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시평]영어는 더 이상 ‘외국어’ 아니다
  • 梁東彪 (재미 경영 자문가) ()
  • 승인 1995.08.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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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국 기업의 임직원 몇 사람과 함께 멕시코에 출장갈 일이 있었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발효된 이후 멕시코가 한국 기업에게 큰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르던 즈음이었다. 멕시코에 공장을 지어 거기서 생산되는 제품으로 미국 시장에서 경쟁하는 것이 머나먼 한국이나 제3국에서 제품을 수송해 가는 것보다 가격이나 관세 면에서 훨씬 유리할 것이기 때문에 한국 기업들이 멕시코에 많이 몰려들고 있었다.

그런데 일행이 멕시코시티 공항에 내리자마자 맞닥뜨린 문제가 있었다. 말이 안통한다는 것이었다. 우리 쪽에는 스페인어를 하는 사람이 없었고, 멕시코 사람들은 대부분 영어를 하지 못했다. 그래도 손짓발짓해서 택시를 얻어 타고 호텔까지는 갔다. 그러나 다음날 막상 상담을 벌이기 위해 멕시코측 기업인들을 만나고 보니 문제가 자못 심각했다. 양측이 다 짧은 영어로 겨우 의사소통을 하는 상태에서 공장을 세우기 위한 당국의 허가, 금융, 합작 투자에 대한 세무 등 기술적인 내용을 의논하자니 어려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따라서 이러한 전문적 내용에 관해 조언하기 위해 동행했던 필자와, 필자의 멕시코측 상대방이 그 자리에서 통역관으로 변신하여 일일이 양측의 대화를 통역해야 하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결국 1시간이면 될 일이 2~3시간 걸린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상담 당사자들의 욕구 불만이 쌓일 대로 쌓여 끝내 상담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영어는 세계인의 비즈니스 언어…모르면 ‘경제 낙오자’

영어는 전세계인의 비즈니스 언어이다. 세계인의 문화어가 프랑스어이고 과학 용어가 독일어인지는 몰라도 상업 용어는 분명 영어이다. 오늘날 영어를 사용하는 인구는 약 10억 명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들은 거의 매일 컴퓨터나 텔레비전이나 팩시밀리를 통해 영어로 정보를 받거나 보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보다 영어를 외국어로 사용하는 사람이 더 많아졌다. 이 때문에 영어는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고 있다. 종래의 영미식 생활 방식이나 풍속에서 유래한 어휘는 점차 고전처럼 되어 가고 있다. 그 결과 이제 영어는 어느 특정 국가나 문화에 종속된 언어가 아니라 만인에게 속한 언어가 되었다.

영어는 시장을 따라간다. 중국이 죽의 장막을 거두고 자본주의적 경영 방식에 눈을 뜨자마자 자본주의의 상업 용어인 영어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몰려들었다. 옛 소련과 동유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말레이시아도 경제 발전을 이루기 위해 영어 억압 정책을 포기했다. 베트남도 프랑스어를 버리고 영어를 택했다. 유럽연합(EU) 전체 국민 중 55세 이상 노년층은 20%가 영어를 이해하는 반면 10, 20대 젊은층은 83%가 영어를 쓸 줄 안다. 덴마크의 교육장관은, 과거에는 영어가 제1 외국어였지만 지금은 제2 모국어라고 말한다. 소니에 취직하려는 사람이 입사 원서에 구사할 수 있는 외국어를 영어라고 써냈다가, 소니에서 영어는 외국어가 아니라는 핀잔을 받았다는 일화도 있다. 스위스·스웨덴 합작 회사인 다국적 기업 ABB(아시아 브라운 보바리)에서도 공용어는 영어이다. 영어 쓰기를 죽기보다 싫어한다는 프랑스에서도 비즈니스를 위해서는 영어를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파리의 통신 회사 알카텔에 전화하면 교환원이 영어로 응답한다. 프랑스의 AFP통신도 영어로 기사를 쓰고 있다.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영어 때문에 고생하고 있으며, 고생할 기회도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전 같으면 외국인을 상담 장소에서 만나야 비로소 영어 고생이 시작되었으나, 이제는 외국인을 만날 필요도 없이 안방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CNN방송이 나오고 케이블을 통해 수많은 영어 방송이 나온다. 컴퓨터를 가지고 있는 집에는 인터네트를 통해 전세계의 영어 정보가 쏟아져 들어온다. 영어는 마치 거대한 밀물처럼 우리에게 밀어닥치고 있다. 우리는 이를 피할 수도 없고 피해서도 안된다. 국제 사회가 하나의 경제 시장이 되어 가는 지금 영어를 모르는 사람은 귀머거리 혹은 벙어리 신세가 되고 만다.

일본의 다이하츠 자동차가 체코의 프라하에서 생산을 시작하였다. 일본 엔지니어와 체코 엔지니어 들이 영어로 의사 소통을 한다. 현장 취재에서 돌아온 <월 스트리트 저널> 기자는 이들이 쓰는 영어가 ‘잉글리시’가 아니라 ‘체클리시’와 ‘제플리시’라면서, 그것이 이들 사이에 소통될 수 있는 유일한 언어라고 보도했다. 이제 영어는 영미인의 것이 아니고 세계인의 언어가 된 것이다. 영어는 하나의 언어에 지나지 않으므로 누구나 기본적으로 구사할 수 있어야 하며, 그것이 무슨 크나큰 재간도 아니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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