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에 ‘충격과 공포’ 덮치나
  • 나권일 기자 (nafree@sisapress.com)
  • 승인 2003.05.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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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만 기조실장 ‘기강 확립’ 선포…“인사 태풍 불라” 간부들 초긴장
국가정보원이 출범한 지 4년 만에 다시 수술대 위에 올랐다. 지난 5월1일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직인수위원 시절부터 국정원 개혁의 밑그림을 그려온 서동만 상지대 교수를 국정원 기획조정실장에 임명했다. 국정원 1·2·3 차장으로는 염돈재·박정삼·김보현 씨가 각각 임명되었다. 국정원 직원 인사권과 예산권을 쥐게 된 서동만 기조실장은 취임 첫날부터 ‘기강 확립’을 들고 나와 국정원 간부들을 바짝 긴장시켰다. 서동만 실장은 임명장을 받은 후 “개혁 이전에 기강 확립이 중요하다. 정보기관의 정보가 (외부로) 줄줄 새고 있다. 이것부터 바로잡겠다”라고 밝혔다.

서동만 실장이 말한 ‘정보 유출’은 국정원 내 특정 지역 인맥이 최근 정치권과 언론에 로비를 했다는 의혹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서동만 실장이 고영구 국정원장 인사청문회를 준비하던 4월 초 언론에는 “서교수가 국가의 3급 비밀인 국정원의 조직과 인력에 대한 업무보고를 받고 있다”라며 민간인 신분인 서교수가 업무보고 자리에 배석한 문제를 지적하는 보도가 나왔다. 특히 <한국일보>는 4월10일 ‘호남 인맥 청산이 목표냐’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국정원 조직 개편을 추진할 태스크포스 진용에 호남 출신들이 배제되어 조직 운용 개선보다는 호남 출신을 타깃으로 한 인적 청산용이 아니냐는 불만이 나오고 있다’는 기사를 실었다. ‘팀장 ㅈ씨가 서동만 교수 출신 학교인 서울대 출신이고, 고교(경기고) 동창인 ㅅ씨가 간여하고 있다’는 내용도 함께 실렸다. 이 신문은 또 서교수가 국정원 차장급이 타는 다이너스티 승용차를 타고 국정원 내 특수 시설물인 부속 건물(9국)을 방문했다고 보도했다. 이같은 보도 내용은 당시 위세를 떨쳤던 ‘호남소외론’과 맞물려 4월22일 국회 정보위원회의 고영구 국정원장 인사청문회 때 ‘호남 배제’ 의혹으로 부각되었다. 국정원장을 지낸 천용택 민주당 의원은 고영구 원장 후보자에게 “호남 편중 인사라는 보고 때문에 인맥을 청산하는 우를 범하지 말라”고 말했다. 천의원측은 국정원 내 일부 호남 출신 인사들이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느냐는 의혹이 일자 “국정원측에서 정보를 입수한 것이 아니다. 언론 보도를 근거로 질문했을 뿐이다”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정치권 주변에서는 국정원 내 호남 간부들, 특히 광주·전남 인맥이 정치권과 언론에 정보를 흘렸다는 관측이 많았다. 서동만 실장과 친분이 있는 언론인 ㅂ씨는 “서교수도 그런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몇 가지 정황도 입수한 것 같았다”라며, 서교수가 호남 출신 간부들이 정보를 유출한 것으로 파악했다고 주장했다. ㅂ씨는 “서교수는 국정원 수뇌부에 문제가 있다고 여겨 태스크포스에서 배제했는데, 그 때문에 특정 지역 인맥이 바짝 긴장해서 문제가 커졌다고 파악하고 있더라. 국정원에 들어가 바로잡겠다는 의지가 강했다”라고 전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5월1일 서동만 실장의 ‘기강 확립’ 발언은 당장 국정원 내부에서 미묘한 파장을 일으켰다. 당시 논란을 일으킨 기사를 작성한 <한국일보> ㅇ기자는 “서동만 실장 취임과 동시에 국정원 내에서 정보 유출자를 색출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내 신상을 뒷조사한 뒤 내가 광주 출신이어서 국정원 내 호남 인맥이 의도적으로 내게 정보를 흘렸다고 단정하는 것 같다”라며 불편한 심기를 전했다. ㅇ기자는 그러나 “취재원으로부터 그런 얘기를 전해 듣고 직접 서교수 등에게 확인한 뒤 기사를 내보냈다. 구체적인 자료를 받은 것은 아니다”라며 조직적인 정보 유출 통로가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미 시작된 국정원 수술의 첫 단계는 국정원 핵심 부서를 장악해온 호남 인맥 가운데 구설에 오른 간부들에 대한 ‘인적 청산’과 ‘인력 재배치’가 될 것으로 보인다. 김대중 정부 때 호남 인맥이 국정원에서 요직을 차지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 천용택·임동원 원장 체제에서는 광주·전남 세력이, 신 건 원장(전주고 출신) 체제에서는 전북 인맥이 요직에 많이 등용되었다. 이수일 국정원 2차장을 비롯해 2차장 산하 대공정책실장 ㅊ씨, 기조실장 산하 총무국장 ㄱ씨 (이상 1급), 공보보좌관 ㅇ씨(2급)가 대표적인 전북 출신 핵심 인맥으로 거론되었다. 전남 출신 간부로는 수사국장 ㄱ씨를 비롯해 2∼3명이 거론된다.

국정원에서 간부를 지낸 한 인사는 “국·실장과 지부장 등 1급(관리관) 30여명 가운데 호남 출신들이 핵심 부서를 대부분 장악해 왔다. 단장·과장 등 중간 간부나 계장·서기관급 직원들도 대공정책실 등 핵심 부서에 많이 배치되어 있다. 자신이 능력에 맞게 자리에 앉아 있는지는 간부들 스스로 잘 알고 있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호남 출신 간부들이 위세를 떨치면서 국정원 내부에서 기강 문란 사건도 심심치 않게 일어났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3월11일, 당시 ㅈ기조실장과 ㄱ총무국장이 점심 식사를 위해 내곡동 국정원 청사를 같이 빠져나갔는데 웬일인지 ㄱ총무국장이 벌겋게 술에 취해 들어왔다고 한다. ㄱ국장은 대뜸 청사 경비를 책임지고 있던 ㄱ방호과장에게 “기조실장 절대 들여보내지 마라. 출입 통제하라”고 말한 뒤 차를 타고 사무실로 곧장 들어가버렸다. 총무국장은 국정원 안살림을 책임지는 기조실장의 바로 아래 직급인데, ㅈ기조실장은 강원도 고성 출신, ㄱ총무국장은 전북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한참 뒤 저녁이 다 되어 ‘술이 깬’ 총무국장은 다시 방호과장에게 기조실장이 돌아왔는지 여부를 물었다고 한다. 사정을 알아 보니 사태를 전해 들은 기조실장이 방호과장 눈을 피해 기조실장 차량이 아닌 다른 차량을 타고 청사로 들어왔다고 한다. 이같은 소문은 국정원 직원들 사이에도 퍼져나가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다고 한다.

인적 청산뿐만 아니라 도덕성에 큰 문제가 있거나 국정원 내에서 신망을 잃고 있는 고위 간부들에 대한 문책 인사도 꼭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국정원 간부를 지낸 한 인사는 “국장급 간부 가운데 자기가 교통사고를 내서 다쳤는데도 공무를 수행하다가 다친 것으로 해서 국가의 의료 혜택을 받고, 자녀 취업 혜택까지 누리는 비양심적인 사람이 있다. 특정 지역이 득세한다고 해서 비양심적인 사람까지 요직에 등용해서는 안된다”라고 주장했다.

국정원을 장악해 온 문제 있는 인사들에 대한 인적 청산에는 노무현 대통령도 의지가 강한 것으로 보인다. 노대통령은 지난 1일 MBC <100분 토론>에서 국정원 상층부를 이루고 있는 호남 세력에 대한 인적 청산 여부를 묻는 질문에 “국정원을 책임지고 있는 주요 간부들의 신원을 하나하나 검증해 보지 않았지만 국정원장과 기획실장, 1.2.3 차장이 그림을 그리면 따로 민정·인사 보좌관을 통해 적합성을 검증하겠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서동만 실장이 추진하는 기강 확립 및 인적 청산과 별개로 국정원은 우선 정쟁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는 일이 더 다급한 처지이다. 한나라당은 5월1일 고영구 국정원장 사퇴 권고 결의안을 국회에 낸 데 이어 국정원을 폐지하고 해외정보처로 축소 개편하는 법안까지 제출할 예정이다. 국정원으로 개명(改名)한 지 5년도 안되어 인사 태풍과 개혁 바람을 타고 있는 국정원이 제자리를 잡으려면 한동안 시간이 걸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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