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4세 시대' 활짝/두산 박정원 사장
  • 소종섭 기자 (kumkang@e-sisa.co.kr)
  • 승인 2001.10.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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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 박용곤 명예회장 아들, 최고경영자 올라
재계에 4세 최고경영자(CEO)가 처음으로 등장했다. 아직 승계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재계는 이것을 한국 기업사에 새로운 장이 열리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주인공은 지난 10월10일 발표한 임원 인사에서 (주)두산의 상사BG(Business Group) 최고 경영자가 된 박정원 사장이다(아래 상자 기사 참조). 그동안 사장이 공석이어서 실질적인 사장 역할을 해왔기 때문인지 박사장 임명 소식을 들은 두산 관계자들은 별다른 느낌이 없는 분위기이다. 박사장은 박용곤 두산 명예회장의 장남으로, 두산 초대 회장 박두병-창업주 박승직으로 연결되는 창업주 가계의 장손이다.




박사장은 여러 모로 아버지인 박용곤 명예회장과 비교된다. 계열사 최고경영자가 된 것은 박명예회장이 훨씬 빨랐다. 박명예회장은 1963년 동양맥주에 입사해 3년 만에 최고경영자가 된 반면 박사장은 1985년 두산상사에 입사한 뒤 15년이 지나서야 최고경영자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지금대로라면 그룹의 대권을 물려받는 나이는 박사장이 박명예회장을 앞지를 가능성이 높다. 박명예회장은 49세에 가업을 물려받았지만 박사장은 현재 39세이기 때문이다. 박명예회장은 중간 단계를 생략하고 초고속으로 승진했지만 박사장은 이사·상무·전무·부사장을 차곡차곡 밟았다는 것도 다른 점이다.


박명예회장은 1985년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꼭 내 아들에게 회사를 물려줄 생각은 없다. 아들에게 자격이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지만 아들을 총수로 키우고 있지는 않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아들'이라는 점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회사를 경영할 능력이 과연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었다. 박명예회장의 언급은 그 자신의 경험과도 닿아 있다. 1973년 박명예회장의 아버지인 박두병 회장이 세상을 떠난 뒤 두산그룹은 7년 6개월간 전문 경영인 시대를 맞았다. 박두병 회장의 고교 9년 후배인 정수창씨가 이 시기에 두산그룹을 이끌었다. 박명예회장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8년 후인 1981년에야 가업을 물려받았다.


가족 기업에 대한 세계적인 연구기관인 국제경영개발원(IMD)은 매년 우수한 가족 기업을 한 곳씩 선정해 상을 주는데, 이 상을 받을 수 있는 기본 요건은 3대를 넘겨야 한다. 3대 정도는 지나야 가족 기업에 대한 총체적인 평가가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그동안 여기에 해당하는 기업이 없었는데 박사장이 가업을 승계한다면 두산그룹은 기본 요건을 갖추게 된다.


삼성경제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1965년 당시 국내 100대 기업 가운데 1995년에도 100대 기업으로 남아있는 기업은 16개 사에 불과했다. 두산그룹이 돋보이는 이유는, 이처럼 기업의 부침이 심한데도 100년 이상을 이어오며 4세 최고경영자까지 등장했기 때문이다. 두산그룹 김 진 상무는 "두산은 1896년 창업한 이래 지금까지 계속 재계 20위권 안에 들었다"라고 말했다.


"두산그룹 장수 비결은 형제간 우애"




두산그룹에서 4세 최고경영자가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김상무가 제일 먼저 든 것은 '인화(人和)'였다. 그는 "형제들이 싸움 한 번 없이 사이좋게 지내온 것이 두산이 지금까지 버텨올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비결이다"라고 설명했다. 현재 두산그룹에는 박명예회장을 비롯해 박용오 두산회장·박용성 두산중공업 회장·박용만 두산 전략기획본부 및 관리본부 총괄 사장 등 3세 경영인이 네 사람 포진해 있다. 하지만 김상무가 말한 대로 이들 사이에서 어떤 불협화음도 나오지 않고 있다.


두산그룹의 사례는 형제 간에 법적인 싸움까지 벌였던 한화그룹이나, 이른바 '왕자의 난'으로 불린 현대그룹의 형제간 분란과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삼성그룹의 한 관계자는 "많은 가족이 경영에 참여하고 있으면서도 두산그룹처럼 잡음이 없는 기업은 드물다"라고 말했다.
두산그룹의 3세 경영인들은 우애를 다지기 위해 한 달에 한 번씩 만난다. 강원도 춘천에 있는 두산콘도, 고 박두병 회장의 자택이 주된 장소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상무는 "가족 간에 위계 질서가 확실하고 모두들 상인 정신으로 충만해 있다"라고 전했다. 두산그룹의 기업사를 연구해 온 김동운 교수(동의대학·경제학과)는 "기업의 핵심 구성원인 가족이 화합해 시대 변화에 맞게 변화해 온 것이 오늘날 두산이 4세까지 내려올 수 있었던 비결이다"라고 분석했다.


4세 최고경영자 등장이 이미 재계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3세 경영인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도 관심사이다. LG그룹 구본무 회장, 삼성전자 이재용 상무보, 현대자동차 정의선 상무, 제일제당 이재현 부회장, 코오롱그룹 이웅렬 회장, 한솔그룹 조동만 부회장 등 재계는 이미 3세 경영 시대에 접어들었다. 이들은 국제 환경에 민감하고 정보 통신 시대를 이끌어 가는 추진력이 남달라 재계에 새 바람을 불어넣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어느 기업이 4세까지 이어질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기업의 세계는 그 어느 곳보다 변화 무쌍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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