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산업의 거인들⑥] 휴렛팩커드 칼리 피오리나 회장
  • 이문환 기자 (lazyfair@e-sisa.co.kr)
  • 승인 2001.04.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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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화력으로 무장한 신경제 '잔다르크'


그녀는 새벽 4시에 일어나 새들에게 모이를 주면서 사업을 구상한다. 휴렛팩커드(HP) 칼리 피오리나 회장의 하루는 그렇게 시작된다. 미국 경제지 〈포춘〉이 1998년부터 선정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최고경영자'에서 한 번도 1위 자리를 놓친 적이 없는 그녀는 미국 30대 기업 회장으로 취임한 최초의 여성이다.




올해로 46세인 피오리나는 지독한 일벌레인 동시에 조르지오 아르마니를 즐겨 입는 세련된 감각을 지녔다. 게다가 달변이다. HP 최고경영자 후보로 물망에 올랐을 당시 그녀는 이사 중 한 사람인 리처드 핵본과 점심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 1980년대 프린터 사업으로 HP의 '황금 시대'를 이끌었던 핵본은 회사에 꼭 필요한 인물이지만 자선사업을 하기 위해 은퇴를 결심한 참이었다. 하지만 그녀와 대화를 나눈 뒤 핵본은 은퇴 결정을 철회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를 최고경영자로 추대하게 되었다.


당시 HP가 필요로 하는 것은 활력소였다.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 중 하나로 매년 매출과 순이익은 꾸준히 상승했지만 주력 제품은 늘 PC·프린터여서 발전이 없었다. 1980년대 잉크젯 프린터를 시장에 낸 이래, HP는 이렇다할 혁신적인 제품을 내놓지 못했다. 새로운 돌파구를 찾지 못한다면 HP는 신경제에 적응하지 못하고 멸종하는 '공룡'이 될 수 있었다.


종업원에게 꽃 보내고 의사 추천도


피오리나에게는 이미 '굴뚝' 기업을 인터넷에 걸맞는 첨단 기업으로 탈바꿈시킨 경험이 있었다. 1996년 루슨트 테크놀로지가 AT&T에서 분사해 나오자, 이 회사를 전화 장비를 만드는 구닥다리 기업에서 신경제 인프라를 구축하는 첨단 기업으로 만든 주역이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그녀는 1998년 루슨트 사장에 취임했다. 루슨트에서 일하면서 그녀는 부하 직원들에게 섬세한 관심을 기울였다. 종업원들이 큰 계약을 따내면 꽃과 선물을 보내 축하하고, 직원의 아내가 병에 걸리면 잘 아는 의사를 추천하는 등 자상한 모습을 보였다.


1999년 7월 회장으로 취임하자 피오리나는 HP를 인터넷 강자로 만들기 위해 '재창조'를 단행했다. 그녀의 목표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통합하는 인터넷 기업이었다. 취임 직후 그녀는 83개 사업 부서를 4개로 압축했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부서장들에게 '왜 해당 부서 사업이 필요한지' 입증하라고 요구했다. 마케팅 담당자들에게는 HP의 광고·브랜드 이미지를 새롭게 구축하라고 지시했다. 연구소 직원들이 혁신적인 제품을 개발해 내도록 성과급 체제를 재정비했다. 그녀는 전임 회장 루 플랫과 달리 대중 앞에 직접 나서서 특유의 열정적인 목소리로 'HP 방식'을 전도했다. 그녀를 직접 만나본 이들은 "피오리나는 정말 환상적인 여자다"라고 말한다. 취임한 지 2년도 안되어 그녀는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HP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피오리나가 지난해 받은 성적표는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2000년 3/4분기 실적에서 매출액은 늘었지만 이익은 줄어들었다. '천지창조'나 다름없이 대대적으로 조직을 재구축하다 보니 비용 관리에 실패한 것이다. 월 스트리트 애널리스트들은 그녀가 너무 서두르다가 장애물에 부딪혔다고 평했다. 경영 전문가들은 그녀가 추구하는 바는 옳다고 인정하면서도 HP와 같은 거대 기업에서 이와 같은 '혁명'은 아직 시도된 적이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게다가 올해 초부터 본격화한 경기 침체는 HP와 같은 IT 기업들의 발목을 붙잡고 있다.


하지만 강철 같은 의지를 지닌 피오리나는 '피오리나의 길'을 포기하지 않을 기세다. 그녀는 "도박을 하면서 승리할 가능성이 높다면 판돈을 두 배로 높이는 것이 당연하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지난 2월19일자 〈비즈니스 위크〉는 커버 스토리에서 그녀를 '극단주의자'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삶에 대해 불가해할 만큼 강한 열정을 갖고 있는' 자신의 어머니를 꼽는 피오리나에게 진정 어울리는 칭호는 '잔 다르크'일지도 모른다.


● 휴렛팩커드 :

1939년 빌 휴렛과 데이비드 팩커드가 설립했다. 실리콘밸리 제1호 기업.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 가운데 하나로 꼽히며, 특히 인간을 존중하는 기업 문화로 유명하다. 세계 제2위 PC업체이자 프린터 시장에서 세계 1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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