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강 권력 쥔 투자 정보 ‘기상청’
  • 장영희 기자 (mtview @sisapress.com)
  • 승인 2003.0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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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평가회사 S&P·무디스·피치는 어떤 곳?
미국계 신용평가 회사인 무디스가 지난 2월11일 북한 핵이라는 안보 위협을 들어 신용 등급 전망을 ‘긍정적’에서 ‘부정적’으로 두 단계 내리자 한국은 충격에 휩싸였다. 이 날 금융 시장은 주식·채권·원화 가치가 모두 내려꽂히는 이른바 ‘트리플 약세’를 면치 못했다. 신용 등급도 아닌 ‘전망’을 조정한 것을 갖고 한바탕 소동이 빚어졌으니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 격이었다.





무디스는 1997년 외환 위기가 일어나자 그 해 11월28일부터 12월21일까지 한 달도 안되어 한국의 국가 신용 등급을 3차례에 걸쳐 6단계나 깎아내렸다. 무디스의 발표가 있을 때마다 서울 외환 시장은 초토화했고 주식 시장 역시 아비규환이었다. 무디스와 함께 세계 3대 신용평가 회사로 꼽히는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와 피치도 10월부터 신용 등급을 내리기 시작했고 한국 정부와 시장은 세 회사의 움직임에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었다.



한국이 다시 A등급을 받은 것은 지난해. 프로 야구로 치면 마이너 리그에서 메이저 리그로 복귀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살인적으로 등급을 강등해 ‘저승사자’로 불렸던 무디스가 3월28일 가장 먼저 ‘A3’ 등급을 부여한 것을 시발로 피치(A)와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A-)가 뒤를 이었다(표 참조). A등급을 받기까지 재정경제부 국제금융국 관료들은 등급 상향 조정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1998년 초부터 이 세 회사가 모여 있는 미국 뉴욕을 발이 닳도록 찾았고, 세 회사의 평가단이 방한할 때마다 정부는 ‘칙사’ 대접을 했다.
민간 회사일 뿐인 이 세 회사에 대해 한 나라 정부가 이렇게 매달린 이유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무디스·피치가 국제 금융 시장에서 무소불위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세 회사는 골드먼삭스 같은 투자 은행과 투자 펀드와 함께 세계 금융의 중심인 월가의 3대 축을 형성하고 있다. 돈을 갖고 있고, 돈을 굴리고, 그리고 투자 대상의 등급을 매기며 세계 금융 권력을 만들어내는 곳이 월가이다.






세 회사가 신용평가 시장 93.7% 점유



미국을 뺀 모든 나라는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에 울고 웃을 수밖에 없다. 한국의 경우 당장 등급이 한 단계 오르면 차입 금리가 0.35% 포인트 떨어져 차입 비용이 연간 5억 달러나 줄어든다. 한국에 대한 외국인들의 투자 욕구가 높아지는 부수 효과도 있다. 한국 정부가 국가 신용 등급 올리기에 애를 썼던 것은 이것이 한국 기업 등급의 상한선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가령 삼성전자가 아무리 세계적으로 높이 평가받아도 국가 신용 등급이 낮으면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국가 등급이 투자 부적격 수준이면 삼성전자는 해외 시장에서 돈을 빌리기조차 어렵고, 설령 빌린다 해도 엄청나게 높은 이자를 지불해야 한다.



그렇다면 미국 정부 기관도 아닌 세 회사의 힘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바로 전세계 기업들이 벌벌 떤다는 미국 증권관리위원회(SEC) 덕분이다. 1975년 증권관리위원회는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30여 나라 신용평가 기관 50개 가운데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무디스·피치 세 회사에만 국가 인증 신용평가기관(NRSRO) 자격을 주었다. 이는 신용평가 업무의 공신력을 인증받는 자격증이나 마찬가지다. 증권관리위원회는 뉴욕 시장에 발을 들여놓으려는 금융기관이나 기업은 세 회사 가운데 둘 이상으로부터 최상 등급을 받아야 한다고 정했다. 그동안 LACE파이낸셜·이건존스·도미니언본드레이팅 등 수십개 신용평가 회사가 증권관리위원회에 자격을 신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과점 체제이지만 세 회사 사이의 경쟁은 격렬하다. 특히 양대 산맥으로 꼽히는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와 무디스의 자존심 대결은 유명하다. 두 회사는 시장 점유율 면에서 엎치락뒤치락을 거듭하다가 2001년부터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가 다소 앞서고 있다.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와 무디스는 시장을 각각 41.4%와 37.9% 나누어 가졌다. 피치의 14.4% 점유율을 합치면 세 회사의 점유율은 93.7%나 된다.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는 1860년 뉴욕에서 투자 정보를 제공하는 회사로 출범했다가 1926년부터 채권에 대한 신용 평가 사업을 시작했다. 현재 2천여 기업이 발행하는 채권과 어음을 평가하고 있다. 평가 국가의 정치나 경제에 대한 시각을 변화시킬 만한 새로운 정보가 있을 때 등급을 조정해 미래 지향적이라는 평을 듣는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와 달리 무디스는 다소 보수적이다. 미국·일본·영국 정부 등 65개국의 국가 등급과 7만여 기업 및 금융 회사, 유가 증권 6만종을 평가하고 있다. 피치는 1997년 미국의 피치와 영국의 IBCA가 합병한 회사. 특히 자산담보부채권(ABS)에 강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미국의 이해 대변” 비판도 많아



세 회사는 아시아와 남미 경제 위기 이후 부쩍 비판을 받았다. 위기를 제때 감지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후에도 시장 변화를 제대로 읽지 못해 신용 등급이 시장에서 정확한 투자 지표로 활용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미국 언론들조차 세 회사가 엔론 사태 직후에는 등급 조정에 늑장 대응하더니 이제는 너무 빨리 등급을 내려 금융 시장을 교란하고 있다는 비난을 퍼붓고 있다.



지나치게 미국의 이해에 봉사한다는 눈총도 사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이 그런 것처럼 세 회사 뒤에도 미국 재무부와 월가의 이해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일본의 국가 등급이 강등되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가장 낮은 것은 물론 국민 절반이 에이즈 환자인 보츠와나보다 낮게 평가된 데 대해 일본 정부가 발끈한 것이 좋은 예다. 일본 정부는 재정 적자와 무역 적자라는 쌍둥이 적자가 나날이 늘어나고 있는 미국은 왜 만년 최우등 국가냐고 비아냥대며 세 회사를 정면 공격했다. 최근 무디스가 한국에 대한 전망을 끌어내리자 일각에서 노무현 정부의 대북·대미 정책을 압박하려는 고도의 메커니즘이 작동한 것이라는 이른바 음모론이 불거진 것도 이들이 미국의 이익을 대변한다고 여기는 탓이다. 지난해 9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일본·한국 등 10여 개 아시아 국가 평가회사들이 아시아신용평가기관협회를 발족한 것에도 미국이 주도하는 평가 체제에 대한 반감이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세 회사의 ‘신용 권력’에 대해 한국이 어떤 노선을 걸어야 하느냐를 두고 재경부 권태신 국제금융국장이 한 말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신용 등급은 온도계일 뿐이다. 등급 조정에 호들갑을 떨 필요도 없고 국수주의적으로 해석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설령 미국이 주도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한국이 경쟁력을 갖고 있다면 시장이 알아줄 것이고 그들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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