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공룡 은행, M & A로 몸집 불리기
  • 워싱턴·卞昌燮 편집위원 ()
  • 승인 1998.05.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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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형 금융기관 합병 열풍… 국제 금융 시장에 큰 영향
머지 않아 미국인들은 지금처럼 일일이 은행·증권사·보험사를 구분해 가며 번거롭게 일을 볼 필요가 없을지 모른다. 분산된 업무를 하나로 통합한 초대형 금융기관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지난 4월6일 시티 은행과 트래블러스 그룹이 합병해 새롭게 탄생한 시티 그룹이 바로 그같은 금융기관이다. 세계 금융계의 비상한 관심 속에 출현한 시티 그룹은 미국의 중앙 은행 격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합병안을 승인하는 대로 지금까지 철저하게 구분되어 온 은행·증권·보험 간의 업무 영역을 허물어 고객들에게 통합 서비스를 제공하는 ‘원스톱 쇼핑’업무를 개시할 예정이다.

강자끼리 결합해 후발 주자 견제

하루가 멀다고 터져 나오는 기업 합병·매수(M&A) 소식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미국 산업계, 특히 금융계는 시티 그룹 탄생을 계기로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지각 변동을 맞고 있다. 시티 그룹이 세계 제1의 초대형 금융기관으로 탄생한 지 1주일도 못 가 이번에는 미국 은행권을 동서로 양분하며 치열한 경쟁을 벌여 오던 네이션스 뱅크와 뱅크 오브 아메리카가 합병을 선언했다. 이같은 합병으로 지금까지 업계 1위를 고수해 오던 체이스 맨해튼 은행은 3위로 밀려났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시티 그룹 탄생으로 금융계 판도에 대지진이 일어난 만큼 10위에 드는 초대형 은행은 물론이고 50위권 내의 우량 은행들도 동종 또는 다른 금융 업종과의 합병 열풍에 휩싸이리라는 전망이 무성하다. 이미 업계 8위인 샌프란시스코의 웰스 파고 은행이 9위인 유에스 뱅크 코프와 합병할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또 10위권에 바짝 다가서고 있는 뱅크 오브 뉴욕이 최근 10위인 멜론 뱅크와의 합병 협상에 실패하자 적대적 인수에 나섰다는 소문이 월 스트리트에 설득력 있게 나돌고 있다. 체이스 맨해튼 은행은 한때 세계적인 투자회사인 메릴린치와 합병하는 데 실패한 뒤 최근 업계 6위인 퍼스트 유니언과 합병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근래의 합병 추세가 과거와는 본질적으로 궤를 달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과거에 강자가 약자를 인수해 흡수하는 ‘약육 강식’ 행태를 보였다면, 요즘은 강자와 강자가 후발 주자를 견제하기 위해 대등하게 결합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시티 그룹의 경우 시티 은행이나 트래블러스 그룹 모두 은행업과 보험업에서 업계 수위를 다투어 온 초우량 기업이다. 또 이미 합병 절차를 마쳤거나 진행 중인 초대형 은행들은 한결같이 재무 구조가 건실한 세계적인 금융기관이다.

잘 나가는 금융기관들이 이처럼 합병을 서두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합병할 경우 중복되는 사무소와 인원을 정리함으로써 최고 40% 가량의 경비 절감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은행 처지에서 볼 때 수신고 증가율이 연평균 1%를 맴도는 상황에서 무언가 획기적인 변신을 꾀하지 않으면 살아 남을 수 없다는 위기 의식이 합병의 가장 큰 요인으로 꼽힌다. 대다수 고객이 이자율이 낮은 은행 상품 대신 연평균 최고 20% 수익률을 보장하는 뮤추얼 펀드나 12%대 연금 상품을 제공해 고수익을 보장하는 투자 신탁사나 보험사로 몰려가는 판국이고 보면, 아무리 시티 은행 같은 초대형 은행이라도 안심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메릴린치의 수석 분석가인 제롬 케니 씨는 이를 두고 “연금 상품과 뮤추얼 펀드처럼 초고속으로 성장하는 분야를 잡지 않는 한 아무리 초우량 은행이라도 성장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라고 분석했다. 물론 은행들도 뮤추얼 펀드 상품을 내놓기는 하지만 제너럴 일렉트릭 캐피틀 같은 전문적인 투자회사와는 아예 경쟁 상대가 못된다.

또 하나의 이유로는, 시티 그룹처럼 은행업과 보험업을 겸하게 될 경우 서로가 서로의 장점을 최대한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트래블러스 그룹은 시티 은행과 합병한 뒤 이 은행이 확보한 전세계 약 6천만명의 신용카드 소지자를 상대로 보험 상품을 팔 수 있고, 시티 은행측도 트래블러스의 주고객인 우량 대기업들을 상대로 수익 상품을 개발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시티 그룹이 탄생함으로써 초대형 금융기관들의 합병 움직임이 더욱 빨라질 것이 확실해지자, 자산 규모 10억달러 내외인 중소 은행들은 생존을 위한 전략을 마련하느라 부산하다. 84년에는 미국 전역에 은행이 1만5천개 있었으나 지금은 9천2백개로 줄었다. 앞으로 합병·매수 바람이 더욱 거세게 불 경우 그 수는 더욱 줄어들 것이 확실하다. 특히 초대형 은행들이 파격적인 금리를 제시하며 대대적인 예금 유치 경쟁에 뛰어들 경우 중소 은행들의 입지는 더욱 줄어들 것이다. 그 때문에 일부 중소 은행의 경우에는 고객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은행장이 직접 뛰어다니며 1 대 1로 고객 관리에 나서기도 한다.

최근 <월 스트리트 저널>에 따르면, 뉴저지의 한 중소 은행장은 자기 집 전화번호를 모든 고객에게 일일이 나누어 주고 애로 사항을 얘기해 달라고 부탁하는가 하면, 고객 생일에 직접 축하 전문을 띄운다고 한다. 은행측도 거래 구역 내의 주요 행사장에 텔레비전 수상기와 VCR를 기증하는가 하면, 경우에 따라서는 푸짐한 상품을 후원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초대형 은행과는 경쟁이 불가능한 만큼 지역민을 위한 ‘주민 은행’으로 탈바꿈해 틈새 시장을 공략하겠다는 것이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현재 벌어지고 있는 초대형 금융기관 간의 합병을 우려하는 금융 전문가가 적지 않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자산 규모가 6천 9백75억달러인 시티 그룹이나 5천6백79억달러인 네이션스뱅크-뱅크 오브 아메리카 같은 초대형 금융기관을 효율적으로 꾸려 가기가 쉽겠느냐는 지적이 많다. <워싱턴 포스트>의 저명한 경영 칼럼니스트 앨런 슬로안 씨는 ‘은행과 보험사를 합친 시티 그룹은 물론이고 같은 업종이 결합한 네이션스뱅크-뱅크 오브 아메리카도 경영을 효율적으로 꾸려 가려면 요술 방망이가 필요할 것’이라고 날카롭게 꼬집었다. 경기 순환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주식 및 보험 거래는 물론 은행업과 투신업까지 한 지붕 아래 합쳐 놓는 것은 위험천만한 발상이라는 주장이다. 게다가 이들 합병 기관에서 지금까지 한 사람이 맡아 오던 최고 경영자(CEO) 자리를 두 사람이 맡게 된 것도 경영권 다툼의 불씨를 안고 있다는 것이다.

올해 금융기관 합병액, 1조6천억달러 넘어

그러나 이같은 비판 여론에도 불구하고 현재 초대형 금융기관 간의 합병 움직임은 주식 시장의 호황이 계속되는 한 더욱 빨라질 것 같다. 합병 직후 해당 기업의 주가가 급등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시티 은행의 경우 합병 소식이 알려진 직후 주가가 무려 37달러나 올라 1백80달러를 기록했고, 트래블러스 그룹의 주가도 11달러 오른 73달러에 이르렀다. 시티 은행의 경우 89년 주가는 30달러를 밑돌았고, 트래블러스 그룹의 주가도 5달러를 맴돌았었다. 이미 4월초 9000대를 기록한 다우존스 주가지수가 연내 10000대를 돌파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대형 금융기관 간의 합병은 주가 상승을 더욱 부추길 것이 뻔하다.

최신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금융기관을 포함해 여타 분야 초대형 기업들의 합병·매수 규모는 9천9백억달러로 96년의 6천2백60억달러에 비해 40% 이상 증가했다. 올해는 금융기관의 합병액 규모만 해도 이미 1조6천억달러를 넘어섰다. 특히 시티 그룹이 출현함으로써 미국 금융계는 어느 해보다 격심한 변화를 겪을 것이 확실하다. 게다가 세계 10대 금융기관 가운데 7개가 미국계인 상황에서, 대대적인 합병 작업은 앞으로 국제 금융 시장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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