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 상인이 몰려오고 있다
  • 신호철 (eco@sisapress.com)
  • 승인 2002.03.25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수입선’ 바꿔…전통 산업 제품 인기, IT에 관심 높아
마우리스 니콜라스 씨는 레바논의 자동차 부품 회사 ‘GM 서비스’의 사장이다. 이 회사는 지난 30년 동안 미국 자동차 부품 업체와 거래해 왔지만 9·11 테러가 터진 이후 관계가 끊겼다. 3월11일 한국을 찾아온 니콜라스 씨는 미국산을 대체할 한국 제품을 찾고 있는 중이다. 이미 한 회사와 50만 달러어치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9·11 테러 이후 미국과 중동 간에 무역이 힘들어지자 아시아에 눈을 돌리는 중동 기업이 늘어나고 있다. 한국으로서는 수출을 늘릴 좋은 기회다.
3월12일 서울 염곡동 코트라(KOTRA) 3층은 외국인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북적거렸다.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온 바이어 2백50여 명이 한국 중소기업인들과 상담하고 있었다. 코트라가 주최한 이 수출 상담회에 참석한 중동 상인은 1백90여 명이었다. 12일 하루에만 바이어들은 20명이 넘는 한국 기업가를 만났다. 오후로 넘어가면서 바이어 책상 위에는 명함과 카탈로그가 수북이 쌓였다. 이 날 당장 계약이 이루어진 경우는 드물었지만, 조건 맞는 기업을 찾아낸 바이어는 상담이 끝난 후 공장으로 직행하기도 했다.


시리아에서 온 자동차 부품 상인 파에즈 씨(53)는 “9·11 사태 이후 중소 규모 수입상들이 미국에서 아시아로 거래처를 바꾸는 것은 대세이다”라고 설명했다. 파에즈 씨가 운영하는 무역회사 ‘미들이스트 트레이드 센터’도 예전에는 미국의 델코 회사 제품을 샀지만 앞으로는 한국 물건을 구매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들이 수입선을 바꾸는 가장 큰 이유는 미국을 왕래하기가 불편해서이다. 아랍인들만 골라 집중적으로 실시하는 공항 검색이 이들 상인들에게는 모욕적이기까지 하다. 레바논인 사장 토니 케이르 씨(40)는 “비행기 타기가 너무 힘들다. 그동안 미국 현지 법인에서 일했지만, 곧 지점을 철수하고 고향 레바논에서만 사업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미국 생활이 안전하지 못하다는 것도 이유다. 시리아 상인 사미 하비브 씨(38)는 “때때로 생명에 위협을 느끼기도 한다”라며 손으로 목이 잘리는 시늉을 했다. 행사 통역을 맡은 피연희씨는 중동 상인들의 피해 의식을 보여주는 사례 하나를 전했다. 한국 중소기업 사장이 사우디아라비아 바이어에게 e메일 주소를 물어보았더니 바이어는 “나는 e메일을 안 쓰고 팩스로만 사업한다. e메일은 미국 정보기관이 모두 다 열어볼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답했다는 것이다.




아예 미국에 입국하지 못한다는 사람도 있다. 시리아 출신 사업가 압둘 라힘 아나베흐 씨(55)는 요즘 미국에 배신감을 느낀다. 그는 스무 살 때부터 미국을 기회의 나라라고 생각해 왔다. 신혼 여행도 미국으로 갔고, 아들 돌잔치도 미국에서 열었다. 미국 친구 100여 명을 불러 파티를 하면서 미국인들과 친해지려고 애썼다. 그러나 9·11 테러 이후 그는 비자 발급을 거부당하고 있다. 시리아는 최근 부시 미국 대통령이 지목한 핵공격 대상 국가 중 하나다. 코트라 행사를 계기로 한국에 처음 온 아나베흐 씨는 “나는 미국을 사랑하지만 그들이 날 미워하니 어쩔 수 없다. 미국 제품 없어도 아시아 것 수입하면 그만이다”라며 자신감을 보였다.


아랍에미리트(UAE)에서 온 알리 셰르 씨(24)는 소비자들이 미국 제품을 좋아하지 않는 것도 수입선을 바꾸는 큰 이유라고 설명했다. 미국과 사이가 좋은 사우디아라비아나 아랍에미리트의 중산층 이상 국민은 미국 제품을 거부하지 않는다. 그러나 서민들 사이에서는 미국 제품을 쓰지 않는 분위기가 퍼지고 있다고 한다. 개인용 컴퓨터 모니터를 수입하는 그도 올해부터 수입처를 미국에서 아시아로 바꾸기로 했다. 마치 몇 년 전 우리가 일본 담배 피우는 사람을 경원했던 것과 비슷한 분위기다. 시리아처럼 미국에 적대적인 나라는 아예 정책적으로 미국산 수입을 제한하기도 한다.


“부시가 전쟁 일으켜도 돈 떼일 일 없다”


아시아 가운데에서도 왜 한국일까. 중동 상인들은 입을 맞춘 듯 “중국산은 가격이 싼 대신 품질이 안 좋다. 일본산은 그 반대다. 가격과 품질을 종합해 고려하면 한국 제품이 가장 좋다”라고 교과서처럼 답한다. 인기 있는 분야는 아직은 자동차 부품과 같은 전통 산업 제품이다. 사미 하비브 씨는 “나는 SM5를 타고 아내는 아반떼를 몬다”라며 일본 차보다 한국 차가 더 인기라고 말했다.





최근 중동 지역에서 정보 기술(IT)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중동은 인터넷이 느리기로 유명한 곳이지만 아랍에미리트는 지난해 두바이 자유무역지대 근처에 ‘인터넷 시티’라는 특별 지구를 조성해 초고속 통신망을 갖추었다. 3월14일 중동 바이어와 상담을 마친 벤처 회사 태송시스템 김정수 이사(44)는 “벤처 붐을 타면서 우리나라 IT 기술이 높아졌다는 사실을 바이어들도 알고 있었다. 중동에도 곧 초고속 통신망(ADSL)이 깔릴 예정이어서 IT 관련 제품 문의가 많았다”라고 말했다. 그는 광통신 케이블 수출 협상을 하고 있는데 타결될 가능성이 50% 이상이라고 밝혔다.


중동 무역에는 몇 가지 장애가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불편한 교통이나 외교 관계 등이 문제가 되곤 한다. 이라크 대기업 알 에멘투자 그룹의 부회장인 메스 알 루베 씨(34)는 한국에 오려고 바그다드에서 암만까지 1000km를 차로 달렸고, 다시 암만에서 서울까지 비행기를 네 번 갈아탔다. 한국에 입국할 때도 검색이 갑작스레 강화되어 코트라 직원이 보증을 선 뒤에야 겨우 공항을 통과할 수 있었다. 수교가 되지 않은 나라의 사업가는 더욱 불편하다. 시리아인 사미 하비브 씨는 요르단 기업의 사업권을 빌려 장사를 하고 있다.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 이후 전쟁 위기가 높아지는 것도 전망을 어둡게 하고 있다. 하지만 바그다드 무역관 정종래 관장은 “한국 사람들이 전쟁을 더 걱정하는 것 같다. 이라크인들은 그저 일상적인 경고로 받아들인다”라고 말했다. 메스 알 루베 씨는 “이라크의 모든 수출입 대금 결제는 뉴욕의 BNP 은행에서 이루어진다. 설사 전쟁이 나더라도 돈을 떼이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루베 씨는 3월15일 코트라 국제회의실에서 열린 ‘테러 이후 중동 지역 시장 공략 설명회’에서 강연했다. 설명회에 참석한 한 한국 사업가는 루베 씨에게 “미국의 부당한 폭력에 고통받고 있는 이라크 국민에게 미안함을 느낀다. 우리도 최근 미국의 팽창주의를 우려하고 있다”라는 인사를 건넸다. 한 레바논 상인은 “요즘 한국에서 반미 감정이 높다는 것을 알고 있다. 동질감을 느낀다”라고 말했다. 부시 대통령의 강경책이 한국과 이슬람 사이를 좁히는 결과를 낳은 셈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