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률 1%…처절한 ‘패자 부활전’
  • 안은주 기자 (anjoo@sisapress.com)
  • 승인 2005.02.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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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 기업인 재기 ‘하늘의 별 따기’…기술·정책자금도 함께 사라져
그들은 ‘유령’이다. 이름과 얼굴을 세상에 드러낼 수 없다. 제 이름으로 된 휴대전화는커녕 통장조차 가질 수 없다. 한때는 수많은 사람을 먹여살렸고, 나라에 바친 세금도 적지 않은 사장님들이었다. 그러나 부도를 낸 뒤 그들은 더 이상 사람처럼 살 수가 없다. 채권자들의 독촉에 시달리며 ‘신용불량자’ 또는 ‘경제사범’이라는 꼬리표를 단 채 얼굴도 이름도 다 빼앗긴 유령이 되고 만 것이다. 그들 중의 상당수는 가족마저 유령의 세계로 끌어들였다.

넉 달 전 유령 신세가 된 김준섭씨(42·굿엠 전 대표)는 폐허처럼 변해버린 텅 빈 공장으로 매일 출근하며 재기할 꿈을 키우고 있다. 김씨가 7년 11개월 동안 피땀으로 일군 공장이지만 부도 후 경매가 진행 중이어서 곧 남의 손으로 넘어갈 예정이다.

지난해 가을까지만 해도 김씨는 전북에서 잘 나가는 기업인이었다. 그가 경영하던 회사는 황토를 소재로 한 김치통을 특허 개발해 연간 45억~50억 원 매출을 올렸다. 이 회사는 황토 김치통을 5년 이상 만도에 독점 공급하면서 안정적으로 성장해왔다. 덕분에 굿엠은 ‘이노비즈’(기술 혁신) 기업으로 선정되었고, 김사장은 성공한 벤처기업인으로 주목되었다. 여유 자금을 40억원이나 비축할 만큼 회사 손익 구조도 탄탄했다.

그러나 쌀냉장고를 개발하면서 불행이 시작되었다. 김씨는 황토 김치통의 성공에 만족하지 않고 쌀냉장고 개발에 들어갔다. 여유 자금 40억원이면 신제품 개발 비용으로 충분하리라 판단했다. 게다가 이노비즈 기업이어서 정부의 정책 자금을 대출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신제품 개발에는 더 많은 돈이 들었다. 김씨는 30억원을 대출받고 2년 동안 총 70억원을 들여 쌀냉장고를 개발해 지난해 4월 출시했다.

자금난에 무너진 신제품 개발 꿈

회사는 빚까지 끌어다 쓴 처지여서 자금 사정이 좋지 않았지만 버틸 수는 있었다. 김치냉장고 시즌인 가을부터는 숨통을 틀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김씨는 뒤통수를 맞고 말았다. 굿엠의 김치통을 공급받던 만도가 갑자기 ‘공급선 다변화’ 정책에 따라 다른 기업의 김치통도 함께 납품받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굿엠의 매출액은 절반으로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쌀냉장고를 개발하느라고 정책 자금 30억원을 대출받은 굿엠으로서는 은행 대출을 한푼도 더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갓 출시한 쌀냉장고가 시장에서 자리 잡을 때까지 버틸 방법이 없었다. 회사는 도산을 피하지 못했다.

회사가 도산하면서 모든 빚과 책임은 김준섭씨에게로 넘어왔다. 거래처를 포함한 채권자 50여명과 빚 60억원을 떠안은 김씨는 경제사범이자 신용불량자로 전락했다. 다행히 아내가 공무원이어서 관사에서 살던 김씨네는 거리로 내쫓기는 위험만은 모면했다. 하지만 아내마저 정부 정책자금을 대출받을 때 연대보증을 서서 빚 5억8천만원을 진 채무자가 되었고, 월급의 50%를 압류당하고 있다.본인 이름으로 사업자등록증을 낼 수 없고 통장 거래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손발이 꽁꽁 묶이고 떠안은 빚이 많기는 해도, 다른 부도 기업인에 비하면 김씨의 처지는 나은 편이다. 거래처와 친지들의 도움을 받아 재기를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친지들은 십시일반으로 재기에 필요한 종자돈을 마련해 주었고, 거래처들은 재료비만 받고 신제품 금형을 떠주는 등 물심 양면으로 도와주고 있다. 김씨는 “오는 4월이면 신제품 개발을 끝내 시장에 내놓을 수 있다. 3년 안에 모든 빚을 다 갚고 새로운 사업체를 성공시키는 것이 목표다”라고 말했다. 20개가 넘는 특허권을 쥐고 있는 김씨가 재기 발판으로 삼을 ‘무기’는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부도 기업인 20%, 폐인·노숙자 전락

그러나 부도 기업인 가운데 김씨처럼 재기할 발판을 마련할 수 있는 이는 많지 않다. 부도 기업인들의 모임인 전국부도기업인재기협회(전재협) 자료에 따르면, 부도 기업인이 재기에 성공하는 확률은 1% 미만이다(아래 표 참조). 전체 부도 기업인 가운데 약 19%는 남의 이름으로 사업자등록을 하고 금융 거래가 중지된 신용불량자 상태에서 악전 고투할 뿐이다. 또 부도 기업인 열 가운데 여섯(60%)은 사업을 포기하고 생계를 위해 장사나 행상, 일용직 노동자 생활을 하고 있다. 나머지 20%는 무능력자로 전락해 폐인이 되거나, 알코올 중독자나 노숙자로 떠돌다가 비참하게 삶을 마감한다.이선국씨(53·가명)에게도 재기의 길은 멀고 험해 보인다. 10년 동안 인쇄업을 하다가 지난해 여름 부도를 낸 이씨는 부도와 함께 모든 것을 잃었다. 그에게 남은 것은 10억여 원의 빚과 가족뿐이다. 부도 후 그의 가족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고 있다. 오전 한두 시에도 빚쟁이가 찾아와 초인종을 눌러대고, 가장 친했던 친구는 ‘빚을 갚지 않으면 딸들을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했다. 공장의 기계들이 경매로 넘어간 것도 모자라 집안에 있던 살림살이까지 압류되었다. 이씨의 아내 김희숙씨(48·가명)는 “1백17만원에 경매로 넘어간 살림살이를 하루 만에 1백50만원에 되샀다. 당시 부도 난 사실을 모르는 둘째 딸이 대입 시험을 앞두고 있던 터여서 울며 겨자 먹기로 살림을 되살 수밖에 없었다”라고 털어놓았다. 이씨네 살림살이를 낙찰받은 거간꾼이 물건을 가져가기 전에 이씨에게 전화해 웃돈 30만원을 얹어서 되사라고 요구하자, 이씨는 앉은 자리에서 30만원을 더 주고 살림을 ‘지켰다’.

하지만 곧 경매로 넘어갈 집을 지킬 방법은 전혀 없다. 아내 김씨는 부도 이후 생활비라도 벌겠다며 학교 급식소에 잡역부로 취직했고, 이씨 또한 지인의 소개로 직장을 얻었지만 그 많은 빚을 갚기란 요원하다. 이씨는 “아내나 나는 신용불량자여서 일용직이나 잡역부로밖에 취직할 수 없다.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박봉으로 어떻게 빚을 갚아갈 수 있을지 난감하다. 돈도 없고 기계도 없으니 무슨 수로 재기할 수 있겠는가”라고 낙담했다.

매년 2천~3천 명이 넘는 중소기업인들이 이씨와 같은 전철을 밟는다. 한국은행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에만 2천7백43개 업체가 자금난으로 부도를 냈다. 재작년에는 3천2백10개로 더 많았다. 아직 부도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중소기업의 상당수는 자금난에 허덕이고 있다(48쪽 표 참조). 부도를 부르는 저승사자 ‘고리 사채’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가 최근 실시한 ‘중소기업 자금 실태 조사’에 따르면, 중소기업 열 가운데 여섯(58.3%)은 자금 사정이 어려운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가운데 일곱(73.1%)은 금융권이 신규 대출을 기피하고 있고, 추가 담보를 요구하거나 대출 한도를 축소해 금융권으로부터 자금을 융통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그러다 보니 중소기업 열 가운데 한 기업 이상(14.4%)은 이자가 높은 사채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중소기업들은 월 평균 금리 2.0%인 사채를 8천2백만원 가량 이용한다는 통계가 있다. 이와 같은 고리 사채는 기업의 발목을 잡는 올가미가 되어 결국 부도로 이어진다.

경기도 포천에서 제조업을 하던 윤기훈씨(55·가명)는 사채에 발목을 잡혀 도산한 전형적인 경우이다. 윤씨는 경영이 어려워진 2000년부터 어음과 당좌수표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조금씩 쓰던 사채 할인이나 융통 어음은 시간이 지나면서 정상으로 지급되는 물품대보다 더 많아지게 되었고, 윤씨는 이를 메우기 위해 아들과 딸의 이름으로 주택 담보 대출과 마이너스 대출 등을 더 받았다. 그러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한 달 전 결국 부도를 내고 말았다.

부도가 난 날 윤씨는 도주했고, 아들과 딸이 한 달이 넘는 지금까지 채권자들의 빚 독촉을 받고 있다. 부도 금액과 윤씨가 갚아야 할 돈은 10억원이 넘는데, 받을 금액은 1억원도 채 안되는 상황이다. 은행 담보로 잡혔던 집은 경매 처리될 수밖에 없어서 윤씨네 가족은 곧 길거리로 나앉을 지경이다. 윤씨의 딸은 “남들은 어딘가 돈을 챙겨둔 게 아니냐고 하지만, 아버지는 온 가족의 돈까지 다 끌어다 썼다. 처음 겪는 일이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라며 전재협에 상담을 의뢰해 왔다.

부도를 낸 기업인 또는 그 가족은 위기를 해결하고 극복하는 데 필요한 도움을 받을 곳이 전혀 없기 때문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전재협의 문을 두드린다. 부산의 팀파니하우스 박병주 사장(52·부산 진구 범천동) 같은 사람은 전재협의 도움이 없었다면 재기에 도전할 엄두도 못 냈을 것이라고 말한다(52쪽 상자 기사 참조). 부도 기업인들의 재기를 돕겠다는 기치를 내건 전재협이지만, 민간 자생 모임이어서 도움을 주는 데는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전재협 김진일 회장은 “우리 모임에서는 부도를 처음 당하는 기업인과 가족에게 가능하면 피해를 줄일 길을 알려주고 있지만, 부도 기업인이 재기할 수 없도록 옭아매고 있는 사회 환경에서 민간 단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라고 말했다. 그는 정부가 나서서 부도 기업인들을 재기시킬 시스템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부도 기업으로 인한 사회적 손실은 날로 커질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54쪽 딸린 기사 참조).

당장은 부도 기업에 투입된 정부 정책자금을 회수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 굿엠의 쌀냉장고를 보자. 70억원이나 투자해 개발한 이 쌀냉장고는 굿엠이 문을 닫으면서 시장에서 사라졌다. 이 냉장고를 개발하는 사업에는 정부 자금이 30억원이나 투입되었다. 김준섭씨가 재기에 성공하지 못하면 이 돈을 회수하기 어렵다. 국민의 세금이 공중 분해될 위기에 놓인 것이다.

1998년부터 정부가 중소기업 지원금 명목으로 쓴 정책자금은 3조원 가량인데, 이 가운데 5% 정도는 해당 기업이 부도가 나 회수하지 못하고 있다. 직접 대출 외에도 신용보증기금이나 기술신용보증기금이 중소기업 대출에 보증하는 돈도 몇 십조원이 넘는데, 이 가운데도 회수하기 어려운 돈이 적지 않다.

또 기업의 부도는 그 기업과 경영자가 가지고 있던 기술과 경영 노하우의 사장(死藏)으로 이어져 눈에 보이지 않는 손실액 또한 적지 않다. 경기도 군포에서 반도체 장비업체를 10년 동안 운영하다가 지난해 부도를 낸 백 아무개씨 사례를 보자. 백씨가 생산하던 반도체 설비는 수입대체품이었다. 백씨 회사가 매년 벌어들인 25억원만큼 한국은 수입할 필요가 없었다. 그 덕에 백씨의 회사는 이노비즈 기업으로 선정되었고, 신기술 개발에 필요한 정책 자금 5억원 가량을 대출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신기술 개발이 80%쯤 성공했을 때 은행이 대출금 회수를 요구하자, 자금 사정이 어려웠던 회사는 부도가 나고 말았다. 본인의 집은 물론 아버지와 결혼한 여동생 집까지 담보로 해 대출금을 끌어다 쓴 백씨로서는 기술 개발을 마칠 때까지 필요한 자금을 마련할 길이 없었다. 정부의 보증 아래 은행에서는 기술 개발에 필요한 정책자금을 빌려주었지만 1년 이상 기다려주지 않았다. 대출금 상환을 1년만 더 유예해 주었다면 기술 개발을 마치고, 부도도 내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정부와 은행은 대출금 상환을 고집하며 백씨에게 폐업을 종용했다. 폐업하면 담보물을 처리해 일정액을 회수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름이 무색한 ‘기술 개발 자금’ 대출

백씨는 “은행이나 정부 담당자로서는 ‘털고 가는’ 것이 편했을 것이다. 대출 상환을 유예해줄 경우 계속 관리해야 하는 데다 상사에게 문책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백사장 때문에 내가 잘리면 되겠느냐’고 말하는 담당자 앞에서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내 욕심만 부릴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백씨는 담당자보다는 기술 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대출해주면서 1년 만에 회수하겠다는 정부 정책에 문제가 있다고 비판했다.

백씨가 재기에 성공하지 못하는 한 백씨 회사가 개발하려던 신기술은 빛을 보기 어렵다. 이 제품 역시 수입대체품이다. 백씨는 “살아날 가능성이 희박한 한계 기업은 빨리 정리해야 하지만, 그 기술과 경영 노하우는 살려야 한다. 부도와 동시에 아이템까지 사장되는 것만은 막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정부가 구조조정조합(펀드)에 정책자금을 출자하여 기술력을 보유한 부실 중소기업의 구조 조정과 회생을 지원하고 있지만, 아직 미미한 수준이다. 2000년부터 시작한 이 사업은 지금까지 100여개 사를 지원하는 데 그쳤다. 다행히 정부는 올 7월부터 ‘벤처 패자부활제’를 도입해, 실패했지만 재기할 가능성이 높은 벤처 기업을 되살리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개인이나 국가 모두에게 실패도 자산이 될 수 있다. 벤처 패자부활제를 비롯해 부도 기업인들의 재기를 돕는 정책은 실패라는 자산으로부터 얼마나 튼실한 꽃을 피워낼 수 있는가를 확인하는 시험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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