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승장구' 정몽구, 호사다마
  • 소종섭 기자 (kumkang@e-sisa.co.kr)
  • 승인 2001.09.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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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열사 늘리며 자동차 전문 그룹 변신 '착착'…
DJ와 밀월설·대우차 위탁 가능성 '돌출'


현대자동차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리는 모터쇼에 해마다 직원을 수백명씩 보냈으나 올해는 인원을 많이 줄였다. 올해 모터쇼에 갈 차례여서 잔뜩 기대했었다는 한 직원은 정몽구 회장이 위기 관리 경영을 선포하는 바람에 파견 인원이 줄어들어 기회를 잃었다며 아쉬워했다. 정회장이 "경제 여건이 불투명한 만큼 위기 관리 경영에 돌입해야 한다"라고 말한 것은 8월 중순에 열린 임직원 월례 조회 때이다.


올 상반기에 6천1백5억원의 당기 순이익을 올리고 현금 보유액이 2조원이 넘는 등 창사 이래 최대 실적을 올린 시점에서 정회장은 왜 위기 관리 경영을 선포했을까.


잘 나가는 판에 '위기 관리 경영' 선언한 까닭




현대자동차의 한 관계자는 "너무 들떠 있다. 사방에서 과실을 나누어 먹자고 덤벼들고 있다. 실제 이상으로 기대치가 높아진 이런 상황이 진짜 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현대자동차가 잘 나가게 된 배경에는 자체 경쟁력도 있지만 저금리나 환차익, 대우자동차의 경쟁력 약화에 힘입은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하루가 다르게 외부 여건이 바뀌고 있는 것도 정회장이 위기 관리 경영을 강조한 배경 중 하나이다. "지난해 미국은 한국 차 48만대를 수입했으나 한국이 수입한 미국 차는 2천대에 불과하다"라는 토머스 허바드 신임 주한 미국대사의 말은 앞으로 자동차에 대한 미국의 통상 압력이 만만치 않을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현대자동차는 미국에 현지 공장을 세우는 계획을 추진하는 등 통상 압력에 대비하고 있다. 이밖에 거대 시장으로 떠오른 중국을 어떻게 공략할지, 대우자동차가 어디로 갈지도 현대자동차의 앞날에 큰 영향을 미칠 사안들이다.


그러나 재계 주변에서는 또 다른 관점에서 정회장의 말을 주목하고 있다. 그의 놀라운 쾌속 질주 때문이다. 지난해 9월1일 11개 계열사를 이끌고 현대그룹에서 분가한 그는 1년이 지난 지금 20개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다. 불과 1년 사이에 계열사를 9개나 늘린 것이다. 왜 이렇게 급하게 사업을 확장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 일부에서 나올 정도이다.


지난 8월28일, 현대자동차그룹에 속한 현대모비스는 대우종합기계가 갖고 있던 한국철도차량의 지분 39.18%를 사들였다. 이로써 현대자동차그룹은 현대자동차가 갖고 있던 39.18% 지분을 더해 78.36% 지분을 확보함으로써 한국철도차량의 경영권을 장악했다. 이 회사는 철도 사업 부문에서는 국내에서 유일한 회사여서 짭짤한 수익을 거두는 것은 시간 문제라는 것이 재계의 평가이다.


이에 앞서 8월21일에는 현대할부금융이 다이너스카드를 인수해 신용 카드 업계를 흔들어놓았다. GM 등 세계적인 자동차 회사들의 경우 전체 수익에서 할부 금융 분야가 20% 이상을 차지하는 반면 현대자동차는 현재 10%대에 머무르고 있다. 현대자동차 관계자는 차를 구입하기보다는 임차한다는 개념이 확산되는 만큼 튼튼한 자본력을 갖출 필요가 있어 카드 사업에 진출했다고 말했다.


이미 자동차 핵심 기술을 개발하는 '엔지비'와 자동변속기를 만드는 '현대파워텍' 등을 설립한 정회장은 이들 기업까지 인수함으로써 현대자동차그룹을 자동차 전문 그룹으로 나아가게 할 기초 작업을 마쳤다. 내부적으로도 다임러크라이슬러와 합작을 성사시킨 주역인 현대자동차 김동진 사장과 현대자동차 해외사업본부장 등을 지낸 기아자동차 김뇌명 사장 등 해외 사정에 밝은 인사를 양대 축으로 삼아 수출 중심 조직 체계를 구축했다.


'자원화 사업' 사업권자 선정 되자 소문 무성




지난 8월1일, 현대모비스가 주축이 된 (주)김포에너지가 '수도권매립지 매립가스 자원화 사업'(약칭 '자원화 사업')의 사업권자로 선정된 것도 정회장의 약진과 관련해 주목되는 사례 가운데 하나이다. 현대모비스는 포스코개발과 치열한 접전을 벌인 끝에 천억원대 규모의 사업권을 따내 최종 승리자가 되었다.


정회장은 6월21일 청와대에서 김대중 대통령을 단독으로 만난 데 이어 22일에는 기아자동차 소하리 공장을 방문한 김대통령을 수행함으로써 자신의 위상을 한껏 높이기도 했다. 현대자동차 주변에서는 정회장이 한두 개 스포츠단을 더 인수하리라는 관측도 사그러들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정회장에게 유리하게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최근 증권가와 정치권에는 정회장과 관련한 소문이 부쩍 많아졌다. '정부와 현대자동차그룹 간에 밀월 관계가 형성되고 있다' '현대자동차가 여권의 정치자금 조성에 기여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는 말이 대표적이다. 한나라당 재경위의 한 관계자는 정회장에 대한 소문을 잘 알고 있으며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환경노동위원인 한나라당 오세훈 의원은 '자원화 사업' 사업권자 선정과 관련한 '정치권 배후설'을 조사하고 있는 중이다. 현대자동차의 한 관계자는 "정회장이 위기 관리 경영을 선포하며 분위기 전환을 시도한 배경에는 이런 정황도 깔려 있다"라고 전했다.


주목되는 것은 대우자동차 위탁 경영에 대한 현대자동차 주변의 반응이다. 진 념 재경부장관이 대우자동차를 위탁 경영할 가능성을 언급하는 등 최근 들어 GM의 대우자동차 인수는 점점 가능성이 낮아지는 분위기이다. 현대자동차 사정에 밝은 한 관계자는 6월21일 청와대에서 정회장과 김대통령이 만났을 때 김대통령이 대우자동차를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은지 물었다는 말이 있다고 전했다. 정회장은 기아자동차를 인수할 때 3천8백억원 규모의 부채를 탕감받는 등 정부로부터 도움을 받은 것에 대해 김대통령에게 고마움을 갖고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만약 정회장이 대우자동차 위탁 경영과 관련한 요청을 받을 경우 거절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현대자동차를 빼놓고는 대우자동차를 맡아 경영할 만한 곳이 없기 때문이다. 현대자동차의 한 관계자는 이런 고민을 전하며 '딜레마'라고 표현했다. 실무진은 시설도 낙후해 있고 차종도 겹쳐 전혀 이득이 없다고 강력히 반대하지만, 대우자동차 위탁 경영 문제는 이미 정회장에게 고민거리가 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이유에서일까. 현대자동차 주변에서는 앞으로 정회장이 해외에 나가는 일이 많아질 것이라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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