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을 연착륙시켜라"
  • 장영희 기자 (jjang@e-sisa.co.kr)
  • 승인 2001.03.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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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지난해부터 '경영 세습' 전방위 정지 작업…'3세 시대' 개막

사진설명 '후계자' : 이재용씨는 마침내 삼성 입성에 성공했다.

"지금이 봉건 시대도 아니고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경영 능력이 유전되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3세까지 그럴 수 있느냐."3월9일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삼성전자 주주총회에서 참여연대 김기식 정책실장은 윤종용 주총 의장(삼성전자 부회장)에게 이렇게 따져 물었다.

'델리케이트한 문제지만 답변하겠다'고 운을 뗀 윤의장은 "이재용씨 인사 문제는 경영 판단에 맡길 사안이지 주주가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며 법적으로도 문제 없다"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근무조차 안한 재용씨가 만명이 훨씬 넘는 과장·부장급 직원들을 제치고 임원 승진을 할 만큼 회사에 기여한 것이 무엇이냐'고 재차 따지는 김실장에게 "김기식이 네가 와서 삼성 인사 다해라"는 막말도 서슴지 않았다.

윤의장이 '능력 있고 겸손하며 괜찮은 사람'이라고 평한 이재용씨(33)는 3월10일 삼성전자 이사회에서 기획 담당 상무보(비등기 사내 이사)로 선임되었다. 이로써 이재용씨는 삼성의 중핵 기업인 삼성전자 임원 자리를 디딤돌로 3세 체제의 서막을 열었다. 삼성은 삼성 본관 25층에 이재용씨 방을 마련하는 등 그를 맞을 만반의 채비를 갖추었다. 같은 층에 윤부회장 집무실이 있고 26층에 구조조정본부가 있는 것으로도 이재용씨 방의 무게와 상징성은 입증되고 남는다.

따지고 보면 이재용씨는 이미 '차기 회장'으로 대접받고 있었다. 구조조정본부는 이건희 회장에게 2주일에 한 번꼴로 올리는 그룹 경영 동향 보고서를 올해 들어 이재용씨에게도 올리고 있다. 특히 이재용씨에게는 '맞춤 정보'제공 차원에서 재계 2, 3세 및 벤처 기업 CEO에 대한 동향 정보를 덧붙여 올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직 이재용씨의 삼성 시대가 어떤 모습으로 전개될지를 예측하기는 이르다. 당장 그의 구체적 역할에 대해서도 그리 알려진 것이 없다. 재계의 한 고위 관계자는 "후계자로서 경영 수업인 만큼 그룹 상황 전반을 들여다보되, 특히 미래 구상에 역점을 둘 것이라고 들었다"라고 말했다. 2010년 삼성의 전략과 비전을 설정하는 일을 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윤부회장을 비롯해 삼성의 최고 경영자들은 그를 코치하는 조련사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재용씨의 입성은 시기나 방식이 결정되지 않았을 뿐 오래 전부터 예고된 일이었다. 삼성은 지난해부터 이회장의 나이 등 여러 요소를 감안해 2001년이 적기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지난 2월28일 아들의 경영 참여를 기정사실화한 직후 이회장은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을 불러 만반의 채비를 갖추고 이재용씨 문제를 정면 돌파하라고 지시했다.

삼성이 이재용씨 경영 참여를 위한 사전 정지 작업에 본격 착수한 것은 것은 지난해 말부터였다. 치밀한 사전 작업의 키워드는 '전략적 홍보 기능 강화'였다. 겉으로는 경영 효율성 제고와 전략적 대외 이미지 관리를 내세웠다. 하지만 전략 홍보의 핵심 목표는 이재용씨가 삼성에 착지하기까지 마찰음을 최소화하도록 사회 심리적 여건을 조성하는 데 있었다.

이재용씨가 연착륙할 환경을 만들기 위해 삼성은 정치권·관계·언론과 삼성과 친한 기업 등에 조용하게 협조를 당부하는 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했다. 이러던 차에 희소식이 들렸다. 2월 중순께 이남기 공정거래위원장이 청와대에 '삼성 변칙 세습 건에 대해 법적으로는 대응할 수 없다'는 요지로 보고한 사실을 접했던 것이다.

정부가 손을 들었지만, 남은 문제는 역시 눈엣가시 같은 참여연대였다. 아직 법적 공방이 남아 있지만, 삼성을 더 괴롭힌 것은 참여연대의 공론화 활동이다. 삼성이 건물을 지어 싸게 임대한 국세청 앞에서 참여연대가 1인 시위를 계속하는 등 끈질기게 삼성의 변칙 증여 및 경영권 세습 반대 운동을 펼쳤기 때문이다.


참여연대·SK 밀월설도 유포


사진설명 "한판 붙자" : 삼성전자와 참여연대는 3월9일 주총장에서 이재용씨 임원 선임 문제, 전성철·이학수 이사 선임 문제 등을 둘러싸고 7시간30분에 걸쳐 격렬한 공방을 벌였다. 삼성은 표대결에서 승리했고, 참여연대는 독립적인 사외이사의 중요성을 이슈화하는 데 성공했다. ⓒ시사저널 안희태

급기야 삼성은 참여연대의 도덕성과 공정성에 흠집을 낼 재료를 찾기 시작했다. 참여연대의 집중 감시 대상이 삼성전자뿐 아니라 SK텔레콤이라는 사실에 착안한 삼성은 참여연대가 SK와 밀월 관계를 구가하고 있다는 점을 집중 유포했다. 삼성이 그 근거로 제기한 것은 세 가지. 지난해 참여연대가 추천한 SK텔레콤 사외이사가 스톡옵션을 받았는데도 문제 삼지 않았고, SK씨앤씨를 통한 최태원 회장의 경영권 강화 시도에도 침묵했으며, SK의 내부 거래에도 이렇다 할 언급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참여연대나 SK는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참여연대는 스톡옵션 건은 삼성전자가 물의를 일으킨 실권주와는 차원이 다른, 사외이사로서 정당하게 받을 권리에 속하며, 내부 거래 건은 1999년 문제 제기를 했으며, SK씨앤씨 건은 3월16일 주총에서 제기하겠다고 밝혔다.

전방위로 정지 작업을 벌인 삼성이 여론 형성에 중요 창구인 언론을 빠뜨릴 리 없다. 역시 삼성의 무기는 한국에서 가장 많은 광고비를 지출하는 회사답게 광고였다. 한 재계 관계자의 전언에 따르면, 삼성은 매년 1월, 늦어도 2월에는 주요 언론사와 연간 계약을 맺어 왔다. 그런데 올해는 삼성측이 노골적으로 삼성전자 주총 후에 보자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광고 로비가 상대적으로 덜 먹힌다는 '조·중·동' 빅3에도 이런 제안을 했는데, 결국 주총을 보도한 수위를 보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것 아니냐"라고 주장했다.

이재용씨는 서울대(동양사학과)·일본 게이오 대학(경영학)을 거쳐 미국 하버드 대학 비즈니스 스쿨을 나왔다. 허리 디스크로 군입대를 면제받은 것이 옥에 티지만, 그가 전도 유망한 젊은이라는 점은 틀림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는 변칙 증여 시비에다 삼성이 총수의 아들을 입성시키기 위해 치밀하게 사전 정지 작업을 한 덕택에 경영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세간의 의혹에서 자유롭지 않다. 더구나 그의 경영 능력은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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