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업계 '빅뱅' 다가온다
  • 이문환 기자 (lazyfair@e-sisa.co.kr)
  • 승인 2001.03.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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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익 구조 취약, 외국 대형사 진입하면 '생존 회사' 극소수…
합병·전문화 불가피




참담한 '성적표'였다. 지난 3월7일 금융감독원이 발표한 '증권·투신 운용사의 2000년 회계 연도 3/4분기(2000년 4월1일∼12월31일) 영업 실적'이 그러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1999년과 비교해 국내 증권사들의 이익은 5조2천4백88억원에서 1천1백40억원으로 무려 97.8%가 줄어들었다. 43개 증권사 중 적자를 낸 회사가 17개나 된다.

이런 성적표는 국내 증권업계의 어려운 현실을 잘 보여준다. 증권사 업무 중 국내 증권회사 수입의 60∼70%를 차지하는 분야는 중개 부문이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증시가 침체하면서 증권사 수입도 그만큼 줄어들었다. 즉 국내 증권사들은 비가 제때 오면 풍작을 거두지만 그렇지 않으면 흉작인 '천수답' 경영을 하는 것이다.

사이버 트레이딩이 인기를 끌면서 벌어지기 시작한 수수료 인하 경쟁은 가뜩이나 열악한 증권사의 수익 구조를 더 악화시켰다. 온라인 거래가 도입되기 전만 해도 거래 금액의 0.5%씩 받던 수수료는 최저 0.029%까지 내려갔다.

사이버 트레이딩 시스템 등 IT 분야에 쏟아야 하는 투자비 역시 증권사들에 부담을 많이 지우고 있다.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서는 사이버 트레이딩 시스템을 구축해야 할 뿐만 아니라, 경쟁 업체가 시스템을 개량하면 거기에 맞추어 자사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해야 하기 때문이다. LG투자증권 경영기획팀 고종우 과장은 "예전에 10억∼20억 원을 투자하던 것이 이제는 '0' 하나를 더 붙여야 한다"라고 과거와 달라진 상황을 표현했다.

증권업계가 천수답식 사업 구조에서 벗어나 수입원을 넓히기 위해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1999년 현대증권이 낸 수익증권 '바이 코리아'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자 증권업계에는 수익 증권 열풍이 불었다. 증권업계는 수익증권 판매 수수료로 톡톡히 재미를 보았지만, 지난해 하반기 증시가 침체하고 대우그룹 부도 사태가 벌어지면서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상황이 벌어졌다. 수익증권 평가 손실 및 매매 손실이 판매 수수료 수입을 뛰어넘은 것이다. ㅎ증권 전략기획팀 김 아무개 과장은 "금융 상품을 팔아 돈을 번 증권사는 없다"라고 잘라 말했다. 2000년을 맞이해 각 증권사는 장기 비전으로 모건스탠리 딘위터·골드먼삭스·메릴린치와 같은 미국식 '투자 은행'으로 발전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이 역시 지지부진하다(오른쪽 상자 기사 참조).

지난해 7월부터 채권 시가 평가 제도가 시행되면서 증권회사들 중에서는 채권에 투자했다가 손실을 보는 경우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채권으로는 손해를 보지 않는다'는 고정 관념이 깨진 것이다. 특히 회사채 시장이 얼어붙으면서 채권 시장에서는 '안전한' 국공채와 A등급 우량 기업 회사채만이 유통되어, 채권 거래를 통한 수익률도 예전만 못하게 되었다.


외국 증권사 "한국 시장 공략할 절호의 기회"


그래서 각 증권사 채권 담당 매니저 중에서 '폭탄 돌리기'를 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국고채를 사들인 뒤 이윤을 붙여 다른 매니저에게 넘기고, 나중에 다시 사들이는 방식으로 서로 '이익'을 보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국고채 금리를 낮추는 큰 요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지난 3월7일 한국은행 전철환 총재가 국고채 시장이 너무 과열되어 있다고 지적하자 금리는 폭락했다. 그때 '폭탄'을 떠안았던 채권 매니저는 큰 손실을 입었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의 말이다.

대형 증권사에 비해 지점 수가 부족할 뿐만 아니라 IT 분야에 제대로 투자하지 못하는 소형 증권사는 훨씬 어려운 처지다. 소형 증권사는 개인 투자자를 상대하는 것보다 투자신탁회사에서 주문을 받아 거래를 중개하는 법인 영업으로 더 많은 수입을 올렸다. 그러나 지난해 6월 투신권 주문 물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한국투자신탁·대한투자신탁이 투신 업무를 따로 분리해 증권사로 업종을 바꾸면서, 소형 증권사는 주수입원인 법인 영업 물량을 상당히 잃었다.

이렇게 국내 증권업체들이 어려운 상황에 빠져 있는 반면, 막대한 자금력과 첨단 금융 기법으로 무장한 외국 증권사들은 지금을 한국 시장을 공략할 호기로 여기고 있다. 지난 1월 증권업 관련주 중에서 투자자들이 가장 주목한 것은 동양증권이었다. 미국 증권사 메릴린치가 동양증권을 인수해 한국 시장에 뛰어든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샐러먼 스미스 바니·크레디리요네 등 외국 금융기관들이 머지 않아 국내 중소형 증권사를 사들일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외국 증권사가 한국 시장에 진입할 경우 '지금 당장'은 큰 위협이 아닐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한국 시장을 상당 부분 내줄 가능성이 높다. 현재 업계 1위인 삼성증권의 경우 1992년 지점 10개뿐인 국제증권을 인수해 증권업에 뛰어들어 10년도 채 안되는 기간에 선두 주자로 성장했다. 삼성증권보다 '브랜드 파워'가 더 강한 메릴린치가 한국에 진출할 경우 업계 판도에 미칠 영향은 불 보듯 뻔하다.

이제 증권회사들은 중요한 기로에 놓여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수수료 수입만으로 이익을 내기 어려운 상황에서 외국 금융기관이 한국 시장을 본격 공략한다면, '생존 가능성'이 높은 증권사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증권업 관계자 중에는 앞으로 종합증권회사로서 살아 남을 만한 국내 증권사는 한두 개밖에 없다고 보는 이도 있다. 나머지 증권사들은 한두 가지 분야를 특화한 전문 증권사로 발전하든가, 고급 고객을 상대하는 소규모 '부티크' 증권사로 나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국내 대형 증권사들 합병에 부정적


외국 금융기관과의 경쟁에서 살아 남으려면 대형화는 필수 조건이다. 아직 국내 대형 증권사들은 합병을 통한 '몸집 불리기'에는 부정적이다. 현대증권 권성철 전무는 "우리는 합병이 쉽지 않은 문화다. 깨질 가능성도 높다"라고 잘라 말했다. 하지만 굿모닝증권 강창희 상임고문은 앞으로 합종연횡은 더 이상 '선택 사항'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는 국내 증권사가 살아 남으려면 외국 자본과 손을 잡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본다. 그가 드는 사례는 일본 닛코 증권이다. 닛코 증권은 시티코프와 합작한 뒤 기업 금융 분야에서 '부동의 1위'였던 노무라 증권을 꺾는 데 성공했다.

어떤 형태로 닥쳐오든 증권업계의 '빅뱅'은 피할 수 없는 대세라는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말이다. 그 과정에서 증권업 종사자 감원은 불가피하다. 아직까지 인위적으로 인원을 줄인 증권사는 올해 초 2백명을 '희망 퇴직'으로 정리한 대우증권뿐이다. 증권산업노조 정동건 위원장은 "아직 큰 위기 의식은 느끼지 않고 있다"라고 말하면서도, 오는 5월 증권사 주주총회가 끝나면 적자 증권사들을 중심으로 감원이 시작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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