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 앞둔 대기업 피는 능력보다 진하다
  • 장영희 기자 (mtview@sisapress.com)
  • 승인 2002.11.18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재벌 3세들 약진할 듯…일본은 창업자 가족 특혜 없어
요즘 재계의 최대 관심사는 무엇일까. 대통령 선거가 아니다. 12월 혹은 내년 초 뚜껑이 열릴 인사다. 삼성 LG SK 현대자동차그룹 등은 언제 인사가 단행될지조차 결정되지 않았다고 밝혔지만, 벌써부터 물밑에서는 주요 그룹들의 후계 구도와 관련한 풍설이 어지럽게 나돌고 있다. 경영 수업을 받고 있는 재벌 3세들이 승진할지도 관심사이지만, 이들의 향방에 따라 최고경영자들의 진용도 재편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재계 관계자들은 올해 초 주요 그룹들의 이사회와 주주 총회의 가장 큰 특징이었던 30대 3세 경영인들의 약진 현상이 내년 초에는 더 뚜렷해질 것으로 관측한다. 3세 후계자 가운데 가장 관심을 모으는 이는 삼성 이건희 회장의 외아들인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보(34). 재계는 경영 수업을 받은 지 2년이 되는 내년 3월 삼성전자 주총에서 삼성이 그를 전무나 부사장급 등기 이사로 선임하리라고 내다본다.


삼성은 이미 로열 패밀리가 경영 일선에 들어가 있다. 이회장의 장녀인 이부진씨(32)가 호텔신라 기획부장으로 재직하며 차녀 서현씨(29)도 지난 7월 특채 형식으로 제일모직 패션연구소 부장으로 입사했다. 서현씨의 남편이자 이재용 상무보의 친구인 김재열씨(34)가 올 1월 제일기획 상무보로 임명되어 이상무보 친정 체제를 구축 중이라는 해석을 낳았다. 삼성 사정에 정통한 재계의 한 관계자는 이상무보의 경영 수업 기간은 이건희 회장의 건강 상태에 달려 있다면서, 20년간 경영 수업을 받은 이회장보다 훨씬 짧을 것은 분명하다고 귀띔한다.


3세 경영 구도의 윤곽이 그려져 본격 ‘등극’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는 것은 현대자동차그룹도 마찬가지다. 이건희 회장처럼 외아들을 대권에 안착시켜야 하는 동병상련의 숙제를 안고 있는 정몽구 회장은 이미 올 2월 초부터 ‘외국에는 40대 사장이 많다’는 말로 세대 교체를 예고했다. 1999년 말 현대자동차에 입사한 이래 해마다 고속 승진했던 정회장의 장남 정의선 전무(32)가 부사장으로 승진할지 현대 사람들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미 정회장은 둘째 사위인 정태영 현대기아차 구매총괄본부 부본부장(42)과 셋째 사위 신성재 현대하이스코 상무(34)를 중용해 가족 경영을 하고 있다.


이상무보와 정전무가 30대 차기 주자라면 최태원 SK(주)회장(42)과 롯데그룹 신동빈 부회장(47), 코오롱그룹 이웅렬 회장(46), 한솔그룹 조동길 회장(47)은 40대 경영인으로서 명실상부하게 적통을 이어받았다. SK의 경우 그룹을 전문 경영인인 손길승 회장이 이끌고 있는데, 창립 50주년이 되는 내년에 최회장이 그룹 회장이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돌고 있다. 그러나 SK측은 최회장이 손회장과 함께 가는 황금 분할 구도를 당분간 깨지 않을 것이라는 데 무게를 두고 있다. 이미 SK그룹 소유권을 확보하고 있는 데다 손회장이 경영을 잘하고 있어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LG그룹 구본무 회장(58)은 이건희 회장·정몽구 회장 반열에 들지만, 그 자신이 3세 경영인이다. 두 딸을 두고 있으나 아직 후계 구도와 관련한 언급은 없는 상태다.


이처럼 한국 재계를 이끌어 가는 주요 대기업들은 혈족 경영 일색이다. 오너로 통칭되는 지배 주주는 기업 자체가 공중 분해되어 완전한 경영 실패를 인정할 수밖에 없을 때만 경영권을 잃었다. 반면 한국과 기업 문화가 비슷하다는 일본의 경우는 한국과 딴판이다. 미쓰비시·미쓰이·스미토모 같은 옛 재벌 가운데 창업자 가족이 경영하는 곳은 없다. 창업자 정신은 남아 있어도 전문 경영인 체제가 정착된 지 오래다. 물론 일본의 거대 기업들이 대거 전문 경영인 체제로 옮아간 데에는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연합군이 전쟁 책임을 물어 재벌을 일거에 해체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혼다자동차 “창업자 가족 입사 금지”


재벌 해체에 영향을 받지 않은 독립된 대형 기업 중에서도 창업자 2∼3세가 경영하는 곳은 찾아보기 어렵다. 기업 규모가 엄청나게 커지면서 창업자 가족이 보유 지분을 유지하기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일본 재계에서는 ‘2세=사장’이라는 등식이 깨진 지 오래다. 혼다 자동차의 혼다 쇼이치로 창업자는 아예 가족 입사 금지라는 사내 규정을 만들어 세습 경영을 막았다.


세계적 수준의 일본 대기업 가운데 2∼3세가 강력한 리더십을 행사하고 있는 유일한 예는 산요전기 정도다. 산요전기 이우에 회장은 2세이지만 능력이 뛰어나 경영권을 세습했다는 비난을 잠재웠다. 그의 아들도 사업 부문 장을 맡아 대형 프로젝트들을 성공시키면서 후계자의 길을 가고 있다.
물론 창업자 가족이 경영진의 일원으로 참여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좋은 예가 세계 최대 가전업체인 소니와 자동차 업체 도요타이다. 소니의 창업자 고 모리타 아키오의 차남인 모리타 마사오(45)는 1981년 소니에 입사해 경영 수업을 하고 있다. 현 소니엔터테인먼트(SME) 임원이다. 도요타 쇼이치로 명예회장의 장남 도요타 아키오도 지난 5월 상무로 승진해 차차기 사장으로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창업자 가족이라고 해서 그들의 앞길이 탄탄대로인 것은 아니다. 일본은 한국과 달리 창업자 프리미엄이 거의 없다. 이유 없는 세습을 거부하는 기업 문화가 정착해 있는 것이다. 소니의 모리타 마사오나 도요타의 도요타 아키오는 다른 임원들과 다를 바 없이 경영 능력을 보이기를 요구받고 있다.


1998년 10월 모리타 마사오는 이데 노부유키 회장으로부터 한마디 상의 없이 SME로 가라는 발령을 받았다. 그는 여기서 획기적인 성과를 보여야 하는 처지이다. 아시아본부장으로 실력을 인정받은 도요타 아키오도 일단 합격점을 받았지만 사장에 오를지는 미지수다. 지난 1월 중순 일본 도요타자동차의 초 후지오 사장은 도쿄의 외신 기자들과 함께한 신년회에서 도요타 아키오가 장차 오너 경영인이 될 것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본인 하기 나름이다. 사장감으로 인정받으면 그렇게 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못된다. 지금 정해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경영 능력을 인정받지 못해 중도 퇴진한 경우도 적지 않다. 창업주 장남으로서 차기 사장이 유력했던 유통업체 이토요카도의 이토 야스히사 전무(49)가 지난 9월 돌연 사임해 일본 재계를 술렁이게 했다. 그는 죄송하다는 짤막한 말을 남기고 회사를 떠났다. 전문 경영인 스즈키 사장의 눈 밖에 났기 때문인데, 창업주이자 아버지인 이토 마사토시도 어쩌지 못했다.


이토요카도의 경쟁 업체였던 다이에도 가족 경영을 이어가지 못했다. 창업자 나카우치 이사오의 장남 나카우치 준(47)은 후계자로 낙점되었지만, 실적 부진을 이유로 1999년 부사장에서 상무로 강등되었다가 2000년 아예 퇴진당했다. 아버지 역시 경영 파탄에 따른 주주들의 압력에 못이겨 대표권을 반납해야만 했다.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내셔널과 파나소닉을 세계적인 브랜드로 만드는 등 일본에서 경영의 신으로 불리지만, 그의 자손은 그를 불명예스럽게 했다. 마쓰시타전기를 창업한 고노스케는 아들이 요절해 사위인 마사하루를 후계자로 삼았고, 마사하루는 아들인 마사유키를 부사장으로 올리는 등 차기 주자로 키웠으나 끝내 최고경영자 입성에는 실패했다. 2000년 4월 경영난에 직면한 마쓰시타 이사회가 핏줄인 마사유키 부사장 대신 나카무라 전무를 사장으로 전격 선임한 것이다.


일본 센슈 대학 채인석 교수는 “일본은 창업자 가족이든 아니든 사내 경쟁 시스템을 통해 최고경영자를 뽑으며, 창업자 가족이라고 해서 이렇다할 특혜 대우를 받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일본에서 한국 기업과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 한 사장도 “창업자 가족의 경영 수업은 능력 위주로 이루어진다. 계열사 경영을 맡긴 후 실력을 발휘하게 되면 경영자로 성장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퇴진 압력에 시달린다”라고 지적한다. 특히 일본 기업은 한국 재벌들과 달리 구조조정본부(옛 비서실)와 같은 오너의 지배 구조를 사수하는 안전 장치가 가동되지 않기 때문에 창업자 자손이라도 그야말로 적자 생존이라는 정글의 법칙을 따라야 하는 것이다. 이 사장은 한국 재벌가의 후계자들 중 이런 정글의 법칙을 적용했을 때 살아 남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물론 한국과 일본의 기업 역사나 발전 정도는 다르다. 맞비교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 이른바 오너 경영이 좋으냐 전문 경영인 경영이 좋으냐 하는 논란도 별 의미가 없으며 결론도 내릴 수 없다. 문제는 지배 주주가 사실상 경영을 장악한 한국 재벌 구조상 이른바 후계자의 경영 능력을 검증할 수 있는 사내외 장치가 가동될 수 있느냐에 있다. 이건희 회장도 말했듯이 최고경영자는 그 자신뿐만 아니라, 그 기업의 주주와 종업원 등 수많은 이해 관계자의 목줄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말과 내년 초 재벌 그룹 인사에서 3세 경영에 대한 논란이 재연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