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를 기회로" 몸부림치는 벤처
  • 장영희 기자 (jjang@e-sisa.co.kr)
  • 승인 2001.05.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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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익 모델 구축·세계화로 생존 구슬땀


서울 테헤란밸리는 요즘 노란색 물결로 가득 찼다. '닷컴에 새 희망을 경제에 새 활력을'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노란색 깃발 하나하나에는 3백40개 닷컴의 이름과 인터넷 주소가 적혀 있었다. 한국인터넷기업협회가 4월23∼28일을 스프링 주간으로 정하고 테헤란밸리를 노란색으로 치장하는 이벤트를 한 것은 어려움에 처한 인터넷 기업들에 애정을 가져 달라는 호소를 담고 있다. 계절은 초여름을 향해 달려가고 있지만, 벤처 기업들에게는 봄이 느껴지지 않는다. 지난해 겨울에 불어닥친 뼈를 저미는 삭풍이 떠날 줄을 모르는 것이다.


감원 등 비용 절감만으로는 생존 어려워




'연어족' 출현은 벤처 붐이 사그라지고 있다는 단적인 지표이다. 대기업 출신 벤처인 가운데 대기업으로 'U턴' 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벤처 붐이 불면서 대기업에서 벤처로 이동 행렬이 이어졌던 1999년과는 분명 정반대 흐름이다. 고급 인력들은 왜 스톡옵션마저 포기하며 벤처를 이탈하는 것일까. 친정인 삼성전자로 돌아간 한 차장은 "1인 2∼3역을 해야 하는 노동 강도에 시달리는 데다, 조직 차원의 뒷받침 없이 모든 것을 알아서 처리해야 하는 현실이 너무 힘들었다"라고 말했다. 여기에 투자 환경이 급속히 위축되면서 성공 가능성에 대한 의문이 커졌다는 것이다. 취업 전문 업체 인크루트가 올 들어 3월 말까지 실시한 '직종 선호도 조사' 결과를 보면, 벤처 기업이 인기를 잃어감을 확연히 알 수 있다. 지난해 말까지도 80% 선을 넘었던 벤처 기업에 대한 선호도는 50%대로 뚝 떨어졌다. 지난해 3월 3.9%였던 대기업에 대한 선호도가 최근 31%로 급상승한 것과 대조적이다.


물론 벤처 기업들은 직원들의 사기를 끌어올리고 고급 인력을 붙잡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전자 상거래 e마켓 플레이스 업체인 매크로21은 영업 실적이 좋거나 기발한 아이디어를 낸 직원에게 가상 주식(e STOCK)이라는 인센티브를 주고 있다. 가상 주식은 회사가 코스닥 시장에 등록될 경우 실물 주식으로 교환되므로 실제 주식을 받는 것이나 다름없는 효과가 있다. 시스템 미들웨어 개발업체인 인프론테크놀로지가 연초에 당기순익의 일정 비율을 임직원에게 할당한다는 계약을 노사 간에 체결한 것도 사기진작책의 일환이다.


벤처 기업들이 어려움에 빠졌음은 그 대부분이 여전히 '구조조정중'이라는 데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특히 지난해 4월 '닷컴 위기론'이 불거진 이후 닷컴 경영자치고 구조 조정을 실행하지 않은 이는 없다시피 하다. 사무실 크기를 줄이는 등 대대적인 비용 절감에 나서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 임차료가 비싼 테헤란밸리를 떠나 서울 외곽으로 피난하는 벤처 기업도 지난해 말부터 부쩍 늘어나고 있다. 광고·마케팅 비용도 50∼90%까지 대폭 축소했다.


닷컴의 대표 주자인 다음커뮤니케이션즈(다음)는 올 1분기에 1억원도 채 쓰지 않았다. 지난해 같은 기간 13억원을 썼던 것과 좋은 대비가 된다. 지난해 1/4분기에 광고·마케팅비를 무려 30억원이나 쓴 라이코스코리아가 올해 15억원으로 50% 줄인 것은, 그마나 소폭 조정한 축에 속한다. 지난해 텔레비전 화면에 넘쳐났던 닷컴 광고를 요즘 찾아보기조차 어려운 것은 이 때문이다. 사람을 20∼50% 줄인 닷컴도 부지기수다.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 업체인 드림라인은 직원을 30% 가량 줄였고, 인터넷 카드 업체인 레떼닷컴은 50% 감원을 단행했다.


이렇게 비용을 줄이면 생존이 가능할까. 겨울잠을 자듯 연명할 수는 있지만, 살아 움직이는 기업의 생존 전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닷컴 주자들이 위기에 처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수익 모델 부재에 있었다. 인터넷 산업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이는 없지만, 개별 기업들의 수익성에 대한 의문이 커지면서 많은 투자자가 등을 돌렸다. 벤처 캐피털은 지난해 11월 이후 서서히 활기를 되찾고 있지만, 인터넷 기업 심사역들은 한가하기만 하다. '닷컴은 절대 손대지 말라'는 상급자의 명령 때문이다.


'선택과 집중'으로 비즈니스 모델 강화해야




따라서 닷컴에 진정한 의미의 생존 전략은 이른바 '선택과 집중'을 통해 비즈니스 모델을 새로이, 혹은 훨씬 강력하게 구축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인츠닷컴 이진성 사장은 지난해 핵심 역량과 상관없는 사업을 과감히 정리했다. 2000년 매출액이 1999년보다 5배 이상 늘어난 1백80억원이었지만, 온라인 사업은 수익을 내기가 어려웠고 전망도 불투명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사장은 온라인 사업을 완전히 정리한 것이 아니라 이를 기반으로 오프라인에서 수익을 창출하는 전략을 택했다. 야후 같은 강력한 온라인 브랜드를 가진 기업들이 오프라인 제조 상품에 뛰어든 것도 수익 찾기의 일환이다. 야후는 생활 전반에 걸친 제조 상품을 야후 브랜드로 선보일 작정이다. 웹앤텍·임펙트온라인·이앤티 같은 회사들은 돈이 안되는 인터넷을 주력 사업에서 도구로 전환하고 컨설팅 등의 새로운 수익원을 찾고 있다.


'순수 닷컴'들은 컨텐츠 유료화가 강력한 대안일 수밖에 없다. 다행스러운 것은 네티즌 사이에서 인터넷은 공짜라는 시각이 엷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자 우편 마케팅 전문 기업인 에이메일이 3월 말 네티즌 9백48명을 조사한 결과 70%에 가까운 네티즌이 유료화해도 자신이 필요한 사이트는 이용하겠다고 응답했다.


여기에 고무된 닷컴들은 돈을 받을 수 있는 컨텐츠 개발에 매달리고 있다. 현재 유료화에 적극적인 업체는 게임·만화·증권 정보·영화·성인물·교육 정보 등을 서비스하는 닷컴들. 세이클럽의 일부 서비스를 유료화한 이후 월 매출 8억원을 올리는 네오위즈나 게임 업체 CCR, 한게임을 유료화한 네이버 등은 현재 순항하고 있다. 이들이 유료화에 성공한 것은 재미가 없으면 인터넷이 아니라는 한 포털 사이트의 광고처럼 컨텐츠가 재미있고 유용하기 때문이다. 다음도 일부 서비스를 곧 유료화할 작정이다. 다음·야후·라이코스 같은 포털 업체들은 광고 매출이 압도적으로 많지만, 전자 상거래 쪽으로 관심을 옮기고 있다. 결국 돈 되는 곳으로 '헤쳐 모여'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벤처 기업들의 생존 전략으로 수익 모델 못지 않게 중요해진 것이 세계화이다. 국내는 경쟁도 격심하거니와 세계 시장에 내놓아 경쟁력이 없으면 투자를 유치할 꿈도 꿀 수 없기 때문이다. 음성 데이터 통합 솔루션 업체인 코스모브리지는 일찍부터 세계화에 눈을 돌렸다. 1998년 미국 법인, 지난해 일본 법인을 세운 이 회사는 철저한 현지화 전략이 주효해 지난해 매출(1백2억원)의 20%를 해외에서 올렸다.


성공적으로 일본 시장에 진출한 전자 상거래 구축 업체 이네트의 사례도 주목할 만하다. 안철수연구소 안철수 사장은 "작은 벤처들은 당장 살아 남는 데 급급할 수밖에 없지만, 중견 벤처로 덩지가 커진 이후에는 글로벌 스탠더드에 몸을 맞추지 않으면 생존조차 어려워질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최근 미국 보안 컨퍼런스를 다녀온 안사장은 매출 수조원대의 세계 거대 벤처 기업들이 눈이 나올 만큼 빠른 속도로 기술을 개발하는 것을 보면서 가슴이 서늘해졌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벤처 기업들은 1999년 극단적인 호황을 경험했다. 그리고 2000년 4월 이후 호황의 정도보다 훨씬 심한 불황에 직면했다. 한국의 경우 진폭이 워낙 컸지만, 벤처 붐이 사그라진 것은 비단 한국만의 현상이 아니다. IT(정보기술) 종주국인 미국 역시 닷컴들이 1주일에 10여 개씩 몰락하고 있다. 벤처 투자 자금이 얼어붙은 것도 크게 다르지 않다.


문제는 벤처 거품이 해소되는 현상을 어떻게 볼 것이냐이다. 한국개발연구원 성소미 연구위원은 "1년 간격으로 전개된 코스닥 시장의 호황과 불황은 그 어느 것도 정상이 아니었다. 벤처가 많아졌다고 해서 한국 벤처 산업의 역량이 획기적으로 늘어났다고 볼 만한 근거는 없으며, 거품이 꺼진다고 해서 벤처의 기반이 와해되고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성연구위원은 오히려 한국 벤처 산업이 1990년대 후반의 강제된 성장에서 시장에 기반을 둔 성장으로 옮아가는 것을 매우 고무적 현상으로 본다.


세계 시장 누빌 벤처 기업 적어


벤처 전문 컨설팅 업체인 인터벤처 유효상 사장은 현재 벤처업계의 상황을 경쟁력이 있는 기업과 없는 기업의 자연스러운 선별 과정으로 이해했다. 한마디로 옥석 가리기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휴맥스·안철수연구소·엔씨소프트·로커스 같은 스타 벤처 기업들은 벤처위기론에도 불구하고 올 1/4분기 매출이 크게 늘어났다. 이들 외에도 확실한 기술력에 마케팅 능력까지 겸비한 예비 스타 벤처도 속속 출현하고 있다. 문제는 경쟁력 없는 벤처 기업들이 제대로 도태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유사장은 "벤처는 다산다사 기업이다. 많이 생기고 또 많이 죽어야 한다. 시장에서 인정받지 못하는데도 살아 있는 것이 오히려 벤처의 신진대사를 방해하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벤처 붐이 꺼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변화들은 이뿐만이 아니다. 올 들어 코스닥 시장에 등록한 벤처 기업들은 '소금처럼 짠' 공모가를 실감해야만 했다. 1999년에는 본질 가치의 몇 배를 거뜬히 받았지만 요즘은 본질 가치를 웃도는 공모가만 받아도 다행으로 여기게 된 것이다. 물론 일부 벤처 기업 사장들은 "과거 공모가가 지나치게 부풀려져 있었다면 지금은 너무 박하게 책정되고 있다"라고 불만을 터뜨리고 있지만, 서서히 제 궤도를 찾아가리라는 것이 증권가의 지배적인 견해다.


창업자라고 해서 꼭 사장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등식도 무너져 가고 있다. 홈페이지 저작 도구인 웹에디터로 유명한 나모인터랙티브는 지난 4월 초 최준수 부사장을 사장으로 선임했다. 공동 대표를 맡아온 1대 주주 김흥준 사장과 2대 주주 박흥호 사장은 각각 신규 및 해외 사업 담당 이사, 제품개발 담당 이사로 물러앉았다. 자기가 잘할 수 있는 분야에 집중해 기업 가치를 키우겠다는 것이다. 벤처 기업은 어떤 측면에서는 수익 모델보다 CEO(최고 경영자)가 중요하다는 것이 정설이다. 특히 엔지니어 출신 경영자는 기업이 커지면 성장을 방해할 위험이 있다. 기술력 못지 않게 시장 흐름을 읽고 내부 역량을 잘 조직하고 마케팅하는 CEO의 종합적인 경영 능력이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의 벤처 기업 수는 만개를 넘어섰다. 벤처위기론 속에서도 창업이 더욱 늘어난 것이다. 고무적인 일이지만, 그것이 벤처 중흥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세계 시장을 무대로 뛸 수 있는 벤처 기업 수는 채 한 줌도 안된다. 정회훈 이커뮤니티 사장은 "벤처 기업의 기술 및 시장 개발 능력, 벤처 캐피털의 심사 및 투자 능력, 컨설팅 회사 등 벤처 지원 분야의 능력이 모두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아야 가능한 일이다"라고 지적했다. 한국벤처기업협회 장흥순 회장은 여기에 대학이 고급 인력을 공급하고, 코스닥 외에도 기업 합병·매수(M&A) 시장이라는 자금 회수 시장이 발달해야 '벤처 생태계'가 제대로 형성된다고 말했다.


현재 한국 벤처는 시작과 성장 사이의 간극에 놓여 있다. 2001년 4월은 상당수 벤처 기업들에게는 벤처의 생존력을 시험하는 '잔인한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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