던 줄이 사라진 대신 국회의사당 앞에 줄지어 선 농성자들을 보면, ‘경제 기적’이라는 말이 얼마나 로맨틱한 구호인지 실감하게 된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