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CEO, 불행한 노사
  • 장영희 기자 (mtview@sisapress.com)
  • 승인 2002.12.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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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성 두산중공업 회장, 국제상업회의소 부회장 피선…경영진·노조는 극한 대치
"나는 행복합니다.” 대한상공회의소 박용성 회장은 최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세계 최대의 민간 국제 경제 기구인 국제상업회의소(IC C) 이사회에서 부회장으로 피선되자 이렇게 소회를 밝혔다. 남들은 하나도 갖기 어려운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에다 ICC 부회장 자리까지 거머쥐었으니 이런 행복론을 펼칠 만도 했다. 2년 후 회장으로 자동 승계되는 ICC 부회장 자리는 박회장이 동아시아 경제인으로서는 처음이었으니 개인의 영광은 물론 한국 경제에 대한 호평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박회장은 두산그룹의 로열 패밀리로 두산중공업을 이끌고 있다(두산그룹 박용오 회장이 그의 형이다). 박회장은 그동안 정부나 노동·시민 단체에 대한 거침없는 소신 발언과 직설 화법으로 유명했다. 경제인으로서 금기를 깬 그의 이런 언행은 늘 파문을 일으켰다. 재계 대변인 격인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어서 그의 말에는 더욱 무게가 실릴 수밖에 없었다.


파리에서 날아든 ICC 부회장 피선 소식 역시 화제를 불러일으켰지만, 그에 대한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다. 두산중공업의 노사 갈등이 위험 수위를 넘고 있어 그의 내치 능력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산중공업은 올 3월부터 노사가 단체 협상에 들어갔지만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급기야 노조는 5월22일부터 파업을 벌였고, 사측은 다음날 회사와 노조 간에 체결된 단체협약을 일방 해지하는 강수로 맞섰다. 무려 47일 간이나 계속된 파업은 7월7일 가까스로 끝났지만, 노사는 아직도 파업에 따른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측의 일방 해지 이후 6개월이 흐른 지난 11월23일까지 새로운 단체협약이 체결되지 않아 현재 두산중공업은 무단협 상태라는 대기업 초유의 사태가 빚어지고 있다.


파업은 이른바 ‘현안’을 만들어냈다. 현안이란 사측이 파업 책임을 물어 단행한 조처를 뜻한다. 사측은 파업 주동자에 대해 해고 등 징계 조처와 함께 민·형사상 손해배상소송도 제기했다. 이에 대해 이 회사 박방주 노조위원장은 단체 협상 과정에서 이같은 현안이 파생한 것이므로 일괄 타결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사측을 대표하는 김상갑 사장은 단협과 무관한 요구는 구시대적 발상이라고 일축했다.


결국 두산중공업의 노사 갈등에는 이번에 밀리면 끝장이라는 위기감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노측은 사측이 노조 간부와 열성 조합원에게 손해배상이라는 경제적 압박을 가해 노조를 순치하고 결국 말살하려 한다고 의심하고 있다. 사측은 노조측 주장을 부인하면서도 차제에 두산중공업 노조를 상급 단체인 금속노조의 입김에서 벗어나도록 하겠다는 의도를 숨기지 않았다. 그러지 않는 한 민주노총의 정치 투쟁에서 두산중공업 노조가 헤어나오지 못하며 불법 파업이라는 악순환의 사슬도 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병훈 교수(중앙대·노동경제학)는 두산중공업 노사 갈등이 개별 사업장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민영화한 공기업의 노사 관계가 어떤 궤적을 그릴 것인가를 드러낼 좋은 본보기여서 사회적 함의가 자못 크다는 것이다.


두산중공업의 전신은 발전 설비와 담수화 설비 분야에서 세계 최고를 다투는 대표적 굴뚝 기업인 한국중공업(한중)이다. 두산그룹이 2000년 말 지분 51%를 사들여 경영권을 얻음으로써 한중은 21년 간의 공기업 시대를 마감했다. 한중은 포스코와 함께 공기업 민영화의 모범 사례로 꼽히지만, 주인이 바뀐 후 노사 갈등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박회장 “상생 원칙 지키는 노조를 원한다”


한중은 2001년 3월 두산중공업으로 이름이 바뀌기 직전까지 1천2백명에 달하는 임직원을 명예퇴직 형식으로 잘라냈다. 지금도 현장 노동자들 사이에 고용 불안이 심각하다는 것이 노조측 주장이다. 반면 사측은 원래 한중 노조는 1987년 이후 스물일곱 번이나 파업을 강행한 강성 노조여서 노사 불안을 빚어왔다고 주장한다. 다만 공기업 시절에는 거쳐가는 한중 사장들이 노조가 무리한 요구를 해도 들어주었지만, 두산 경영진은 그러지 않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두산그룹의 한 고위 관계자는 “한중 시절에는 독점 체제에다 정부라는 보호막이 있어 설령 노조의 무리한 요구를 수용해도 이익을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경영 환경이 크게 달라졌다. 국내외 시장이 개방되어 경쟁이 날로 격화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두산그룹은 외환 위기 직후 구조 조정의 대명사라고 치켜세워졌지만 한중을 얻기 전까지 성장 엔진이 꺼져가고 있다는 평을 들었다. 미래를 포기한 구조 조정이라는 얘기였다. 그러나 한중을 인수하면서 두산은 일거에 술 기업 이미지를 씻어내고 생산설비 제조 업체로 면모를 일신했다. 재계 순위도 12위에서 8위로 뛰어올랐다. 자산 2조4천억원인 (주)두산이 3조6천억원인 한중을 인수했기 때문이다. 한중은 1991년부터 연속 흑자를 기록하며 1999년 잉여 이익금만 5천억원이 넘는 알짜 공기업이었다. 창립 1백4년째인 2000년 말 (주)두산 박용만 사장이 “한국중공업은 앞으로 100년간 두산그룹을 이끌어갈 주력 기업이 될 것이다”라고 의미를 부여할 정도였다.


인수 당시에도 한중 노조 문제는 두산 경영진이 풀어야 할 숙제로 지적되었다. 경위가 어찌되었든 두산 경영진은 노사 화합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재계 관계자들은, 두산이 한중 인수 후 성과와 효율 중심의 체제를 구축하려고 시도한 것은 맞는 방향이었다고 지적한다. 공기업 시절 조직과 경영에 비효율적인 요소가 쌓여 있었던 것은 틀림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두산 경영진이 한중에서 ‘두산식’을 무리하게 적용하면서, 여기서 빚어지는 마찰도 최소화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노동 전문가들은 노조에 퇴로를 열어주지 않고 백기 투항하라고 밀어붙이는 것은 사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박용성 회장은 지난 9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노조가 아직 민영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아무리 내 욕을 해도 결코 노조에 항복하지 않겠다.” 그는 노조가 부당한 요구를 들고 나와 단체 행동을 하는 것은 명백한 불법 행위여서 고소 고발을 취하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사람들 입에 회자된 ‘떼로 몰려와서 떼를 쓰는 것은 바로 떼법’이라는 떼법론을 펼쳤다.


박회장은 그 때의 강경 입장을 견지하고 있을까. 최근 IOC 회의 참석차 멕시코에 머무르고 있는 박회장은 11월30일 e메일을 통해 〈시사저널〉에 이같이 밝혔다. ‘노조 말살 운동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다만 공기업을 벗어났으니 경쟁력을 갖춘 민간 기업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고, (나는) 상생의 원칙을 지켜 나가는 노조를 원한다.’ 반면 노조측은 칼자루를 지금도 박회장이 쥐고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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