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 속에 뜨는 직종
  • 이문환 기자 (lazyfair@e-sisa.co.kr)
  • 승인 2001.08.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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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언어 하면 취업 '귀하신 몸'/

컴퓨터 보안 전문가·유통 바이어 등 '유망'


서울 서초구에 자리 잡은 비트 교육센터 지하 1층 세미나실. 테이블마다 5∼6명씩 모여 그룹 스터디를 하는 수강생들로 가득했다. 소수 정예 교육으로 이름 난 이 학원의 교육 과정을 따라가기 위해 수강생들은 아침 8시30분에 등교해 밤 10시에 귀가하는 것이 보통이다. 1990년 문을 연 뒤부터 취업률 100%를 지켜온 정보기술(IT) 전문 교육기관인 이 곳은 취업난으로부터 '무풍지대'이다.




경기가 침체하면서 취업문은 좁아지고 실업자는 늘고 있다. 지난 8월16일 통계청이 발표한 '7월중 고용 동향'에 따르면 올해 2월 이후 감소해 온 실업률은 지난 7월에 다시 증가세로 돌아섰다. 최근 3개월 동안 구직 활동에 나섰지만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실업자 수도 6월과 비교해 4만4천명이나 증가했다. 전세계적으로 침체기에 빠진 IT산업도 마찬가지. 한국에 진출한 외국계 통신 장비 회사와 반도체 관련 기업들은 한국 지사 설립 계획을 유보하고 신규 채용을 중단한 채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다.


역설적인 것은 IT산업이 침체에 빠진 상황인데도 최근 국내 채용 시장을 주도하는 산업이 바로 IT라는 사실이다. 어떤 운영체제(OS)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인터넷 언어 '자바' 전문가와 프로그래밍 언어의 기본인 C·C++ 전문가는 공급이 달린다. 솔루션·게임 프로그래밍 개발 등 다방면에서 쓰이는 C 프로그래머처럼 오랜 시간을 들여 양성해야 하는 전문가는 태부족이다. 비트교육센터 오우영 팀장은 "지방 대학 전산과에 강의를 나갔더니 학생 40명 중 C 언어를 구사할 줄 아는 이는 1명뿐이었다"라고 말했다.


컴퓨터 바이러스와 해킹에 의한 피해가 늘어나면서 보안 전문가의 몸값은 부르는 것이 값이다. 보안 솔루션 업체·금융권·IT 업체 등 이들 전문가를 요구하는 곳은 많지만 실력 있는 이가 부족해 업체들 사이에서 인력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기도 하다. 기존 개인용 컴퓨터를 핸드폰·개인 휴대 단말기(PDA) 등 무선 단말기들이 대체하기 시작하면서 이를 개발할 하드웨어 엔지니어의 몸값도 상한가를 치고 있다. 관련 업체 중에서는 엔지니어를 구하지 못해 사업 진행을 미루는 곳도 적지 않다.


D램 가격이 폭락해 불황에 처한 반도체 분야에서도 4∼5년 뒤 '효자 상품'이 될 초박막 액정 표시장치(TFT-LCD) 개발자나 반도체 회로 설계 전문가를 구하지 못해 안달인 업체가 많다. 최근 IT 전문 구인구직 사이트 'www.ithr.co.kr'를 개설한 'HR 코리아' 정철호 상무는 "반도체 회로 설계자들은 10년 경력 팀장급의 경우 사이닝 보너스(이직할 때 계약금조로 받는 돈)만으로 1억원을 받고 4∼5년차의 경우 5천만원은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라고 말했다.


CCIE·AICPA 자격증 소지자 '모시기 전쟁'




실무 능력을 겸비한 자격증 소유자의 몸값도 오르고 있다. 미국 네트워크 장비 업체 시스코가 발급하는 '시스코 네트워크 최고 전문가'(CCIE) 자격증 소지자나 데이터베이스 업체 오라클·SAP 등이 인정하는 데이터베이스 전문가들이 그러한 예. 특히 CCIE는 기업들이 인터넷으로 각 부서를 연결하면서부터 네트워크를 안정적으로 관리할 필요성이 높아져 수요가 늘고 있는 자격증이다. 2차 시험을 미국 현지에서 치러야 할 뿐만 아니라 최소 5년 이상 실무 경험이 있어야 합격할 수 있어 희소 가치도 높다. 1997년 자격증을 따낸 네트워크 통합(NI) 업체 '데이타 크래프트 코리아' 이종택 부장의 말에 따르면, 이 시험에 합격만 하면 연봉이 적어도 70%가 오를 뿐만 아니라 헤드헌터로부터 이직을 권유하는 전화가 빗발친다.


정보통신·제조 등 업종을 불문하고 불경기일수록 업체들이 찾는 것은 뛰어난 영업·마케팅 전문가. 특히 수익 모델은 있지만 영업력이 부족한 벤처 기업들 중에서 이런 인력을 스카우트하려는 업체가 많다.


유통업과 서비스업은 불경기에서도 꾸준히 고용을 늘리고 있는 업종이다. 외국계 할인점이 국내에 진출하면서 외국사와 국내사 간에 '국적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유통업의 경우 영업·유통 전문가의 필요성이 꾸준히 높아지고 있다. 연세대 김농주 취업담당관은 기업의 상품 구매를 전담하는 '유통 바이어'를 앞으로 유망한 전문 직종으로 꼽는다. 외식 산업이 발달하면서 패밀리 레스토랑의 매니저도 새롭게 조명되는 직업이다.


1997년 외환 위기를 겪은 이후 인력 시장에서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기업들도 좀더 '세계화'한 인재를 찾는다는 점이다. 외국 기업들이 국내 진출을 가속화하면서 국제 회계 기준에 정통한 미국공인회계사(AICPA) 자격 소지자를 찾는 국내 기업들은 계속 늘어날 전망이다. 외국 금융기관에서 애널리스트·펀드 매니저를 맡으려면 필수나 다름없는 공인재무분석사(CFA)도 최근 인기를 끄는 자격증이다. 지난 6월 공인재무분석사 시험에 응시한 한국인은 총 3천157명. 지난해와 비교해 47.5%나 급증한 숫자다.


이처럼 인력 시장이 세계화하면서 외국 대학에서 경영학 석사(MBA) 과정을 수료하고 미국공인회계사 자격증을 갖고 있는 이들은 연봉이 7천만원∼1억원 선에서 결정될 정도로 '귀하신 몸'이다. 헤드헌팅 업계 관계자들은 어떤 업종에서든 임원·최고경영자 급으로 승진하려면 경영학 석사 자격은 필수인 시대가 올 것이라고 덧붙인다. 마케팅·인사관리에 대한 지식도 중요하지만 기업체에서 오래 살아 남으려면 무엇보다도 재무에 밝아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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