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벌이 국보 1호" 남대문·동대문 시장
  • 成耆英 기자 ()
  • 승인 1998.05.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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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질·가격 넘버원” 외국인 관광객 문전성시
남대문시장에서 고려인삼백화점을 운영하는 신명호 사장은 최근 몰려드는 외국인을 상대하느라 쉴 틈이 없다. 지금과 같은 호황은 장사를 시작한 지 11년 만에 처음 맞는 일이다. 인삼을 찾는 외국인 숫자도 늘었지만 이들의 손도 눈에 띄게 커졌다. 인삼 열다섯 뿌리 한 세트가 환율 폭등 이전 55달러 수준이던 것이 30달러까지 떨어지자 구매량이 폭증한 것이다. 신사장이 보는 매출액 증가율은 약 30%. 모두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 체제로 들어간 지난해 말부터 생겨난 일이다.

남대문시장이 호황을 누리자 이를 간판으로 내세운 쇼핑 패키지 상품도 등장했다. 남대문 시장과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힐튼호텔은 지난해 말부터 남대문시장에서 의류·피혁·인삼 등 외국인 관광객에게 인기 있는 상품을 파는 업소 20여 개를 협찬 업소로 지정했다. 힐튼호텔은 협찬 업소 중 외국 유명 브랜드를 흉내낸 모조 상품을 팔다가 적발된 업소를 제명하는 등 관리도 철저히 하고 있다.

러시아 보따리 장수, 4백~5백명 규모

한 걸음 더 나아가 남대문시장을 세계 패션의 메카로 만들겠다는 야심찬 청사진도 모습을 드러냈다. 2002년 초 완공을 목표로 얼마전 첫 삽을 뜬 패션 전문 쇼핑 센터 ‘메사’가 그것. 남대문시장 한복판에 지상 22층짜리 패션 타운을 짓는다는 이 계획은 남대문시장이 이미 확보하고 있는 경쟁력에 마케팅 기법과 품질 관리를 접목하겠다는 전략적 의도에서 탄생했다.

그러나 의류에 관한 한 남대문시장은 러시아계 보따리 장수들로 문전 성시를 이루고 있는 평화시장 등 동대문 상권에 비하면 아직까지는 한수 아래다. 오히려 액세서리나 가방 등 잡화류가 ‘남대문표’의 간판 상품이다.

상인들 처지에서는 뜨내기 관광객보다 한국 상품의 고품질·저가격을 노리고 몇달마다 정기적으로 한국을 찾는 외국인 보따리 장수들이 더 반갑다. 환율이 폭등하면서 이들 보따리 장수들의 발길이 30% 가량 늘었고 보따리 크기도 엄청나게 커졌기 때문이다. 보따리 장수들의 국적도 다국적화하고 있다. 러시아 중심에서 폴란드 등 동유럽 국가와 베트남·캄보디아 등 저개발 국가로 영역을 넓혀 가고 있는 것이다.

‘첼나키’라고 불리는 러시아 보따리 장수들은 수십명 단위의 단체 관광객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4백∼5백명으로 대규모 구매단을 구성해 방한한다. 거평프레야 김영철 상무는 “외국인 관광객이 늘어난 데다 그들이 구매하는 물품의 양이 눈에 띄게 늘어난 것을 감안하면 동대문 상권의 매출 신장률은 50%에 육박할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평화시장에서 의류 도매업을 하는 한 상인은 “러시아나 동유럽 보따리 장수들이 찾는 의류는 원단부터 크기까지 천편 일률적인 것들이다. 옷감 재질이나 유행으로 치면 한국에서 10년 전쯤 입던 것들이라고 보면 된다. 국내에서 팔지 못하는 물품들로 외화를 긁어 모으고 있으니 우리야말로 애국자 아니냐”라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패션 특별시’를 표방하며 3년 전 문을 연 거평프레야는 개관 초기 임대 실적이 부진해 한때 고전했으나 최근 외국인 관광객이 몰려와 활기를 되찾은 동대문 상권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거평프레야에서 판매하는 물품들은 평화시장의 저가 물품들처럼 보따리 장수들의 눈길을 끄는 상품은 별로 없다. 가격도 현지 소비자를 상대로 이익을 남겨야 하는 이들의 싸구려 선호 심리를 충족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러나 외국인의 발길이 잦아지면서 판매용 물품뿐만 아니라 본인이 쓰거나 가족에게 선물할 패션 용품 수요가 늘어 거평프레야의 경기도 덩달아 활기를 띠고 있다. 일종의 이삭 줍기라고나 할까. 대규모 구매력을 가진 보따리 장수들과는 별 관계가 없는 거평프레야가 통역 요원을 배치하고 ‘외국인 환영’ 간판을 내걸기 시작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사실 환율 폭등으로 인한 호경기가 처음 찾아든 곳은, 외국인 쇼핑에 관한 한 ‘원조’ 격인 이태원의 2천개 가까운 상점이었다. 그러나 이태원의 관광객이 30% 늘었다면 그로 인한 쇼핑 액수 증가는 20%에 머무르고 있는 실정이다(오른쪽 상자 기사 참조). 관광객 증가율을 따라가지 못하는 수입액 증가 수준은 전체 관광객을 상대로 한 관광 수지에도 영향을 미친다. 지난 3월의 경우 관광객 숫자는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해 11.4%나 늘었지만 이로 인한 여행 수지는 0.9% 증가에 그쳤다. 그만큼 ‘짠돌이’가 늘어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새 상품 개발·품질 관리로 단골 만들어야

외국인들이 선호하는 품목에도 변화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전통적으로 외국인들에게 큰 호응을 얻던 인삼·신발류·가죽 제품의 판매율이 해마다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대신 의류나 김치가 외국인 선호 품목 1·2위를 차지하며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다. 외국인들의 주머니를 노리려면 어떤 품목을 집중 육성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재래 시장의 달러 벌이는 그러나 환율이 진정되면 원점으로 되돌아갈 것이라는 점에서 ‘반짝 경기’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한번 한국을 찾은 외국인들이 쇼핑을 위해 한국을 다시 찾게 만들려면 새로운 상품 개발과 품질 관리가 필요하다. 다행히 남대문시장을 찾는 외국인의 80% 가량은 한국에서의 쇼핑에 깊은 인상을 받아 1년에 두세 번씩 한국을 찾는 단골 고객이라는 것이 상인들의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재래 시장들은 불안한 환율만큼이나 불안한 실험을 거치고 있는 셈이다. 동네 아줌마를 단골로 잡기도 쉽지 않은데 동양의 낯선 나라를 찾은 외국인들의 주머니 돈을 끄집어내기가 쉬울 리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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