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음, 그 요지경 세계
  • 張榮熙 기자 ()
  • 승인 1998.02.19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자금 융통 구세주가 ‘저승사자’로 돌변
ㅈ은행 본점 영업부 당좌계에서 일하는 ㅊ과장은 탈진 상태에 빠져 있다. 매일 제때 어음을 막지 못한 기업과 관련 금융기관 관계자들과 밤늦게까지 전화로 씨름하며 보내야 하는, 피를 말리는 상황이 벌써 1년째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보다는 조금 나아졌다고 하지만, 알 만한 기업들이 나자빠지는 상황은 여전하다.

지난 2월5일 ㅊ과장은 오전 교환에 돌려진 어음의 당좌 계좌에 돈이 부족하거나 잔고가 없어 부도가 날 가능성이 있는 10개 기업에 전화를 했지만, 대부분 ‘급전을 융통하고 있다’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말을 들었을 뿐이다. ㅊ과장은 일단 오후 2시30분쯤에 어음을 제시한 은행에 (지급)연장을 걸었다. 그러지 않으면 ‘아무 문제가 없으므로 어음을 결제해도 좋다’는 뜻이므로 자기네 은행이 고스란히 어음 결제액만큼 돈을 떼이게 된다. 그러나 연장을 걸었어도 영업 시간이 끝나는 시점인 4시30분까지 돈이 안 들어오면 1차 부도가 나며, 다음날도 입금이 되지 않으면 최종 부도를 내야 할 판이어서 입에 단내가 날 정도로 속이 탔다.

기업 부도 뒤에는 반드시 어음이 있다

이런 피 말리는 상황은 97년 1월 한보 부도 사태 이후부터 계속되었지만, 12월 들어서는 대부분의 기업이 사실상 부도 상태였을 정도로 금융 시장이 붕괴하는 조짐마저 보였고, 지금도 사정이 썩 나아진 것은 아니다.

금융결제원 어음교환소의 어음 교환 원칙도 수차례 깨졌다. 규정대로라면 부도 처리해야 마땅한 기업인데도 2∼3일씩 부도 처리도 하지 않고 결제도 하지 않은 채 어정쩡한 상태를 지속하는 사상 초유의 기현상이 빚어진 것이다. 감독 당국의 종용에 따라 1차 부도 처분을 내린 은행이 부도 취소를 하는 소동이 반복되고 있다.

5대 재벌 그룹 계열사조차도 사실상 부도 위기로 몰린 12월 상황을 부추긴 것은 물론 종합금융사들이었다. 종금사는 그동안 기업어음(CP) 인수 및 중개자로서 단기 자금난에 시달리는 기업들에게 구세주와 저승사자라는 두 얼굴을 가지고 있었는데, 97년 10월께부터는 기업들을 황천길로 인도하는 저승사자로 변했다.

종금사 사태에 기업들이 줄줄이 물린 것은 그만큼 어음을 남발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종금사가 취급하는 기업 어음은 융통 어음으로, 기업들이 단기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발행하는 것이다. 융통 어음은 한번 물려들면 헤어날 기업이 없다고 할 정도로 위험한 것으로서, 물품 거래가 따르는 진성 어음과는 다르다.

97년 1월부터 지금까지 언론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어떤 기업이 △△은행 ○○지점에 만기 도래한 어음을 막지 못해 최종 부도 처리되었다는 기사가 실리고 있다. 부도 뒤에는 어김없이 어음이 있다. 기업들이 부도를 많이 내게 된 것은 은행→종금사→기업으로 이어지는 돈 흐름이 끊기다시피 한 자금 경색 현상과 불황으로 장사가 안된 탓도 크지만, 근본적으로 어음을 자기 능력을 넘게 과도하게 발행했기 때문이다. 기업들은 제 손으로 지뢰밭을 만들어놓고 지뢰가 제발 터지기 않기를 바랐던 것이다.

자금난이 심해지면 재벌 그룹 계열사들도 어음 만기 연장을 받기 어렵고, 받는다 해도 초단기화한다. 종금사는 통상 당좌 수표를 끊어 결제 자금이 없는 기업에 주고, 기업은 이 수표로 결제를 한 뒤 만기를 연장하는 방식을 취하는데, 처음에는 한 달 연장해 주다가 1주일, 3일, 하루로 짧아진다. 그러나 오늘 돈이 없는 기업이 내일 돌아올 어음을 막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한라그룹·해태그룹·극동건설 등이 이런 행로를 밟으며 결국 무너졌다.

어음은 62년 어음법이 만들어진 후 기업간 신용 제도로 자리잡았다. 어음은 로마 시대에도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로 역사가 오래다. 당장 현금이 없더라도 일정 시간 후에 결제를 약속하는 증서인 어음을 발행함으로써 생산 및 판매 활동을 원활히 할 수 있기 때문에 기업들로서는 더없이 좋은 제도이다. 그러나 부도 어음이 대량 생기면서 어음 제도는 붕괴 위기를 맞고 있다.
신용 공황 속 어음 사기 기승

부산에서 화공약품 중개상을 하는 우송상사 조용암 대표는 1월20일 만기 도래한 어음 1천5백만원을 막지 못했다. 주거래처인 ㄱ공업의 화의 신청으로 닥친 일이었다. 이제 끝이구나 생각하며 조사장은 마지막으로 부산은행 수안동 지점에 찾아가 통사정을 했다. 은행 직원들은 그를 격려해 주었지만 대출은 어렵다고 했다. 그런데 경신화학 등 3개 거래업체 사장들이 믿을 만한 사람이니 한번 기회를 주자며 돈을 대신 마련해 주어 그는 부도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사장 같은 행복한 경우는 별로 없다. 금융기관 창구에는 연일 크고 작은 기업들의 자금 담당자들이 몰려와 살려달라고 아우성친다. ㅅ은행 영등포 지점의 한 당좌계 직원은 어음 5백만원어치를 막지 못해 매달리는 영세업체 사장 때문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고 털어놓았다.

융통 어음을 남발하다가 결국 좌초한 대기업의 경우야 스스로 자초한 일이지만, 대부분 납품 대금으로 어음을 받은 중소기업들은 억울할 수밖에 없다. 은행 등 금융기관에서 어음 할인을 받지 못해 초주검이 된 중소기업들은 급전을 구하기 위해 사채 시장의 문을 두드리지만, 이 마지막 종착지에서도 사정은 나쁘다. ‘이런 A급 물대(진성 어음)조차 이렇게 할인율(연리 35.2%)이 높아서야 뭘 가지고 장사하느냐’하는 호소는 사정을 잘 모르는 소리다. 지난해 말부터 사채 시장에서는 5대 그룹 어음도 안전한 어음으로 분류하지 않고 있다. 할인료는 부르는 대로 주어야 한다. 서울 명동에서 20년 동안 사채업을 해온 한 사채업자는, A급으로 통하는 5대 그룹 진성 어음에 한해, 그것도 액수가 1억원 미만, 만기 3개월 이하일 때만 일부 거래가 이루어질 뿐 거의 거래가 끊겼다고 말한다.

자기 재산을 몽땅 털어넣을 뿐 아니라 친지들까지 빈털터리로 만들고 끝내 도산하는 중소기업이 속출하는 와중에 수천억원의 협조 융자를 끌어내 부도를 피하는 대기업도 적지 않다. 이른바 ‘신 대마 불사론’이다. 지난해 말 이후 동아건설(2천2백억원) 한화에너지(3천억원) 쌍용그룹(3천억원) 국제상사(5백억원) 진도(1천1백억원) 해태(2천5백억원) 고합그룹(3천억원) 등이 협조 융자를 받았거나 받을 예정이다. 중소기업들은 대기업으로부터 받은 어음에 눌려 신음하고 있지만, 대기업들은 어음 부도를 막기 위해 새 대출을 받는 기가 막힌 장면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어음은 흑자 도산도 불러들이고 있다. 제약업계 7위인 영진약품은 지난해 12월6일 상업은행 영업부에 돌아온 어음 61억원을 막지 못하고 최종 부도 처리되었다. 어음의 가공할 파괴력은 3년 연속 흑자 기업인 영진약품을 무너뜨렸다.

어음은 구청장의 옷도 벗겼다. 강현중 대구 중구청장은 자신이 경영하던 주류 도매상 영남상사가 어음을 막지 못해 부도를 내자 최근 구청장 직을 사퇴했다. 중소기업인 자살에도 어김없이 어음이 등장한다. 지난해 10월1일 서울 동부경찰서 형사계. 20대 후반 여성이 물에 젖은 약속 어음 15장을 들고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사업을 하는 남편이 납품 업체인 ㅅ기업으로부터 물품 대금으로 1억6천만원어치 어음을 받았는데, ㅅ기업의 부도로 이 어음조차 덩달아 부도 처리되어 심한 빚 독촉에 시달리다가 비관 자살했던 것이다.

어음 위기 시대를 맞아 어음 사기도 기승을 부리고 있다. 유령 회사를 차려놓고 가짜 어음을 수백억대 발행해 수천 명의 피해자를 양산하는 기업형 사기단이 최근 잇달아 경찰에 적발되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상당수 종금사들이 기업 어음이 실물 대신 통장으로 거래된다는 점을 악용해, 기업으로부터 인수한 어음을 이중으로 판매하거나 불량 기업의 어음을 우량 기업의 어음으로 둔갑시켜 판매하고 있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나돌아 감독 당국이 조사 중이라는 사실이다.

대량 부도와 가짜 어음 속출, 어음 변조 등으로 ‘신용 결제 수단’인 어음의 신용은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한국도자기 같은 기업처럼 어음을 주지도 받지도 않으면 해결될 일인가. 어음 제도는 이제 본격적인 시험대에 올라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