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그룹 "휴렛팩커드에게 배운다"
  • 李哲鉉 기자 ()
  • 승인 1997.10.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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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그룹, ABB와 함께 벤치마킹 대상으로 선정
지난 9월10일 LG그룹 구본무 회장은 LG정유 판교 수련원에서 전국 사업장의 과장 이상급 사원 1백20명과 대화했다. 대화 분위기가 한참 무르익었을 때 한 사원이 물었다. “우리(LG그룹)는 제너럴 일렉트릭만 벤치마킹 하는가?” 이 질문에 구회장은 “앞으로 휴렛팩커드와 ABB도 벤치마킹하려고 한다”라고 대답했다.

미국 경제 전문지 <인더스트리 위크>가 지난해 매출액을 기준으로 삼아 선정한 세계의 기업 가운데 제너럴 일렉트릭은 6위를 차지했다. 잭 웰치 회장은 81년 회장에 취임해 오늘의 제너럴 일렉트릭 신화를 만들었다. ‘경영자는 파괴자여야 한다’는 소신을 가진 그는, 사양 업종을 깨끗이 정리하고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가진 전자·비행기 엔진·플라스틱 부문을 주력 업종으로 삼아 기업을 재건했다. 이 과정에서 웰치 회장은 해고와 감원을 일삼았고 때로는 공장 전체를 소각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덕분에 그는 ‘중성자 폭탄’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잭 웰치 회장이 취임한 이후 16년 동안에 제너럴 일렉트릭의 매출은 1백20억 달러에서 1천7백억 달러로 13배 이상 늘었고, 순이익도 16억5천만 달러에서 72억8천만 달러로 눈덩이처럼 커졌다. 한 해 순이익이 한국의 웬만한 10대 재벌 매출액과 맞먹는다. 세계 기업을 꿈꾸는 국내 재벌에게 제너럴 일렉트릭의 성장 모델은 매력적이다. 최고 경영자가 그룹 경영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절대적이라는 점도 한국 기업과 비슷하다. 따라서 제너럴 일렉트릭은 국내 대기업들에게 좋은 벤치마킹 대상이 되고 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기업이 LG그룹이다.

해고·감원 대신 직원 창발성 키워 효율 높여

LG그룹은 지난 3년 동안 미국 제너럴 일렉트릭이 가진 독특한 경영 혁신 전략과 조직 운영을 연구해 그룹 경영에 참고했다. 그룹 사장단이 제너럴 일렉트릭 본사를 방문하고, 해마다 직원 2∼3명을 파견 근무시켰다. 비록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LG그룹은 제너럴 일렉트릭과 동남아시아에 합작 진출하려 했다. LG그룹 경영혁신추진본부 조준호 이사는 “제너럴 일렉트릭이 사업 현장에서 보여준 관리 능력과 혁신 활동에 크게 고무받았다”라고 말했다. LG그룹은 지금도 제너럴 일렉트릭과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며 중간관리층을 서로 교류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구회장이 새로운 벤치마킹 대상을 거론한 것은 다소 의외다. 그만큼 지난 3년 동안 국내외 경영 환경이 크게 변하고 있다는 반증일 수 있다. 조준호 이사는 “제너럴 일렉트릭 잭 웰치 회장이 원대한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조직과 인원을 일사불란하게 이끌어간다면, 휴렛팩커드는 직원의 창발성을 크게 고무해 효율을 높이는 회사라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휴렛팩커드는 39년 창립 이후 단 한 사람도 감원하지 않았다. 90년대 컴퓨터 업계가 불황을 겪을 때 세계 최대 컴퓨터 회사 IBM이 임직원 18만명을 해고했으나 휴렛팩커드는 1명도 해고하지 않고도 해마다 20% 이상 성장했다. 휴렛팩커드의 눈부신 성장은 그들이 가진 독특한 기업 문화에 기인한다. 휴렛팩커드에는 회장실을 비롯해 임원실이 따로 없고 임직원 모두가 탁 트인 공간에서 함께 일한다. 자연히 임직원 간에 감정의 골이 없고 대화 시간이 많다. 하지만 부서간 경쟁은 철저하다. 관리자들이 해당 부서 인원을 줄이면서 업무 효율을 높이면 능력 있다는 소리를 듣는다. 84년 이후 800% 성장해 온 휴렛팩커드의 인력이 해마다 1%밖에 늘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ABB도 국내 기업들이 새로이 벤치마킹하는 기업으로 떠오르고 있다. 국내 기업들은 경영 방식을 혁신적으로 바꾸는 리엔지니어링과 함께 세계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국내에서 내로라 하는 기업들이 신규 시장을 개척하거나 싼 노동력을 찾아 세계로 나가고 있다. 해외 진출에 열을 올리는 기업 총수들은 스위스 취리히에 본사를 둔 산업전기업체 ABB를 주목한다. 연간 매출액이 3백63억 달러인 ABB는 1백40개국에 퍼져 있는 현지 법인 천여 개를 매트릭스라는 독특한 구성 방식을 통해 거미줄처럼 연결해 임직원 21만명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다. LG그룹 외에도 동유럽과 아시아를 중심으로 현지 진출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대우그룹이 ABB를 벤치마킹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선진 일류 기업들의 경영 혁신 방안을 그대로 도입한다고 해서 국내 기업들이 곧바로 경영 성과를 거둘 수는 없다. 국가마다 사업 환경이 다른 만큼 국내 기업 문화가 가지는 특수성을 고려해 그에 걸맞는 경영 혁신 방안을 찾는 노력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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