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블랙홀’ 에 빨려드는 화교 경제
  • 타이베이·홍콩·마카오·신호철 기자 (eco@sisapress.com)
  • 승인 2002.11.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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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홍콩 기업 너도나도 “대 륙으로”…국내 재투자 안돼 산업 공동화 가속



유리벽 밖으로 푸른 해협 너머 구룡 반도가 보이는 홍콩 컨벤션센터에서 10월9일부터 13일까지 전자 박람회가 열렸다.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상인 가운데는 타이완 무역관에 조그마한 부스를 차린 쳉핑밍(52) 씨도 있었다. 중소기업 ‘이스턴다이나믹스’의 사장인 그는 23년 전부터 가방을 제조해 파는 전형적인 타이완 기업인이다. 10월13일 저녁 그는 막 오스트레일리아의 한 바이어와 악수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바이어의 반응으로 봐서 계약이 거의 성사될 것 같다. 특히 가격이 마음에 든다고 한다”라며 흐뭇해 했다.


쳉 사장은 가방 제조 가격을 낮추기 위해 중국에 공장을 세워 상품을 들여오고 있다고 말했다. 자기뿐만이 아니라 많은 타이완 기업인들이 생산비를 절감하기 위해 중국에 공장을 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타이완 정부는 3금(무역·교통·우편) 정책으로 타이완 기업이 중국에 투자하는 것을 엄격히 금하고 있다. 하지만 타이완 기업인들은 온갖 편법을 동원해 중국에 투자하고 있다.


타이완 기업 절반 이상이 중국 진출


쳉씨가 설명하는 투자 경로를 따라가보자. 먼저 그는 타이베이 본사에서 미국 지사로 현금을 보낸다. 미국 지사에서는 다시 이 돈을 홍콩에 있는 은행으로 넘긴다. 쳉씨는 홍콩에 계좌를 2개 가지고 있다며, 현금카드를 눈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항셍은행과 HSBC(홍콩상하이은행) 카드였다. 마지막으로 홍콩에서 중국 동광 시에 있는 공장으로 돈을 넘기면 복잡한 송금 과정이 끝난다.


타이완 → 미국 → 홍콩 → 중국 본토로 이어지는 3단계 경로를 통해 그는 1992년 이후 지금까지 4백만 달러(50억원)를 투자했다. 2년 전 2백만 달러를 투자한 액수를 합친 것이다.
쳉 사장처럼 중국에 투자하는 기업인은 타이완과 홍콩에서 흔히 만날 수 있었다. 추친티엔(41) 씨도 본사(요가 전자)를 타이베이 내호구에 둔 타이완 기업인이다. 하지만 공장은 중국 선전에 있다. 그는 쳉 사장과는 달리 타이완→홍콩→중국 본토의 2단계 투자 과정을 거친다. 소액으로 나누면 홍콩에 직접 투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약 2백만 달러를 중국에 투자했다. 그는 “중국뿐만이 아니라 타이완에도 공장이 있기 때문에 내가 타이완 경제에 해를 끼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타이완 기업 가운데 중국에 진출한 기업은 약 5만 개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되는데, 이는 전체 타이완 기업의 절반이 넘는 숫자이다. 올해 7월까지 모두 2만5천33 건의 중국 투자가 이루어졌고 액수는 2백21억 달러(27조원)에 이른다. 타이완 전체 해외 투자액의 40%에 해당한다. 중소기업뿐만이 아니라 재벌들도 사정은 비슷하다(73쪽 상자 기사 참조). 언어(광둥어)와 문화가 비슷한 데다가 중국 본토에서 넘어온 화교들이 타이완 경제권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 투자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타이완 재무부는 중국에 투자된 자본 중 정작 타이완으로 되돌아온 금액은 1.18%에 불과하다고 집계했다. 타이완 금융 전문가 린 신치 씨는 “회수율이 상식적으로 너무 적다. 그것이 타이완 산업을 공동화하는 가장 큰 원인이다”라고 말했다. 공동화 현상은 ‘다헤이둥(大黑洞)’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블랙홀에 타이완이 빨려간다는 뜻이다.


1998년 우리가 외환 위기를 겪을 때 타이완의 실업률은 2%를 유지했으나 2000년 3.66%, 2001년 5.33%에 이어 올해도 5% 초반에 머물러 있다. 타이완의 수출은 1/4분기에 7.9%가 줄어들더니 지금까지 감소 추세가 바뀌지 않고 있다. 일자리가 없는 타이완 국민은 중국으로 향한다. 벌써 50만명의 타이완 노동자가 중국에서 일하고 있다.


10월10일은 쌍십절이라고 불리는 타이완 건국기념일이었다. 그 날 총통 집무실 앞 광장에서는 젊은 여성들의 무용과 군인들의 집총 공연이 있었다. 하지만 축하 사절을 보낸 국가는 중남미의 두 나라에 불과했다. 그 날 저녁에는 비가 내렸다. 타이완에서 관광업을 하는 유가문 씨는 “해마다 건국기념일이 되면 나라 전체가 축제 분위기로 들떴지만 올해는 전혀 그런 모습을 볼 수 없다”라고 말했다.


“편법 막으려면 차라리 완전 개방하라”


타이완 기업인들은 정부를 불신한다. 한 타이완 기업인은 천수이볜 총통을 향해 "그가 타이완 경제를 살리기 위해 한 일은 아무 것도 없다"라며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어차피 편법적 중국 투자를 막기 힘들다면 차라리 완전히 개방하는 편이 더 낫다고 주장하는 기업인이 많다. 당장은 고통스러울지라도 언젠가는 극복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젊은이들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타이베이 시 남쪽에 자리잡은 타이완 국립대학. 벤치에서 쉬고 있는 타이완 대학 학생 4명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그들은 타이완의 서울대 격인 타이완 국립대학 학생들도 요즘은 예전과 달리 취업을 못하는 사람이 생긴다고 말했다. 이들은 경제 불황의 원인으로 중국 투자 문제를 지적했지만 중국에 대한 적대감은 없어 보였다. 기계학을 전공하는 켄 후앙(19) 군은 “윗 세대들은 중국 문제를 역사적·정치적 맥락에서 이해하지만 우리는 다르다. 난 그저 평화를 원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4명 중 2명은 중국과 합병하는 데 찬성했고 나머지 2명도 원칙적으로는 찬성하지만 시기 상조라고했다.





하지만 아직 정부와 언론의 반응은 개방에 미온적이다. 10월25일 <타이베이 타임스>는 사설을 통해 “이미 타이완의 경제가 중국에 종속되어 가는 실정이다. 3금 정책을 풀면 많은 기업이 중국으로 옮겨가게 되고, 타이완 공동화 현상과 함께 실업률 상승을 피할 수 없다”라는 전통적인 주장을 펼쳤다. 10월23일 천수이볜 총통은 “개방이 경제를 치유하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최근 타이완 정부는 중국 이외의 다른 아시아 지역에 투자할 것을 권하고 있다. ‘남방 정책’이라 불리는 이것은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 중국과 비슷한 생산비 효과를 내는 국가들에 투자하기를 종용하는 것이다. 국부 유출은 어쩔 수 없더라도 중국에 종속되는 것은 막아야겠다는 생각인 것 같다.


다헤이둥(大黑洞)은 타이완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화교 경제의 공통적인 문제다. 타이완·홍콩·싱가포르는 올해 경제성장률이 1∼3%에 머무를 것으로 전망된다. 이들 국가의 부동산 가격과 주가는 반 토막 또는 세 토막 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홍콩의 경제성장률은 1%대로 가장 낮은데, 10월 현재 46개월째 소비자 물가가 떨어지는 디플레 현상을 보이고 있다.


홍콩 밤거리 ‘불야성’은 옛말


홍콩의 구룡산 정상 부근 언덕은 관광 명소로 유명하다. 홍콩의 야경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말인 10월13일 홍콩의 야경은 엽서에서 흔히 보던 화려한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곳에서 여행 가이드를 하는 윤지영씨(35)는 “중국 반환 이전 홍콩을 방문했던 관광객들은 밤 불빛이 전 같지 않다며 아쉬워하곤 한다”라고 말했다. 과거에는 홍콩 정부가 도시 야경을 위해 고층 빌딩 전기료를 할인해 주었다. 최근 이 지원이 끊기면서 비용 절감을 위해 밤에 불을 끄는 건물주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 정부에 대한 홍콩인들의 감정은 우호적이지 않은 듯했다. 중국은 홍콩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공언했지만 이를 믿는 사람은 드물다. 한 홍콩 시민은 “홍콩에 인물이 없어서 둥젠화가 행정장관 직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중국의 입맛에 맞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라고 푸념했다.
중국 반환 전에 3%를 넘지 않았던 실업률은 지난해 5.1%까지 높아졌고 올해는 7%대까지 치솟았다. 개인 파산은 올해 들어 9월까지 1만7천4백27건이 발생해 지난해 같은 기간의 3배에 달한다.


홍콩이 이렇게 불황을 겪는 동안 홍콩 바로 북쪽에 자리잡은 중국의 선전은 날로 번창하고 있다. 인구 7백만명인 선전 시는 1인당 소득이 4천8백 달러로 중국에서 가장 높다. 홍콩의 부를 선전이 빼앗아간 셈이다. 홍콩은 물류 허브 기능은 선전에 넘겨주고 금융 허브 도시로만 남게 될 것이라고 전망하는 사람도 많다. 최근 주하이-마카오-홍콩을 잇는 대교를 건설하려는 계획이 홍콩 시민들의 반대로 난항을 겪는 것도 이 때문이다(오른쪽 상자 기사 참조).


홍콩 남서쪽에 자리잡은 마카오의 경우는 그래도 사정이 나은 편이다. 중국 반환 직후 한때 관광객이 급감하기도 했지만, 2001년 12월 카지노 운영을 독점 체제에서 경쟁 체제로 바꾸는 등 자구 노력을 기울인 덕분에 경제는 안정되었다. 하지만 외국 관광객들 중 중국인들의 비중이 날로 커지고 있다. 마카오 관광공사에 따르면 2000년 24.8%였던 중국 관광객 비율은 2001년 29.2%로 높아졌고 올해는 34.3%에 이른다. 마카오 리스보아 호텔에서 카지노 딜러 일을 하는 령 시오 펭(20) 씨는 “요즘 들어 거액을 쓰는 손님 가운데 중국인이 늘어나고 있다”라고 말했다. 세계인의 휴양지 마카오가 중국인의 휴양 도시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화교권 국가들 “한국에서 배우자”


경제 위기를 겪고 있는 이들 화교권 동아시아 국가에서는 한국을 벤치마킹하려는 분위기도 있다. 아시안게임 때 부산을 찾아 항만 시설을 둘러본 타이완 국회의원(입법의원) 민하오호 씨는 “가오슝 항을 부산항처럼 빨리 발전시켜야겠다는 자극을 받았다”라고 말했다. 타이완 마코토 은행 대표 이사인 셔먼추앙 씨도 “한국의 금융 구조 조정 과정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많다”라고 지적했다. 한국의 KOTRA에 해당하는 타이완 세트라(CETRA) 한국 지부의 린천추아 씨는 타이완은 경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생명 공학·IT(정보기술) 등 고급 기술로 중국과 차별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무역설명회 때문에 서울을 찾은 타이완 젱퐁 철강회사 사장 리충만 씨는 “3년 전 중국 광둥성에 공장을 지었는데, 가격은 쌌지만, 품질은 전보다 떨어졌다. 그래서 1년 만에 철수했다”라고 말했다. 가격을 포기하더라도 기술에 승부를 거는 업종은 중국에 진출하는 것이 유리하지 않더라는 얘기이다.


한국이 ‘다헤이둥’에 휘말리지 않은 것은 화교 경제권이 아닌 데다 내수 시장이 튼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이완과 홍콩이 겪고 있는 고민은 머지않아 한국의 고민이 될 가능성이 있다. 동아시아의 허브 국가가 되겠다는 목표도 이들과 겹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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