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늬만 여성 기업' 갈수록 는다
  • 신호철 기자 (eco@e-sisa.co.kr)
  • 승인 2001.12.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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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얼굴 여사장, 남편은 실제 경영자' 사례 많아…
정부지원 · 특혜 노려 '우후죽순'
경기도 안산에 있는 ㅎ기업은 서류로는 분명히 여성인 ㄱ씨가 대표이사인 회사다. 하지만 일하는 직원에게 물어보면, 그 분은 얼굴 보기도 힘들다고 말한다. 같은 구역에 있는 ㅇ 기업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에서 여성이 대표이사로 있는 여성 기업은 전체 기업의 34%인 1백2만 개에 이른다. 최근에는 여성 기업 증가율이 남성 기업보다 높을 정도로 여성의 활약이 눈부시다. 그러나 개중에는 ㅎ기업처럼 실질적으로 남편이 경영하는 기업이 많다.




구로공단(서울디지털산업단지)에 입주한 8백여 업체 중 여성 기업은 열 군데 남짓한데, 그나마 실제로 여자가 경영하는 회사는 두세 군데뿐이다. 2공단에 있는 한 여성 기업을 찾았더니, 서무 직원은 "실제 사장은 남자이고, 여자분은 1년에 몇 번 나오지 않는 명의 사장이다"라고 말했다.


굴뚝 산업에 비해 여사장 비율이 높다는 벤처 기업도 이런 사정은 비슷하다. 종로에 있는 ㅇ벤처 기업은 여성인 ㅅ씨가 사장이지만 직원은 "그 분은 지분을 많이 가지고 있지 않다. 사정이 있어서 임시로 사장 노릇을 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말한다. 여성이 대표이사로 있는 서울시 성북구 소재 벤처기업 ㅇ사의 직원도 "실제 사장 업무를 보는 사람은 고문인 ㅈ씨다. 현 대표이사 ㅇ씨는 명명이사일 뿐이고 지금 연락도 안된다"라고 말했다. 확인해 보니 ㅇ씨는 ㅈ씨의 아내였다. 여성 기업으로 등록된 벤처를 무작위로 조사해 보니 열에 한 곳은 '무늬만 여성' 기업이었다.


이렇게 실제 경영은 남자가 하면서 여성 이름으로 회사 등록을 하는 이유는 남성 사업자가 신용 불량인 경우가 많아서이다. 한번 부도를 내면 은행 블랙리스트에 올라 사업을 하기 힘들다. 예를 들어 국민은행의 경우 부도를 내면 설사 빚을 다 갚더라도 3년 간은 기록이 유지된다. 안산의 한 여사장은 "남편이 빚을 지는 바람에 사장 명의를 내 이름으로 바꿨다. 공단 내 여성 경영자 중에 여성이 직접 경영하는 사람은 20%도 안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진짜 여성 기업들만 애꿎은 피해


명목 여사장이 부쩍 늘어난 또 다른 이유는 여성 기업에게 주어지는 지원과 혜택을 받기 위해서다. 서부공단여성경영자협의회 회장 양귀순씨는 "병역 특례 업체를 지정할 때 여성 기업에는 가산점을 10점 준다. 100점 만점에 가산점 10점이면 큰 혜택이다. 그래서 여성 기업들은 거의 다 병역 특례 기업으로 지정되었다"라고 말했다. 1999년 제정된 '여성 기업 지원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정부는 각종 기업 지원 사업을 실시할 때 여성 기업에 우선권을 주도록 하고 있다. 서울지방 중소기업청 고재룡씨는 "여성기업지원팀을 따로 꾸리고 있다. 지난해 조달청이 여성 기업 물품을 1천7백억원어치 구매했는데 올해는 2천억원을 넘길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중소기업청 최정호 사무관은 "정부가 실제 경영자를 일일이 확인하기는 힘들다"라고 말한다.


무늬만 여성 기업인 곳이 많아지면서 정작 진짜 여성 기업들은 피해를 보고 있다. 은행들은 여성 사장이 대출을 부탁하면 남편에 관한 정보를 같이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여성 사업자에 대한 차별이지만, 은행 관계자는 남편이 실질 경영자인 사례가 많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한 여성벤처협회 임원은 "좋은 취지로 만든 제도가 정말 지원이 필요한 여성 기업보다는 남성 기업이나 부부 기업에 적용되는 경우가 많다"라고 말했다.


여성 기업 지원에 관한 법률은 역차별이라는 반대 속에서도 여성단체들의 끈질긴 노력 덕분에 제정되었다. 이름뿐인 여성 기업들이 이런 법정신을 퇴색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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