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차에 '날개' 붙인 정몽구
  • 소종섭 기자 (kumkang@e-sisa.co.kr)
  • 승인 2001.12.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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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질 관리' 사활 걸어 미국 공략 대성공…
일본차와의 경쟁 등 새로운 도전 '시동'
요즘 현대자동차 내부에서는 12월17일자 〈아시안 비즈니스 위크〉가 화제이다. 이 잡지는 '현대자동차가 승승장구하고 있다'며 정몽구 회장의 경영 능력을 극찬하는 기사를 커버 스토리로 내보냈다.




현대자동차 판매 실적(단위 : 억원)


















1999년 2000년 2001년(예상)
매출액 142,450 182,310 220,000
당기순이익 4,143 6,679 12,000


1999년 3월, 그가 현대자동차 회장에 취임했을 때 오늘날과 같은 실적을 올릴 것이라고 본 사람은 별로 없었다. 어딘지 모자란 듯한 어눌한 인상, 논리적이지 못한 말투, 검증되지 않은 경영 능력…. 이런 이유로 그는 당시 '돌쇠'로 통했다. 그러나 정회장은 불과 2년 남짓에 그같은 세간의 의구심을 말끔히 씻어버렸다. 이제 누구도 정회장을 빗대어 '돌쇠'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이름 앞에는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킨 훌륭한 경영자'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이처럼 짧은 기간에 자신에 대한 평가를 180° 바꾸어 놓은 경영자가 또 있었을까.


정회장이 왜 달라진 평가를 받는지는 '실적'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현대자동차는 올 상반기 영업이익이 1조1천여억원으로 작년 대비 82.4%가 증가했고, 당기순이익은 6천1백억원으로 96.7%나 늘었다. 1967년 창사 이래 이만한 실적을 거둔 적은 없었다. 현대자동차측은 올해 22조원 매출에 1조2천억원 순이익을 올릴 수 있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지난해와 비교해 순이익이 100% 가까이 늘어난 수치이다.


이런 실적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정회장이 목표로 했던 미국 시장에서 현대자동차가 큰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현대자동차는 올 들어 11월 말까지 32만2천여 대를 팔았다.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해 46%나 늘어난 수치로 현대자동차가 올해 거둘 순이익의 40% 정도가 미국 시장에서 나온다.




정회장이 이처럼 놀라운 성과를 올린 비결은 무엇일까. 그는 어떻게 현대자동차를 변화시킨 것일까. 우선 그에게는 운이 따랐다. 자동차학을 강의하는 주우진 교수(서울대·경영학과)는 "외환 위기로 환율이 떨어졌고 상대적으로 임금이 낮아져 가격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LG증권에서 자동차를 담당하는 최대식 애널리스트는 "대우자동차가 쓰러져 반사 이익을 본 측면도 있다"라고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 싼타페 등 시장 흐름에 맞는 차를 적절한 시기에 출시한 것은 날개를 단 격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운이 따라도 준비되지 않은 사람, 그 운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소용이 없는 법. 이런 면에서 정회장은 보이지 않는 운을 낚아채 눈에 보이는 대어를 잡는 내공을 가진 고수였다. 주교수는 정회장이 미국 시장을 공략하는 데 성공했고 품질을 높였으며 금융산업에 진출하는 등 현대자동차의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하는 데 성공한 점이 그의 리더십이 새롭게 평가받는 대목이라고 말했다.


현대자동차를 맡으면서 미국 시장을 공략하겠다고 마음먹은 정회장이 제일성으로 내뱉은 말은 '품질 제일주의'였다. 그는 품질을 얼마나 높일 수 있느냐가 미국 시장에서의 승부를 결정한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지난 4월3일, 서울 서초구 양재동 현대자동차 본사 2층 대강당에서 열린 임직원 조회에서 정회장은 이렇게 강조했다.


"아직도 품질 수준은 선진 메이커와 격차를 보이고 있으며, 생산성·원가·기술 등 전반적인 경쟁력을 선진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품질 향상을 위하여 모든 임직원이 자발적으로 동참해야 한다. 품질을 향상시킨다면 비용을 절감할 수 있고 브랜드 이미지를 개선할 수 있으며 제값을 받고 차를 팔 수 있다. 고부가가치 제품을 판매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는 상승 효과도 있다. 협력업체도 바짝 긴장된 자세로 품질 향상 노력에 동참해야 한다."


정회장의 이런 의지는 곧바로 현장에 반영되었다. 신차를 만들 때 언제까지 차를 개발한다는 기간 중시 관행에서 과감히 벗어나 단계별 품질 목표에 미달하면 반드시 목표를 달성한 후 다음 목표로 넘어가도록 했다. 정회장은 또 정기적으로 품질에 관한 임원 회의를 열고, 임원들을 생산 현장에 보내 품질의 중요성을 체험하게 하는 등 직접 일선에서 품질을 챙겼다. 직원 100여명으로 품질관리본부를 구성해 현대만의 품질 관리 매뉴얼을 만든 것도 전에 없던 일이다.


최고경영자가 품질 관리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효과는 엄청났다. 현대자동차는 올해 미국의 차량 성능 테스트 기관인 JD파워 사의 평가에서 지난해보다 순위가 일곱 단계나 상승한 27위를 기록했고, 지난 4년간 품질이 28%나 개선된 것으로 평가되어 업계 평균인 14%를 훨씬 능가했다. 현대자동차 내부 자료에 의하면, 싼타페 구매 고객의 55%가 대졸 이상의 학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어, 구매 고객들의 질이 과거에 비해 많이 높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정회장은 요즘에도 입버릇처럼 품질이 혼다 수준은 되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다고 한다.


기아차와 생산 라인 공유, 상승 효과 극대화




품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연구·개발 분야에 대한 투자가 필수이다. 연구 개발과 상품 기획을 담당하는 이충구 사장에 따르면, 정회장은 연구 개발을 위한 인력에게는 돈을 아끼지 말라는 파격적인 지시를 내렸다. 현대자동차의 연구개발비는 7천2백억원(1999년), 9천억원(2000년), 1조3백억원(2001년)으로 매년 12∼14%씩 늘어났다. 국내 제조업체 가운데 연구·개발을 위한 교육비에 상한선을 두지 않는 곳은 현대자동차가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기아차라는 막강한 우군이 없었다면 현대자동차가 이처럼 빨리 성장할 수 있었을까. 정회장은 1998년 기아차를 인수한 후 현대-기아차의 상승 효과를 극대화하는 방안을 찾으려고 노력했고 이것이 세계 시장에서의 경쟁력 강화로 연결되고 있다는 것이 업계의 평가이다.


현재 내수 시장의 75%를 차지하고 있는 두 회사는 통합구매본부를 설립해 비용 부담을 줄였고, 현대자동차는 기아를 살리기 위해 EF쏘나타의 후속 모델이었던 옵티마를 기아가 생산하게 하였다. 대신 현대자동차는 기아가 만들던 미니밴과 소형차를 생산하는 등 생산 라인을 공유해 생산 효과를 극대화했다. 울산·소하리·남양에 흩어져 있던 기술 연구소도 남양연구소로 통폐합해 세계 7위권의 규모를 갖추었다.


정회장의 파격적인 스타일도 화제이다. 그는 전임 정세영 회장 때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통 큰' 스타일로 직원들을 사로잡고 있다. 한번은 정회장이 세계해양박람회 홍보관 개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여수에 들렀는데, 수고가 많다며 정회장이 돌린 금일봉을 뜯어본 직원들은 깜짝 놀랐다고 한다. 예상했던 금액보다 훨씬 많은 거액이 들어 있었기 때문. 외국에 나가 있는 현지 법인 사람들과의 만찬에서도 정회장은 이와 비슷한 호쾌한 스타일을 선보여 직원들을 감동시켰던 것으로 전해졌다. 싼타페를 디자인한 외국인 2명도 정회장으로부터 상당한 액수의 격려금을 받았다. 이런 일을 보고 들은 직원들은 자연히 정회장에게 '충성'을 다할 수밖에 없다. 파격적인 '투자'를 통해 더 큰 충성을 이끌어내는 정회장의 용인술을 보여주는 한 대목이다.


'이익 분배' 놓고 노조와 갈등


그러나 너무 잘 나간 탓일까. 한편에서는 역풍도 불고 있다. 우선 노동조합이 '이익 분배'를 요구하고 나섰다. 노조는 568%의 성과급을 달라고 하고 회사측은 300% 성과급을 고집해 지난 11월29일 이후 부분적으로 파업이 진행되고 있다. 회사측은 파업으로 인해 12월14일까지 매출액에서만 5천억원이 넘는 손해를 보았다고 밝히고 있다. 이번 사태는 노사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지 않고서는 현대자동차가 쾌속 질주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정회장과 현정권과의 밀월설도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2000년 9월, 현대그룹에서 계열 분리할 때와 기아자동차를 인수할 때 부채를 탕감받는 과정에 현정권의 도움이 있었다는 것이다. 계열 분리할 때인 지난해 10개였던 현대자동차 계열사가 지금은 20개로 급격히 늘어난 것에 주목하는 사람들도 있다. 증권가에는 정회장과 현정권과의 관계를 거론하는 소문이 잊을 만하면 한번씩 돈다.


현대자동차의 한 관계자는 그런 소문을 잘 알고 있다며, 핵심은 대북 사업에 참여하느냐 여부인데, 참여하지 않기로 이미 명쾌하게 정리가 된 상태라고 말했다. 더 이상 밀월설에 시달릴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얼마 전에는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장과 관련해 정회장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김각중 현 전경련 회장이 나이가 많아 활발히 활동하지 못하고 있으니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회장 같은 사람이 회장을 맡아 재계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대변해 주어야 한다는 이른바 '강한 회장론'이 배경이다. 김회장이 내년 초에 자진 사퇴하고 정회장이 회장을 맡으면 된다는 그럴 듯한 시나리오와 함께 재계에 퍼졌던 이 소문을 들은 현대자동차 관계자들은 무슨 소리냐며 펄쩍 뛰었다고 한다. 전경련측도 전혀 그런 것을 검토한 적이 없다고 손사래를 쳤지만 일각에서는 정회장이 미련을 갖고 있는 것 같다는 얘기도 나온다. 정회장이 현대자동차의 질주를 바탕으로 재계 리더로서의 위치를 확보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증이다.


정회장은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최고 절정기를 맞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아직 그가 갈 길은 멀고 험난하다. 메리츠증권 이영민 연구위원은 "아직도 현대자동차는 미국 시장에서 일본차와 대등하게 경쟁하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 품질을 얼마나 끌어올릴 수 있느냐가 현대자동차가 세계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느냐를 좌우하는 관건이 될 것이다"라고 진단했다.


또 국내 자동차 업계의 판도를 살펴보아도 GM의 대우차 인수, 르노 삼성의 공격적인 도전 등으로 인해 2003년부터 현대자동차는 내수 시장에서 힘겨운 시장 쟁탈전을 벌여야 한다. 1조원 이상이 들어갈 것으로 보이는 미국 현지 공장의 성공 여부, 유럽 시장을 공략하기 위한 디젤 엔진 자체 개발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느냐도 중요한 변수이다.


현대자동차 내부에서는 이제 새로운 도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셈이라며, 이럴 때일수록 정회장이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는 소리가 나오고 있다. 그의 경영 능력이 완전히 검증받았다고 보기에는 앞으로도 넘어야 할 고개가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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