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빚 권하는 사회
  • 안은주 기자 (anjoo@sisapress.com)
  • 승인 2002.10.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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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권, 대출카드 발급에 혈안…가계 부채 눈덩이, 신용불량자 속출할 수도
"안은주 고객님이시죠? 여기는 하나로통신 고객센터인데요. 고객님께 새로 나온 서비스 카드를 하나 보내드리려고요….” 핸드폰으로 걸려온 통화는 그렇게 시작했다. 용건은 하나로통신 고객에 한해서 최고 5백만원까지 대출받을 수 있는 대출 전용 카드(대출카드)를 무료로 발급한다는 것이었다. 필요 없다고 잘라 말해도 그 상담원은 포기하지 않았다. “은행 대출을 받으려면 번거롭고 시간도 걸리지만 이 카드만 가지고 있으면 아무 때나 현금지급기에서 뽑아 쓸 수 있습니다….” 필요없다고 서너 차례 더 강조한 뒤에야 상담원은 전화를 끊었다.





할부금융사, 대출카드 2백만 장 발급


알고 보니, 요즘 이런 전화 한두 통쯤 안 받은 사람이 드물었다. 8년째 직장 생활을 하는 임현정씨(32)는 “대출카드요? 말, 마세요. 왜 그렇게 대출받으라고 아우성인지…. 그야말로 ‘빚 권하는 사회’에요.” 이씨 말대로 요즘 금융권은 예금 유치보다는 대출 ‘세일’에 더 열심이다. 그러다 보니 개인 고객을 유인하는 대출 상품이 다양하고, 빚을 권유하는 경로도 여러 가지이다(104쪽 상자 기사 참조).


개인 대출 상품 가운데 가장 ‘호황’을 누리는 것은 대출카드이다. 대출 한도를 미리 정해 놓고, 돈이 필요할 때마다 현금지급기에서 대출금을 꺼내 쓸 수 있게 만든 카드이다. 부동산 담보 대출이 주를 이루는 은행을 제외한 나머지 금융권에서는 대출카드가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이 시장에서 선두 그룹인 삼성캐피탈·현대캐피탈 같은 할부금융사가 발급한 카드만 각각 2백만 장에 이른다.


삼성캐피탈 장동식 과장은 “대출카드 성공 비결은 빠르고 간편하게 돈을 빌려 쓸 수 있다는 점에 있다”라고 말했다. 또 신용카드 현금 서비스는 다음달 결제일에 대출금을 모두 갚아야 하지만, 대출카드는 대출금의 10%만 갚으면 대출 기간이 자동 연장된다. 할부금융사의 공격적인 마케팅과 ‘급전 대출은 대출 전용 카드가 딱이다’는 식의 기사를 내보낸 언론사의 지원 사격도 힘을 보탰다.


할부금융사들은 지역마다 모집인을 따로 두고 전화나 상담을 통해 회원을 확보한다. 또 각종 할인 혜택 및 우대 서비스를 제공하는 서비스 네트워크를 미끼 삼아 고객을 끌어들인다. 대출 기능 외에 여행·미용·육아·건강 등 가맹점을 이용하면 다양한 혜택을 제공한다. 신용카드사 못지 않은 부가 서비스로 회원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수십만 회원을 확보한 하나로통신 같은 통신회사나 인터넷 회사들까지 파트너로 끌어들였다. 대출카드는 대금업과는 전혀 상관없는 회사들과 제휴해서 ‘부가 서비스’라는 명목으로 빚을 내라고 권유한다.

하나로통신 관계자는 “우리 회사가 직접 돈을 빌려줄 수 없으므로 금융사와 제휴해 대출카드를 발급하면 고객 서비스 품목이 하나 더 늘어나는 것 아니냐”라고 말했다.
할부금융사들의 대출액 증가량과 캐피탈사의 대출카드 취급액 변화를 보면 대출카드가 얼마나 가파르게 성장했는가를 단박에 알 수 있다(표 참조). 지난해 말 할부금융사와 생명보험사의 대출카드 대출액은 7조원에 달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신장률은 더 눈에 띈다. 대출카드가 최대 호황을 누린 지난해부터 올 상반기까지 할부금융사의 대출액은 두 배 가까이 늘었다. 한 할부금융사의 대출카드 취급액은 지난해 상반기에 비해 8배나 늘었다.





은행까지 대출카드 시장에 뛰어들어


할부금융사의 대출카드가 ‘상종가’를 치자 최근에는 신용카드 회사와 보험회사는 물론 은행까지 이 시장에 뛰어들었다. 약관 대출이 가능한 고객에게 대출카드를 발급하는 것은 물론이고 보험 고객이 아닌 사람에게까지 대출카드를 발급하는 보험회사도 있다. 보험회사가 발행한 대출카드로도 전국에 깔린 현금지급기에서 자유롭게 돈을 뺄 수 있다. 한 은행에서는 더 싼 금리로 매달 대출 잔액의 3%만 갚으면 평생 사용할 수 있는 파격적인 대출카드를 발급하고 있다. 5년마다 자동 연장이 가능하고, 연체가 발생한 뒤 32일까지는 연체 이자를 징구하지 않는다.


특히 신용카드 회사들은 대출카드 마케팅에 힘을 쏟고 있다. 현금 서비스로 인한 수익이 줄자 대출카드로 그 공백을 메우려는 것이다. 재벌계인 한 카드 회사는 신규 회원을 모집할 때 대출카드를 한 묶음으로 가입시킨다. 신용카드 길거리 모집을 금지했는데도 사무실을 돌아다니며 신용카드 회원을 모집하고, 대출카드까지 떠안긴다. 기존 회원에게는 현금 서비스보다 대출카드 이자가 더 싸다고 홍보한다. 한 신용카드사는 대출카드는 대출 정보가 공개되지 않기 때문에 다른 기관에서 대출받을 때 유리하다는 식으로 꼬드긴다. ‘인터넷 현금지급기를 이용한 카드론은 대출 정보가 공개되지 않는다’는 홍보성 전단지를 배포한 것이다.


가계 대출은 지난해 폭발적으로 늘었다. 은행 가계 대출은 올 들어 51조5천억원이나 증가했다(9월 말 기준). 카드 빚과 할부 구매까지 합친 가계 빚은 지난해 6월 2백96조원에서 불과 1년 만에 3백97조원으로 늘었다. 개인 외에는 대출 시장이 마땅치 않은 금융권이 적극 빚을 권유한 탓이 크다. 한 은행의 대출 담당자는 “은행에서 돈을 쌓아두면 저절로 불어납니까? 돈을 빌려줘야 이자를 받을 텐데, 기업은 위험하고, 잘못되더라도 손실 규모가 적은 개인에게 빌려줄 수밖에 없죠”라고 털어놓았다.


최근 정부가 부동산 담보 대출 비율을 낮추는 등 강경책을 쓰면서 가계 빚 증가세가 한풀 꺾이고 있다. 은행을 비롯한 금융권이 정부의 ‘칼바람’을 피해 가계 대출 심사 절차를 강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가계 대출을 줄이지는 못할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돈 굴릴 데가 마땅치 않은 금융권의 고민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의 규제를 덜 받는 대출카드를 선두로 한 제2 금융권의 소액 대출 상품은 더욱 인기를 끌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소액 대출은 대부분 3백만∼1천만 원이어서 전체 가계 대출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크지 않다. 하지만 위험성은 그 어떤 대출보다 높다. 거의 전액이 신용 대출인 데다 주로 소비에 쓰여 경기에 민감한 까닭이다.


금감원 “큰 문제 없다” 태평


한국금융연구원 최공필 연구위원은 “대출카드는 은행에서 밀려날 정도로 신용이 양호하지 않거나 급전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주로 이용한다. 따라서 경기가 위축되면 연체율이 급격하게 올라가며 신용 경색을 부를 수 있다”라고 말했다. 소액 대출이 신용불량자를 양산하는 ‘제2의 시한폭탄’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대출카드 연체율은 현재 7%대로 신용카드에 비해 높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 이 상품을 주력으로 판매하는 상호저축은행과 할부금융사 전체 연체율은 다른 금융기관보다 높다.


그런데도 대출카드를 비롯한 소액 대출은 금융 감독 당국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나 있다. 금융감독원 김병태 팀장(여전감독팀)은 “대출카드나 소액 대출 마케팅에는 별다른 제재를 하지 않고 있다”라고 말했다. 최근 대출카드 대출액이 크게 늘어 눈여겨보지만 신용카드에 비하면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또 대손충당금을 올렸기 때문에 금융사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조심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신용카드 회사들이 ‘마케팅’이라는 명분으로 길거리에서 회원을 모집하고 미성년자에게 카드를 발급할 때도 금융 당국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신용불량자들이 속출한 뒤에야 불을 끄기에 바빴다. 대출카드도 그런 전철을 밟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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