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환란 경고한 ‘선지자’ 없었다
  • 朴在權 기자 ()
  • 승인 1998.02.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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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료·금융 전문가들, 소신·예측력·정보력 부족
“우리가 경고하지 않았었느냐.” IMF 시대를 맞아 흔히 듣는 말이다. 정부 관료들은 지금과 같은 상황을 예상하고 상부에 보고했는데 묵살당했다고 주장하고, 금융 전문가들은 과거에 금융 위기 가능성을 경고한 자신의 보고서를 내보인다. 이들의 주장은 과연 사실일까.

지난해 한국은 두 번 위기를 맞았다. 첫 번째 위기는 1∼4월에, 두 번째 위기는 7월 기아 사태가 터진 뒤에 찾아왔다. 연초의 위기는 96년 경상 수지 적자가 2백37억달러에 이르고, 재계 17위인 한보가 무너진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뒤이어 삼미특수강(3월20일)마저 쓰러짐으로써 ‘대마불사(大馬不死)’ 신화가 깨지기 시작했다.

환율이 가파르게 오르고, 외국인 투자가들이 발을 빼기 시작했다. 4월 대란설과 제2 멕시코설이 꼬리를 물었다. 4월 대란설은 한보의 어음 만기가 집중적으로 몰리는 4월에 최악의 금융 위기를 맞을 것이라는 주장이었고, 제2의 멕시코설은 경상 수지 적자와 외화 조달 금리 상승으로 인해 멕시코와 같은 외환 위기가 발생할 공산이 크다는 주장이었다.

대표적 논문이 3월19일 발표된 삼성경제연구소 권순우 수석연구위원의 ‘외환 위기의 징후와 처방’이었다. 권박사는 경상 수지 적자 확대 → 원화 가치 급락 → 자본 유출 → 외환 보유고 급감 → 외환 위기로 이어지는 상황을 배제할 수 없으므로 외환 시장 혼란과 통화 위기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국의 경제 구조나 잠재 능력이 멕시코보다 훨씬 안정되고 건전한 것은 사실이지만, 멕시코와 같은 외환 위기가 닥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기아 공기업화’ 방안이 결정적 패착

이같은 주장은 은행연합회 산하 금융연구원과 금융개혁위원회도 내놓았다. 4월 금융개혁위원회가 작성해 청와대 경제수석실에 보고한 ‘금융 위기의 진단과 향후 정책 방향’이라는 보고서는 금융 위기를 △요주의기 △위험기 △파국기로 나누고, 한국은 금융 위기를 맞을 가능성은 적으나 발생 요인이 내재하는 요주의기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금융개혁위원회는 이 보고서가 일반에 공개될 경우 위기감을 부추겨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킬 수 있다고 보고 대외비에 부쳤다.

기업체 부도가 꼬리를 물고 금융 위기를 경고하는 목소리가 높자 정부는 은행장들을 불러모아 ‘부도유예협약’이라는 것을 만들게 했다. 기업 도산이나 금융 위기 확산에 따른 사회적 비용을 최소화한다는 명목을 내세웠지만, 정상적인 금융 논리에서는 벗어나 있었다. 이를 둘러싸고 국내 전문가들이 논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받아들였다.

상황이 반전된 것은 5월 들어서였다. 4월 대란설이 물건너 가고, 외국인 투자 한도 확대에 따라 외국인 투자 자금이 몰려오자 시장은 점차 안정을 찾아 갔다. 자연히 금융 위기설은 꼬리를 감추고, ‘경기 저점 논쟁’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경제 주체들이 느끼는 체감 경기는 냉랭하기 그지없었지만, 지표상으로는 경기가 회복세로 돌아서고 있다는 것이 확연했다. 철강·반도체·석유화학 업종을 중심으로 수출이 늘어났고, 경상 수지 적자 폭이 줄었다. 게다가 95년 말부터 하강하기 시작했던 경기는 사이클로 보아 3/4분기 정도면 회복될 것으로 보였다. 상황이 바뀌자 모든 연구기관이 당초 책정했던 97년 경제성장률 목표치를 상향 조정했다. 가장 낙관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던 곳은 통계청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이었다. 이들은 2/4분기에 이미 경기가 바닥을 쳤다고 주장했고, 나머지 민간 연구소들도 3/4분기나 4/4분기에 경기가 바닥을 칠 것으로 내다보았다.

이 기간에 공개적으로 외환 위기 가능성을 언급한 것은 한국은행 정도가 고작이었다. 한은이 발행하는 <조사통계월보>(7월호)에 실린 ‘주요국의 금융 위기 발생 요인과 시사점’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이후 금융 시장을 개방함으로써 국내 금융기관이 부실해질 공산이 크다고 보고, 헤지 펀드 등 대규모 해외 자본의 불규칙한 유출입으로 인해 금융 불안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하지만 이 보고서는 한국의 경제 상황을 분석하기보다는 외국 사례를 통해 예방 책을 모색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다시 상황이 반전한 것은 7월 기아 사태가 발생한 뒤였다. 태국에서 발생한 외환 위기가 점차 동남아 지역으로 확대되고, 재계 7위인 기아그룹이 부도 나자 거액 부실 채권을 떠안게 된 금융기관 부실 문제가 주요 쟁점으로 떠올랐다. 무디스와 S&P 등 외국 신용평가기관들이 국내 은행의 신용 등급을 낮추기 시작했고, 환율이 상승하고, 외국인 투자가들이 이탈하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정치권과 언론과 국민은 ‘기아 살리기’에 여념이 없었고, 강경식 부총리는 삼성과의 유착설로 인해 사태 해결에 걸림돌만 되고 있었다.

당시 금융 전문가들이 기아 사태를 빨리 처리하라고 한목소리로 외쳤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을 공개적으로 주장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노도와 같은 여론을 거슬러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외국 증권사 임원들은 기아를 빨리 처리하지 않으면 한국이 심각한 위기를 맞을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총대를 메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결정적인 패착은 10월21일 재경원이 기아자동차를 공기업화하기로 발표한 것이었다. 재경원 관계자는 “당시로서는 최선책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라고 말했지만, 외국인 투자가들은 홍콩 증시 대폭락 사태까지 겹치자 대거 한국에서 빠져 나갔다.

한국의 금융 위기 가능성을 정면으로 제기하고 나선 것은 국내 전문가나 언론이 아니고 외신들이었다. <파이낸셜 타임스>(10월24일자)가 ‘동남아 외환 위기가 한국을 강타하고 있다’고 보도한 데 이어, 11월에는 블룸버그 통신·<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아시안 월 스트리트 저널> 등이 연일 한국의 외환 보유고 고갈 사태와 금융 위기 가능성을 대서 특필하기 시작했다. 재경원과 한은은 부인하기에 바빴고, 국내 언론은 이를 받아 외국 언론을 비판하는 데 앞장섰다. 그러다가 한국 경제가 실제로 벼랑 끝 위기에 몰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돌이키기 힘들 정도로 상황이 악화한 뒤였다.

“학자·금융 전문가 반성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전문가와 관료들 사이에서 ‘나는 경고했다’는 주장들이 심심치 않게 쏟아져 나오고 있다. 물론 경고를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소신을 갖고 외환 위기를 경고한 전문가는 거의 없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외환 위기가 닥칠 가능성을 언급하면서도 한국 경제의 기초가 튼튼해서 그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사족을 달았고, 그마저도 5월 이후에는 잠잠해졌다.

한국개발원연구원 이덕훈 선임연구위원은 “솔직히 말해 어∼하다 당했다”라고 실토했고, 김병주 교수(서강대·경제학)도 “상황이 악화하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최악의 위기를 맞을 줄은 몰랐다”라고 고백했다. 이들이 한결같이 제기하는 것은 외환 보유고 등 경제 통계를 재경원·한국은행·청와대 경제수석실이 독점하고 있는데다, 이들조차도 정확한 외환 보유고 및 외채 실태를 몰랐던 것이 결정적인 실책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한 원로 경제학자는 “이번 기회에 학자·전문가 들도 반성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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