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부자 LG도 궁할 때 있다?
  • 신호철 기자 (eco@sisapress.com)
  • 승인 2002.05.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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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주 회사 변신 위해 자금 확보 비상…“계열사 포기 않으려는 욕심 탓”
4천억원대 주식을 가진 회장이 돈이 모자라 허덕인다면 믿을 수 있을까? 올 한 해에만 주식 시가 총액을 2조원 가까이 늘린 집안이 부족한 돈을 메우기 위해 안달이라면 믿을 수 있을까? LG 구본무 회장 일가가 처한 상황이 지금 이렇다.




지난 4월25일 LG화학이 구본무 회장 일가가 가지고 있는 LG석유화학 주식을 인수하자 각계에서 비난이 빗발쳤다. LG화학이 1999년 대주주들에게 헐값에 판 주식을 3배 정도 오른 값에 다시 샀기 때문이었다. 이 거래로 대주주 일가는 6백억원의 차익을 보았다. 그 전에 팔았던 LG석유화학 1천3백만 주까지 합치면 대주주 일가는 1천5백억원의 시세 이익을 남겼다(<시사저널> 제654호 참조).



올 들어 그들이 매도하고 있는 주식은 LG석유화학 주식뿐만이 아니다. LG건설 허창수 회장은 LG전선 주식을 만 주 이상 매도했다. 구본무 회장 일가는 4월1일 하루에만 LG마이크론 주식 30만주를 100억원에 매도했다. 그 밖에도 LG 일가는 소소하게 각 계열사 주식을 처분하고 있다. LG석유화학 건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구·허 씨 가족에게 지금은 ‘주식 파는 계절’이다.



사람들이 갸웃거리는 부분이 여기다. 처음 LG석유화학 주식 매도 이야기가 나왔을 때 한 주식 전문 사이트는 ‘LG는 그래야만 했을까’라는 제목을 뽑았다. 굳이 여론의 비난을 무릅쓰고 주식 정리에 나선 이유를 궁금해 한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유력한 해답이 있다. 지주 회사로 변신하기 위해 부족한 자금을 모으고 있는 중이라는 설명이다.
‘조(兆)만장자’ LG 일가에게 자금이 부족하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지만 현실은 그렇다. 그것도 꽤 많이 부족하다.



42개 계열사를 지주 회사로 묶다 보니





LG그룹은 2004년까지 지주 회사가 될 예정이다. 그런데 지주 회사가 되려면 ‘레버리지’라고 불리는 총지분율을 높여야 한다. 레버리지는 그룹 전체가 가진 자본 중에서 대주주가 차지하는 비중을 뜻한다. 재벌 오너들은 과거 상호 출자 지분 구조에서 3∼5%라는 적은 지분만 가지고도 그룹 전체를 움직일 수 있었다. 때문에 ‘지분만큼만 지배하라’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그런데 지주 회사가 되려면 최소한 8% 정도로 그룹 내 지분을 높여야 한다. 상장 회사만 놓고 보더라도 올해 초까지 LG 대주주들의 그룹내 총지분율은 4.6%에 불과했다.



LG구조조정본부가 만든 자료에는 ‘그동안 우리나라 대기업은 낮은 지분율로 다수 기업을 지배해 왔다’라며 이 점을 개선하는 것이 지주 회사 제도를 도입하는 취지 중 하나임을 밝혔다. 따라서 LG 대주주들은 자금을 늘려 지분율을 높이든지, 아니면 현재 자금은 그대로 두고 거느릴 수 있는 회사를 대폭 줄여야 한다.



LG 대주주가 후자를 선택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앞으로 LG 계열사에서 분리되는 회사는 극동도시가스·니코동제련 등 4개 정도로, 이에 따른 대주주 부담 절감 효과는 1천7백억원 정도에 불과하다.



그럼 도대체 돈이 얼마나 더 필요한 것일까? LG는 42개 계열사를 지주 회사로 묶는 LG홀딩스(가칭)를 만들 예정이다. 지금은 LG홀딩스의 전 단계로, LGEI와 LGCI를 임시 지주 회사로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대주주가 LGEI의 지분을 50% 가지는 데만 2조원이 넘게 소요된다. 손자 회사, 그룹 내 출자 이동, 동원 가능한 부채 등을 통틀어 고려하면 전문가들은 앞으로 LG 대주주들이 LG홀딩스를 인수하는 데 최소 5천억원이 더 든다고 말한다.



LG 가문의 숙제는 이것뿐만이 아니다. LG투자증권을 비롯한 금융 회사들은 지주 회사에 편입될 수 없다. 지주 회사에 편입될 회사들은 LG투자증권 주식을 팔아야 하고 이 물량은 대주주가 인수해야 한다. 현재 대주주는 LG투자증권 지분을 불과 3.2% 가지고 있다. LG투자증권 하나만 대주주가 안정적으로 챙기는 데 약 4천억원이 필요하다.



이래저래 LG 대주주들은 2004년까지 최소 9천억원 가량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다. 계산 방법이나 주가 변동 여부에 따라 이보다 훨씬 많은 돈이 필요할 수도 있다. 대주주로서는 고민되지 않을 수 없다.



LG 대주주들은 이 자금을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 첫 번째는 올해 LG석유화학·LG전선·LG마이크론 주식 매각 사례에서 보듯이 상장 회사 주식을 처분해 자금을 조달하는 것이다. LG 대주주는 LGCI·LGEI 외에도 15개 상장 계열사의 주식을 가지고 있다.



두 번째 방법은, 비상장 회사를 상장시키면서 돈을 버는 것이다. LG구조조정본부 관계자들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상장을 준비 중인 회사가 있다는 소문이 증권가에 나돌고 있다.



이렇게 대주주에게 자금을 부담시키면서까지 LG그룹이 지주 회사로 변신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LG구조조정본부 유 원 부장은 기업 구조를 선진화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지주 회사가 되면 소유 구조가 명확해져 책임 소재가 분명해지고, 부실 계열사를 우량 계열사가 지원하는 일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최근 LG 회장단과 접촉했던 사람들은 구씨 일가와 허씨 일가로 나뉜 복잡한 지배 구조를 단순화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1백50명에 달하는 구·허 씨 가족 때문에 LG그룹은 중요한 결정을 하려면 ‘문중회의’를 열어야 할 정도이다. 이런 복잡한 의사 결정 구조 때문에 최고 경영자가 과감한 경영을 할 수 없어 LG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좋은기업지배연구소(cgcg) 김주영 소장은 “회사 규모가 커지면 창업주의 지분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하다. 대주주들은 천년만년 회사를 자기 후손에게 물려주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라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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