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S 비리, 의혹 아니라 사실”
  • 李哲鉉 기자 ()
  • 승인 1998.02.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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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직 인수위 관계자 “LG·한솔그룹 선정에 YS·김현철 관련 있다” 주장
알리바이(현장 부재 증명)는 재판에서 직접 증거로 채택되지 못한다. 하지만 신빙성 있는 정황 증거가 보충되면 알리바이도 직접 증거로 채택될 수 있다. 개인휴대통신(PCS) 사업자 선정 의혹을 조사한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인수위)의 한 전문위원은, 사업자 선정 당시 1차 서류 검사 채점 내용을 보니 특정 업체가 눈에 띄게 높은 점수를 받은 사실을 비롯해 몇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그는 채점표 의혹을 알리바이에 비유했다. 채점표에 나타난 문제를 직접 증거로 채택할 수 있게 하려면 신빙성 있는 정황 증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인수위는 정황 증거로 이석채 당시 정보통신부장관이 심사 과정에 깊이 개입했다는 의혹을 제기한다. 한 인수위 전문위원은 이석채 전 장관이 직권을 남용하면서까지 심사에 개입했다고 주장했다. 사업자 심사의 비계량 항목 평가인 청문회 채점 방식을 자의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채점 방식 변화는 사업자 선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미 알려진 대로 이장관은 청문회 채점 방식을 0점 아니면 만점(2.2점)을 주게 했다. 심사위원들은 이 사실을 96년 6월3일 청문회가 열리는 통신개발연구원에 도착해서야 전해 들었다.
채점 방식 바꿔 LG에 점수 몰아주기

정보통신부는 청문회 심사가 중요한데도 총점 100점 가운데 청문회에 배정된 점수가 2.2점밖에 되지 않아 청문회 심사의 변별력을 높이기 위한 조처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서류 심사 결과 에버넷(삼성과 현대의 합작업체)이 LG텔레콤보다 0.373점 앞서고 있었다. 따라서 특정 업체에게 청문회 점수를 몰아주면 만점을 받은 업체가 사업자로 선정될 수 있었다. 당시 심사위원들은 서류 심사 총점을 몰랐다. 개인휴대통신 분야 영업 부문 심사반장이었던 이천표 서울대 교수는 “그게(서류 심사 차이가 0.373점에 불과하다는 것) 사실이냐. 우리는 그 사실을 전혀 몰랐다”라고 말했다.

심사위원들은 또 사업자별 중간 평가 내역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사업자 선정과 관련된 정보통신부 인사만이 각 업체의 중간 평가 내역을 알고 있었다. LG텔레콤이 0.373점 뒤져 채점 방식을 바꾼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마지막 청문회 점수도 소수점 이하까지 채점되면 LG텔레콤이 불리하기 때문에 청문회 채점 방식을 바꿨다는 말이다.

사업자 평가 방식을 바꾸려면 정보통신위원회의 심의를 거쳐야 한다. 그러나 정보통신부는 이 과정을 생략했다. 게다가 이 사실이 밝혀질 것을 우려해 나중에 정보통신위원회 윤승영 위원장의 집을 찾아가 사전 심의한 것처럼 날인을 받아 서류까지 조작했다. 이는 감사원이 지난해 감사에서 밝혀낸 사실이다.
사업자 선정 직후 열린 180회 임시국회에서 통신과학위원회 소속 국민회의 의원들은 LG그룹과 친인척이 보유한 데이콤 지분에 의혹을 제기했다. 김영환 의원은 이장관이 참석한 상임위원회에서 “LG그룹은 데이콤 지분 33.76%를 갖고 있어 전기통신사업법 6조에 따라 개인휴대통신 사업 자격이 없지 않았느냐”라고 지적했다. 이장관은 명목상 LG그룹이 보유한 데이콤 지분은 9.35%라고 밝혔다. 그는 96년 5월31일 LG텔레콤 정장호 사장을 불러 데이콤 지분을 5% 이하로 낮춘다는 각서를 받았다.

이밖에도 이석채 장관은 여러 번에 걸쳐 심사 기준을 자의로 변경했다고 한다. 정보통신부는 원래 95년 12월15일에 사업자 선정 방식 세부 지침을 발표했다. 닷새 뒤인 12월20일 취임한 이장관은 이듬해 3월8일 기간 통신 사업자 선정 내역을 완전히 바꾸었다. 제2차 출연금 심사에서 출연금이 같으면 추첨을 해 사업자를 선정하기로 했던 것을 폐기하고, 출연금이 같으면 1차 서류 심사로 결정하기로 했다. 또 한국통신과 민간 기업 두 곳이었던 개인휴대통신 사업자 선정 대상을 한국통신 자회사, 장비제조업체군(삼성·현대·LG·대우), 비장비제조업체군(그린텔·글로텔·한솔PCS)으로 구분해 선정하기로 했다.

이장관은 또 기업의 도덕성 문제를 평가 기준에 넣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3월13일 한솔제지 대표가 공정거래위원회 독점국장에게 뇌물을 준 혐의로 구속되고, LG그룹 계열사가 몰려 있는 여천공단의 환경 오염 문제가 부각되었다. 한솔그룹과 LG그룹의 도덕성이 땅에 떨어진 시점에서 이장관은 4월26일 정보통신정책 토론회에 참석해 종전과 달리 기업 도덕성 평가 항목을 최소화하겠다고 밝혀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이장관은 6월10일 사업자 선정 업체를 발표한 지 열흘이 지난 후 개인휴대통신을 비롯한 7개 신규 통신사업자 선정 과정과 채점 내역을 2급 비밀로 분류했다. 정보통신부는 사업자 선정 기준 가운데 국산품 사용 조건이 있어, 이 사실이 밝혀졌을 때 통상 마찰을 일으킬 소지가 있어 2급 비밀로 분류했다고 해명했다. 그 근거가 되는 법규는 안기부가 마련한‘비밀 분류 세부 지침’이다. 이 지침 3항 비밀의 기본 분류 기준 가운데 2급 비밀 부문에는‘국가 정책의 전환이 외국 또는 국민에게 영향이 있는 부분적인 사항’을 2급 비밀로 분류한다고 적혀 있다.
이장관은 2급 비밀 분류 사실을 180회 임시국회 통신과학기술위원회에 출석해서도 끝내 밝히지 않았다. 국회 통신과학기술위원회 소속 국민회의 의원들은 △심사 평가 기준 △가중치에 대한 세부내역서 △계량 비계량 청문 항목에 대한 신청 회사별 평가내역서 사본 △심사위원 명부를 요구했다. 그러나 정보통신부는‘별도 설명’이라는 한마디로 의원들의 요구를 일축했고, 신청 기업의 사업별 투자 내역과 서비스 요금은 기업 비밀 보호라는 사유로 공개하지 않았다.

또 정보통신부는 심사위원들이 비밀로 하기를 원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시사저널>이 취재한 결과 이것은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개인휴대통신 기술부문 심사반장이었던 김재균 한국과학기술원 교수는 “심사위원들이 심사 결과를 비밀로 하자고 결정한 사실이 없다”라고 말했다.

선정 작업 관계자, 인수위에 정보 제공

인수위측이 개인휴대통신 선정 과정에 비리가 있다고 확신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당시 선정 작업에 깊이 개입한 인사가 구체적인 정보를 인수위 전문위원에게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외국에 도피 중인 이 인사는 인수위 전문위원과 연락하며 선정 작업에서 일어난 비리를 알려주고 있다고 한다. 이 인사와 연락을 주고 받는 인수위 전문위원은 “(비리 내용을)아직 밝힐 수 없지만 검찰 수사가 진행되면 알려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석채 전 장관, 김기섭 전 안기부 운영차장, 조동만 한솔PCS 부회장, 사업권을 얻은 특정 업체와 친분이 있는 심사위원 한 사람의 계좌를 추적하면 개인휴대통신 사업자 선정에 개입된 비리를 밝힐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왜 이석채 전 장관을 비롯해 정보통신부 관련 인사들이 무리수를 두어가며 LG텔레콤과 한솔PCS에 개인휴대통신 사업권을 주려고 했을까. 국민회의 관계자는, 14대 대통령 선거 당시 LG그룹이 김영삼 대통령 후보 진영에 선거 자금을 지원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름을 구체적으로 거론하며 LG그룹 구본무 회장의 동생 가운데 한 사람이 LG그룹과 김영삼 진영과의 자금 루트였다고 말했다. 그는 “사업자 선정 작업이 한창일 무렵 LG그룹 관계자들을 만났을 때 ‘우리가 개인휴대통신 사업자로 선정되기로 정해져 있는데 다른 기업들이 왜 난리를 치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하더라”고 말했다. 그러나 LG그룹 관계자는 이 사실을 전면 부인한다. “당시 그 인사는 LG전자 일본 지사에서 근무한 줄 알고 있다. 따라서 그가 자금 루트 역할을 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한솔PCS가 선정된 배경에는 김현철씨가 있다고 인수위의 한 전문위원은 주장했다. “김현철씨가 막후에서 조종하고, 이석채 장관이 총괄 지휘했으며, 이계철 차관이 실무 작업을 진행한 줄 알고 있다.” 그는 조동만 한솔PCS 부회장이 김기섭 전 안기부 운영차장을 통해 김현철씨의 비자금을 전달 받아 관리했다고 덧붙였다. 조부회장이 김기섭씨를 통해 김현철씨의 비자금 50억원을 맡아 관리한 사실은 지난해 검찰의 한보 수사 과정에서 드러났다. 조부회장은 80년대 신라호텔에서 김기섭씨와 함께 일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그 뒤 94년 6월부터 96년 12월까지 현철씨의 비자금을 개인 회사 계좌에 입금해 관리하면서 매달 5천만원씩 건넸다고 한다. 조부회장은 <시사저널>의 취재 요청을 여러 차례 거부했다.

인수위는 관련 자료와 조사 내역을 감사원에 넘겼다. 감사원은 2월14일 개인휴대통신을 비롯해 7대 기간 통신 사업자 선정 과정에 대한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2월16일부터 열흘간 감사팀 8명을 정보통신부에 파견해 현장 감사에 들어갔다. 감사원은 특감을 종료한 후 감사 내역을 검찰에 넘긴다. 검찰은 3월 중순이나 4월 초부터 비리 의혹 인사들의 계좌를 추적하는 작업에 착수할 것이다.

앞으로 계좌 추적이 끝나고 관련 인사들이 소환되면 개인휴대통신 사업자 선정 과정에서 비리가 있었는지와 권력이 어떻게 개입했는지가 드러날 것이라고 인수위측은 확신하고 있는 듯하다. 김대중 차기 대통령에게 보고할 조사 내용을 정리한 인수위의 한 전문위원은 “사업자 선정 비리는 이제 의혹이 아니라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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