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쪼개기’ , 구조 조정 묘수인가
  • 成耆英 기자 ()
  • 승인 1998.12.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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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사이에 ‘分社’ 유행… 몸집 줄이고 종업원도 살려 ‘일거양득’
서울 태평로 지상 26층짜리 삼성생명 빌딩. 이 대형 건물의 전체 시스템을 관리하는 종합방재실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모두 삼성 로고가 찍힌 점퍼를 입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모두 삼성 직원은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삼성 직원과 전(前) 삼성 직원으로 나뉜다. 전 삼성 직원들은 삼성에서 지난 6월 분사 형식으로 떨어져 나온 빌딩 관리 전문업체인 덕양T&S 소속이다.

덕양 T&S는 삼성에버랜드 빌딩 엔지니어링 사업부 직원 1백16명이 독립해 만든 회사이다. 이들은 비록 한 사무실에서 함께 일하고 있지만, 분사 이전에 한 배를 탄 동료들끼리 수주 경쟁을 벌이는 경쟁 관계로 변했다. 분사 이전의 모기업과 합동 근무하는 방식은 물론 과도기적인 것이다. 그룹에서 떨어져 나올 당시, 분사 이후 3년 동안 삼성그룹이 소유한 건물을 관리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조건을 달았기 때문이다.

덕양T&S 직원들도 삼성의 울타리를 벗어나기는 했지만, 심리적으로는 아직 삼성맨이라는 생각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한다. 근속 연수가 긴 직원일수록 이런 심정은 더 할 수밖에 없다. 삼성중공업과 삼성에버랜드 등 삼성 계열사에서만 ‘평생’ 근무하다가, 덕양 T&S라는 소기업 대표이사로 변신한 노경춘 사장이 삼성 배지를 뗀 것은 22년 만의 일이다.

삼성에버랜드는 이 회사 외에도 빌딩 시설 관리 분야에서만 4개 기업을 분사 형식으로 독립시켰다. 리조트 시설 관리·조리 보조 분야까지 합치면 무려 9개의 회사를 떼어냈다. 이렇게 해서 모두 6백명이 넘는 직원이 삼성에버랜드를 떠나 종업원 주주 형식으로 독립했다.

삼성그룹, 150개사 분사… 직원 9천명 줄여

삼성에버랜드는 삼성그룹 안에서 분사를 가장 많이 한 기업이다. 삼성그룹은 5대 그룹 중 가장 많은 1백50여 개 회사를 분사시켜 9천명이 넘는 직원을 줄일 수 있었다.

현대그룹도 비슷한 방식으로 분사해 지금까지 63개 회사를 독립시켜 3천9백여 명을 그룹에서 분리했다. 내년 상반기에도 추가로 20개 부문을 독립시킬 계획이다. 정부가 구조 조정을 요구하고 나섰을 때만 해도 ‘우리가 구조 조정할 게 뭐가 있느냐’던 대우도 대우전자와 대우중공업을 시작으로 일부 사업 부서를 쪼개기 시작했다. LG도 사업성이 한계에 이른 비주력 사업군을 중심으로 분사를 통한 구조 조정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금융감독위원회와 공정거래위원회도 애초 분사에 대해 변형된 내부 거래가 아니냐며 의심하던 입장을 바꾸어 구조 조정의 유용한 수단으로 이를 장려하고 있다. 분사는 이미 유행을 일으키며 기업 구조 조정의 키워드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분사 제도가 구조 조정의 모델로 각광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까지 완전히 ‘홀로 서기’형식으로 분사한 회사는 그리 많지 않다. 현대그룹의 경우 분사 기업을 하루빨리 안정 궤도에 올려 놓기 위해, 종업원 주주 회사에 한해 모기업이 일정한 지분을 출자하는 등 지원 체제를 갖추겠다고 밝혔다. 다른 기업들도 대부분 분사 이후 몇 년간 일정한 수주량을 보장하겠다는 식으로 합의해 준 뒤 기업을 떼어내고 있다.

삼성·현대·대우 등의 브랜드 이미지와 대기업의 울타리 안에 안주해 왔던 근로자 처지에서는, 분사라는‘구명 보트’가 안전한지 아닌지 아직은 미심쩍어 하고 있다. 이 구명 보트는 당분간 모선의 지원이 없으면 침몰할 수밖에 없는 무동력 상태인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니 구조 조정의 수단인 분사가 부가 가치가 낮은 일부 단순 업무 분야에 집중되기도 한다. 삼성에버랜드 역시 빌딩 관리라는 사업의 성격상 건물 유지·보수 등 단순 업무가 많기 때문에 이를 외주 형식으로 떼어내기 쉽다는 장점을 갖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기업들은 부가 가치가 낮은 단순 업무를 분사 1호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기업의 총무 분야가 분사 1호로 떠오르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제 기업에서 총무부나 인사부가 없어지는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이다.

분사 제도를 가장 잘 활용하고 있다고 평가받는 삼성의 경우 삼성전자에서 애프터 서비스·물류·광고 디자인 분야를 분사하고, 삼성물산에서 총무·컴퓨터 그래픽을 분리하는 등 분사 작업이 지금도 광범위하게 진행 중이다. 그러나 자세히 내용을 들여다보면 사업부를 통째로 떼어내는 대규모 분사는 많지 않다.

기업 처지에서 보더라도 분사가 당장 인건비 절감 효과를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다. 덕양T&S 직원들도 과거에 삼성에버랜드에서 받던 봉급보다 5∼10% 적게 받고 있지만, 삼성에버랜드도 퇴직금에다 3개월치 월급에 해당하는 위로금을 지급했기 때문에 인건비 절감 효과는 별로 없었다는 분석이다.

골치 아픈 문제점이 한둘이 아닌데도 기업들은 왜 유행처럼 분사를 선호하는가. 무엇보다 비대한 몸집을 그대로 끌고 가다가는 기업도 종업원도 함께 망할지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그래서 최근 들어서는 장기적 관점에서 부가 가치가 낮은 소규모 분야뿐만 아니라, 사업부를 통째로 매각하는 경우도 하나둘씩 생겨나고 있다. 해외 자회사인 심비오스 사를 매각해 국제통화기금(IMF) 체제 이후 대규모 사업 매각 1호를 기록했던 현대전자에서 위성 통신 부품 사업이 떨어져 나온 것도 그런 예가 될 수 있다.
내년 중반쯤 성공 여부 판가름날 듯

위성 통신용 부품 사업은 내년에만 3백억원이 넘는 매출과 순이익 26억원이 예상될 정도로 유망한 사업이다. 그런데도 김대중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미국 기업이 현대전자의 위성 사업에 투자하고 싶다는 의향을 밝히자, 현대측은 즉각 이 사업부의 종업원들과 미국 기업이 합작할 수 있는 방안을 만들어냈다. 이처럼 기업이 살아 남으려면 유망 사업까지도 과감하게 떼어낼 수 있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분사 제도로 무리한 정리 해고를 피할 수 있다는 점도 최근 분사가 각광받고 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정리 해고의 첫 번째 시험 무대였던 현대자동차에서 정리 해고가 상징적 수준에서 그친 이후 기업들의 분사가 크게 늘어난 데서도 이런 점을 읽을 수 있다. 근로자 스스로가 정리 해고 명단에 끼는 것보다는 자력 갱생을 선택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분사가 과연 효율적인 구조 조정 수단인가 여부는 얼마나 비용을 절감하고 수익성을 높일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그러나 그것이 드러나는 시기는 내년 중반쯤이 될 것 같다. 이때쯤이면 분사한 회사들의 매출이나 수익이 어느 정도가 될지 드러날 것이다.

분사한 회사들이건 모기업들이건 모두 이 1차 판정을 통과하는 것이 발등의 불이다. 이들 기업은 그래서 초기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비용 절감 방안을 마련하느라 머리를 쥐어짜고 있다.

이런 비상 상황은 모기업의 지원 약속을 받지 못하고 완전히 분리 독립한 회사일수록 심각하다. LG산전에서 주유기와 세차기 제조 분야를 떼어내 독립한 한국E&E는 애초 분사가 아니라 매각 대상 사업 부문이었다. 그러나 적자만 쌓인 이 사업부를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자 아예 종업원들에게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LG산전의 주유기·세차기 제조업은 종업원들이 퇴직금 등을 출자해 소기업으로 변신하는 데 성공했다.

생산 설비를 포함한 자산 일체를 LG로부터 사들이고, 공장도 그대로 쓰고 있지만 LG측에 임대료를 내기 때문에 완전한‘홀로 서기’라 할 수 있다. 임직원 규모는 50명 정도. 분사하기 전 이 사업부 직원이 1백76명이었던 것에 비하면 3분의 1 이하로 줄었다.

이들은 자산 매각 형식으로 분사했기 때문에, 과거의 인연으로 모기업에 특혜성 납품을 할 수도 없고 바라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한국E&E 기획팀 강용구 과장은 “LG산전 시절에 우리가 만든 제품은 LG정유 직영 주유소 이외에 경쟁사 주유소에 납품은커녕 발도 붙일 수 없었다. 그러나 LG에서 독립하고 난 뒤부터는 특정 그룹 계열사라는 거부감이 사라져 매출 전망이 오히려 밝다”라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그러나 재벌 개혁이나 구조 조정에 분사를 제대로 활용하려면 아직도 넘어야 할 벽이 많다. LG경제연구원 박상수 연구원은 “분사에 따른 결과를 임직원들에게 충분히 설명한 후 신속하게 진행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라고 지적한다. 분사에 대한 소문이 계속 퍼지면 임직원들이 불필요하게 동요하고, 주가 하락이나 대출 상환 압력에 직면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부당 내부 거래로 흐를 수도

재벌 개혁을 촉구해 온 참여민주사회시민연대(참여연대)는 최근 유행하고 있는 분사가 부당 내부 거래로 흐르고 있지 않은지 감시에 나설 움직임이다. 참여연대 경제민주화위원회 위원장 장하성 교수(고려대·경영학)는 “장부 가격 이하로 자산을 매각하면 불공정 거래의 우려가 있다. 분사의 효율성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어쨌든 분사 제도는 몸집 줄이기에 나선 재벌들에게나 정리 해고의 기로에 선 근로자들에게나 하나의 탈출구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동안 기업들의 다운사이징 작업이 비대해진 중간 관리 부분이나 간접 지원 분야는 안 줄이고 정작 필요한 생산 라인만 줄이는 방식으로 변질되었던 것을 감안하면, 기업 조직을 축소하는 새로운 전형을 만들 수도 있다.

기업을 쪼개서 새로운 기업을 여러 개 만드는 분사 제도는 대기업뿐만 아니라 중소기업에까지 확산되어 앞으로 구조 조정의 중요한 수단으로 자리잡을 전망이다.

이렇게 쪼개고 쪼개서 늘어난 사업자 등록증만큼 고용도 늘고 국부(國富)가 덩달아 늘어날지 아직은 단정하기 이르다. 하지만 분사 제도가 구조 조정 과정에서 골머리를 앓고 있는 기업들에게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 것만큼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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