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감옥 가라”…“너나 가라”
  • 나권일 기자 (nafree@sisapress.com)
  • 승인 2003.05.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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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임동원, 대북 송금 책임 놓고 ‘샅바싸움’…“임씨가 희생양 될 수도”
'대북 송금 특별 검사’(특검) 수사를 통해 국정원이 대북 송금을 주도한 것으로 드러나자 가장 난처해진 인물은 임동원 전 국정원장이다. 임씨는 지난 2월14일 “국정원은 현대의 대북 사업과 관련해 환전 편의만 제공했다”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국정원이 2억 달러 송금에 깊숙이 개입한 사실이 특검 수사를 통해 드러났다.

특검팀은 5월9일 “대출금 4천억원은 현대상선이 갚을 돈이 아니다”라고 말한 김충식 전 현대상선 사장을 소환해 조사했다. 5월12일에는 대북 송금 과정에 개입한 것으로 알려진 최규백 전 국정원 기조실장을 소환했고, 김보현 국정원 3차장, 임동원 전 국정원장을 차례로 조사해 사건의 핵심부로 파고들 예정이다. 특검팀이 2억 달러(2천2백35억원) 송금 과정을 본격적으로 캐기 시작하면서 국정원이 여론의 뭇매를 피해 가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같은 특검 수사에 대해 임씨는 “거액을 환전하는 것이 해외 송금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몰랐었다”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정치권의 한 인사는 “임원장이 희생양이 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 박지원 실장이 의외로 특검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다”라고 전했다.
때맞추어 특검 수사를 준비하는 임동원 전 국정원장과 박지원 전 비서실장이 물밑에서 치열한 샅바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관측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정치권 주변에서는 특검 초기부터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사법 처리되어야 국민이 납득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았다. 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북한의 송호경 조선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과 함께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 개최를 막후에서 성사시킨 주역이다. 임동원 전 원장은 햇볕정책 전도사를 자처하며 남북 정상회담과 관련한 실무 협상을 주도했다. 두 사람은 또 김대중 전 대통령이 퇴임할 때까지 국민의정부를 지킨 핵심 인물이다.

특검 수사를 앞두고 현재까지는 두 사람 가운데 박지원 전 실장이 유리한 처지에 있다. 대북 송금 과정만 따질 경우 임동원 전 원장에게 더 책임이 있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임씨는 자금의 성격이 어떻든, 이미 드러난 2억 달러 대북 송금을 지시했다는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한 형편이다.
박지원 전 실장이 드러나지 않는 막후 특사 역을 맡았고, 임동원 전 원장은 공개된 협상 파트너였다는 점도 임씨에게 불리한 여건이다. 정치권의 한 인사는 “중요한 사건에서는 무대 연출을 맡은 인물이 있고, 각본에 따라 배우 역을 맡은 사람이 있다. 남북 문제의 특성상 막후 실상이 드러나기는 어려운 것 아니냐”라며 사실상 박지원 전 실장을 정밀하게 수사하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내다보았다.

그러나 특검 수사가 ‘남북 정상회담’과 ‘대북 송금’ 배경을 집중적으로 파고들 경우 박지원 전 실장도 안심할 수만은 없다는 시각이 있다. 정부가 인정한 현대의 5억 달러 대북 사업자금이 한나라당이 주장하는 대로 정상회담 대가였다는 것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막후 협상을 맡았던 박지원 전 실장이 의혹의 핵심 인물로 떠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권에서는 임동원 전 원장보다는 박지원 전 실장이 정몽헌 현대 아산 이사회 회장 등과 함께 ‘금액’을 결정하고 ‘조달 계획’과 ‘송금 방법’까지 구상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본다.

특검팀의 수사가 현대의 분식 회계 의혹까지 파고든다면 상황은 박지원씨에게 더 어려워진다. 대북 송금 의혹 사건에 정통한 한 인사는 “감사원은 현대상선이 대출받은 돈 4천억원 가운데 2천2백35억원만 북한으로 보내졌다고 발표했다. 감사원은 당시 계좌 추적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나머지 돈 1천7백65억원의 정확한 사용처를 확인하지 못했다”라고 지적했다. 특검이 만약 현대그룹의 분식 회계 의혹을 수사할 경우 이 돈의 향방과 관련해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 등과 자주 접촉했던 박지원 전 실장에게 더 의혹이 쏠릴 수 있다. 대북 송금 사건의 이러한 미묘한 특성 때문에 임씨와 박씨가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는 관측이 정가에서도 꽤 신빙성 있게 돌았다. 국정원과 정가 소식통들에 따르면, 두 사람이 특검을 준비하는 태도는 각자의 성격만큼이나 대조적이다.

박지원씨는 김주원 대한변호사협회 사무총장을 변호사로 선임해 특검 수사에 적극 대비하고 있다. 박씨는 청와대에서 물러난 뒤 특유의 ‘위스키 & 캐시’ 전략을 활용해 언론계 간부들을 부지런히 만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박씨는 지인들에게 “나는 (대북 송금 사건과 관련해) 클린하다. 송금 문제는 국정원 쪽에 알아보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자신에게 문제가 없다면서, 국정원(임동원 원장 쪽)에 책임을 돌리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말이다.
박씨가 ‘결백’을 적극 주장하고 다니는 반면, 학자 출신인 임동원씨는 회고록 집필에 몰두하면서 언론과 접촉을 끊고 칩거한 상태다. 임씨는 대북 송금 특검에 대비해 변호사 선임계도 내지 않았다. 대북 송금 업무에 관여한 국정원 간부들이 특검에 줄줄이 소환되었는데도 공식 발언을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임씨가 박씨의 행태를 못마땅해 할 것임은 당연하다. 지난 3∼4월, 국회 주변에서는 ‘박씨가 언론계 인사들을 만나고 다니면서 임씨에게 책임을 떠넘기려고 하는 것에 대해 임씨가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얘기가 돌았다.

임동원 전 원장이 실제 남북 정상회담의 의제에 집중하느라 대북 송금 실체를 제대로 몰랐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민주당의 한 인사는 “재임 시절 국정원 법률특보에게 중요한 사안마다 매번 꼼꼼하게 자문하던 임원장이 대북 송금과 관련해서는 자문하지 않았다. 문제의 돈이 북한으로 간다는 사실을 몰랐거나, 단순히 국정원이 현대 대북 사업에 환전 편의만 제공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라고 말했다.

정치권의 한 인사는 “현대상선이나 국정원이나 2억 달러가 지나간 통로에 불과하다. 본질은 막후에서 누가 송금 액수를 협상하고, 송금 방법을 정했느냐 하는 점이다”라고 말했다. 대북 송금 의혹을 풀 열쇠는 박지원 전 실장이나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 김윤규 현대아산 사장이 쥐고 있기 때문에 특검의 계좌 추적 성공 여부에 특검의 명운이 달려 있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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