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정권 ‘재계 총리’는 싫다?
  • 장영희 기자 (mtview@sisapress.com)
  • 승인 2003.01.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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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련, 재벌 오너들 회장직 고사해 ‘표류’…위기 의식해 변신 시도



재계의 총본산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표류하고 있다. 차기 회장을 뽑기 위한 총회(2월6일)를 10여 일 앞두고 있지만, 회장 직을 맡겠다고 나서는 재벌 총수가 없기 때문이다. 차기 회장 선임 구도가 깨지기 시작한 것은 1월10일께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이 고사하겠다는 뜻을 전경련에 전달하면서부터였다. 이후 고사 도미노 현상이 일어났다. 현대자동차 정몽구 회장과 LG그룹 구본무 회장 등 차기 회장감으로 거론되는 재벌 총수마다 손사래를 쳤기 때문이다.



1월17일 서울 여의도에 자리 잡은 전경련 빌딩에는 무거운 정적이 감돌았다, 이건희·정몽구·구본무라는 이른바 ‘빅3’ 중에서 한 사람을 회장으로 추대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현 회장단 가운데 효성그룹 조석래 회장·SK그룹 손길승 회장·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이 대안으로 거론되고 있기는 하지만, 이들 역시 고사할 뜻을 밝히고 있는 데다가, 설령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 떠맡는다고 해도 전경련 실세화라는 목표는 퇴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전경련은 1961년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군사 정부가 기업인들에게 ‘공장을 만들어 부정 축재를 속죄하고 단체를 만들어 정부에 협력하라’고 명령해 설립된 단체이다. 전경련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1968년 3월. 초대 회장은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



전경련 회장이 어떤 자리이기에 재벌 총수들은 저마다 자기 이름이 오르내리는것조차 부담스러워하는 것일까. ‘재계 총리’라고 일컬어질 만큼 영향력이 크고 명예로운 자리인 전경련 회장을 이렇듯 고사하는 흐름은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국제적으로도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인 중의 기업인으로 최상의 예우를 받는 자리가 전경련 회장이다. 24∼25대 회장이었던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경제 대통령인 것처럼 우쭐했다고 고백했을 정도다.



그런데 김우중 회장이 1999년 10월 대우그룹 붕괴에 따라 중도 하차하면서 전경련 회장은 기피하는 자리로 돌변했다. 당시 용기있게 나선 정몽구 회장에 대해 현정부가 제동을 건 것이 발단이 되었다. 정회장 카드가 좌절된 후 전경련 회장단은 차선책 찾기에 골몰했으나 아무도 하겠다고 나서는 이가 없었다. 결국 사세가 약한 경방의 김각중 회장이 가장 연장자라는 이유로 2000년 26대 회장으로 추대되었는데, 김회장은 3연임은 절대 안한다고 밝히고 있다.



“총회 하루 이틀 전에 회장 나올 것”



사실 지금 전경련 회장 고사 현상이 재연되고 있는 것에 대해 재계 관계자들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반응했다.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면서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는 것이다. 한 재벌 그룹 관계자는 이렇게 주장한다.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면서 재벌 회장들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정권 초기에는 늘 힘이 정치 권력에 몰리는데 도저히 융합하기 어려운 상대를 만났으니 왜 나서서 고생을 하겠느냐며 이미 지난해 말 입장을 정리한 것으로 안다.” 이 관계자는 특히 삼성이나 LG·SK·현대자동차 등 빅4 그룹은 누구를 ‘대리인’으로 내세우든 전경련에서 자기네 뜻을 관철하는 데 전혀 무리가 없다고 본다고 귀띔한다.






전경련측은 차기 회장을 구하지 못할 것이라는 관측을 일축했다. 한 고위 관계자는 “단 한 차례 오너 아닌 전문 경영인(19∼20대 유창순 회장)이 회장을 맡은 적이 있지만, 그 외 40년 동안 오너로 구성된 회장단에서 차기 회장을 선출한다는 원칙이 깨진 적이 없다”라며, 2월6일 총회 하루 이틀 전에는 회장을 맡을 오너 회장이 반드시 나올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관계자는 전경련 회장이라는 자리는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자리도, 하기 싫다고 피할 수 있는 자리도 아니라며, 삼고초려를 해서라도 빅3 회장들을 다시 설득하겠다고 말했다. 전경련은 현재 회장이 주도해 회장단 22명 모두의 동의를 얻어 만장 일치로 새 회장을 추대하는 교황식 선출 방식을 택하고 있다.



전경련은 선출 방식뿐 아니라 운영 체계도 다른 경제 단체와 다른 점이 많다. 매월 셋째주 목요일에 월례 회장단 회의를 하지만, 이 회의에서 무엇이 결정되는 일은 드물다. 참석하는 재벌 오너들도 공개적 발언을 삼간다. 정부를 의식한 탓도 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서로가 경쟁자이기 때문이다. 뭔가 자기네 그룹의 발목을 잡는 현안이 발생하면 전화나 인편으로 은밀히 전경련 차원에서 정부에 건의해 달라고 요구한다는 것이다.



재계에서 전경련의 용도를 문제 삼는 기류는 아직 없다. 특정 그룹이 자기네 이름으로 정면으로 맞닥뜨리기보다 전경련 이름으로 우회하는 것이 여러 모로 좋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경련의 대정부 건의는 꽤 성과가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경련의 한 관계자는 “한달에도 수십 건씩 건의를 올린다. 이 가운데 절반 정도는 정부가 받아들인다. 5할 타율은 훌륭한 성적이다”라며 전경련 사무국이 논리 개발에 대한 노하우를 축적하고 있으며 로비력이 뛰어남을 강조했다.






“전경련이 초청하면 응하지 않는 관료 없다”



회원사 처지에서는 정보를 얻고 대정부 인맥을 구축하는 데에도 편리하다. 전경련이 조찬 모임 등에 경제 관료들을 부르면 자연스럽게 안면을 틀 수 있다는 것이다. 전경련이 초청하면 응하지 않는 관료들이 없다시피한 것도 로비 단체 전경련의 힘을 드러낸다.



현재 전경련 회원사는 4백4사. 2000년 문호를 개방해 외국계 기업들도 29개가 가입했다. 하지만 전경련은 5대 재벌을 위한 ‘그들만의 리그’라는 비판을 오래 들어 왔다. 늘 재계의 건의로 포장되지만 10대 재벌, 특히 5대 재벌을 위해 움직여 왔다는 것이다. 10대 재벌이 내는 회비가 한 해 예산의 80∼90%를 차지한다. 가장 많이 내는 그룹은 삼성으로 지난해 60억원을 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해 사무국 예산은 1백10억원. 매년 100억∼1백50억 원이었다.



전경련은 ‘적’이 많다. 전경련의 힘이 빠지는 듯하면 곧바로 무용론·존폐론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전경련 스스로 자초한 측면도 적지 않다. 철저한 재벌 오너 중심의 로비 단체인 것을 부인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큰 재벌이 회장 자리를 나누어 먹으니 작은 재벌들의 불만이 없을 수 없다. 의사 결정 구조와 재원 조달 및 집행 과정도 투명하지 않다. 외부에 공개하지 않는 것은 물론 회원사 간에도 정보가 공유되지 않고 있다는 후문이다.



전경련이 위기에 처한 것은 회장 선임 문제 때문만은 아니다. 최근 전경련이 인사 등 구조 개편안에 대한 용역을 학계에 의뢰한 것도 스스로 변신하지 않고는 살아 남을 수 없다는 위기 의식이 높다는 반증이다. 재계 일각에서 아예 이번 기회에 과감히 문호를 열어 재벌 오너 클럽이라는 이미지를 불식하고 그 첫 작업으로 비오너 회장을 뽑으려는 반란 기류마저 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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